소설리스트

137화 (137/200)

차진혁 디자이너는 작은 미련도 남겨두지 않고 자신이 내민 조건을 포기한 듯 보였다.

‘생각 이상으로 대단한 젊은이였네.’

복잡한 심경과는 다르게 그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힘을 가질 기회를 놓아두고 신념을 위해 달려 간다라.”

국가도 하지 못했던 일을 단신의 힘으로 보여 주었다.

그 오랜 시절 자신들의 조상들이 이루고 싶었던 일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노다 헤이치로가 놀란 건 이것만이 아니다.

전 세계가 아시아 패션 어워드에 주목하고 있는 바로 이 시점에 이런 일을 벌이다니 너무 적절하고 노련했다.

‘이걸 계산해서 했을까? 아니겠지 이 대담함과 용기가 아리raM을 더 성장시키겠어.’

이제 세계는 아시아 패션 어워드의 우승자보다 브랜드 아리raM에 더 집중할 거다.

“회장님 어쩌실 생각입니까?”

“지켜볼 수야 있겠나. 그의 마음을 알았으니 답례를 해야지. 이브 사과와 배상 발표하게. 그리고 총리한테 전화 한 통 달라고 말해주게.”

“네.”

* * *

크루즈에 내린 우리 앞에 일본 정부 사람들이 막아섰다.

주위에는 아시아 패션 어워드를 무사히 마친 류미리와 다니엘도 있었다.

“사장님….”

“괜찮아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내가 앞으로 걸어 나가 말을 이었다.

“제가 대표입니다. 이들은 제가 고용한 사람들이니 죄가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조용히 따라가시죠. 그럼, 여기 있는 인원들은 건들지 않겠습니다.”

“네.”

나는 그들이 정차해둔 검은 세단에 올라탔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바로 공항으로 갈 겁니다.”

“공항은 왜?! 경찰서나 구금장이 아니라요?”

“한국행 비행기까지 모시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누가?”

“총리님의 지시입니다.”

“누구요?! 일본 총리가 왜?”

“차진혁 씨 국외추방으로 결론 내렸습니다. 이제 일본에는 못 들어오실 겁니다. 그리고 벌금 정도는 생각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나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구속이나 범죄자가 될 거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장기 구금 정도는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큰일을 벌였는데 벌금과 국외추방 정도라니 약소한 처벌이었다.

내가 공항에 도착하자.

낯선 얼굴이 나타났다.

“장료이. 당신이 어떻게.”

그의 브랜드 타이거는 한국에서 컬렉션을 주최했다.

그런데 지금 나가사키 공항에 그가 나와 있었다.

“할아버지 부탁이야. 파리에 계셔서 직접 못 오신다고 나보고 마중 나가라 하더라고.”

“그랬구나. 감사하다고 전해드려.”

노다 헤이치로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되는 부분이었다.

한 국가의 수장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이 있다는 거였고 그만큼 고베의 약점을 거머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 이상으로 위험한 분이시네.’

그때 내 옆에서 움직이던 장료이가 말을 이었다.

“넌 정말 이걸로 만족하는 거야?”

“뭘 말하는 거야?”

“지금 이 행동은 타인을 위한 일이었잖아. 그걸 위해서 넌 우승을 코앞에 두고 모든 걸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고 만약 우승한다면 할아버지가 가진 모든 걸 가질 수 있는데 말이야.”

“장료이. 그건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어. 나는 그보다 더 큰 걸 가지고 있거든.”

“더 큰 거라니….”

“그런 게 있다. 가자.”

장료이는 내 말이 무엇인지 알 거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내 뒤로 달려와 말을 이었다.

“나도 포함이냐?”

“그래. 친구 하기로 했으니까.”

아리raM 그룹 1.

* * *

예측은 했지만, 아시아 패션 어워드 주최 측과 심사위원들은 회의를 통해 아리raM은 실격 처리했다.

하지만 나와 아리raM 직원들은 어느 하나 실망하지 않았다.

“역시 실격당할 줄 알았어. 내가 뭐랬어! 이런 정치적인 거 하면 안 된다고 했지.”

“다니엘 씨 완전 언행 불일치에요. 싸이코 같아요. 그렇게 웃으면서 그런 이야기 하지 말아줄래요.”

“내가 뭘?!”

다니엘은 얼굴이 빨갛게 물들이며 작업실로 내려갔다.

아시아 패션 어워드는 실격했지만, 다니엘의 모습을 지켜보는 직원들 모두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 이런 마음이면 충분한 거지.’

아시아 패션 어워드는 우리가 가야 하는 먼 길에 작은 해프닝일 뿐이다.

“다음 주 시상식이라고 하더라고요. 파리에서 진행한다고 합니다.”

“가봐야겠네요. 숙소랑 비행기 예약해주세요.”

실격처리 되었지만, 참가자 권한은 아직 유효한 상태다.

그때 류미리와 다니엘이 말을 이었다.

“혼자 갔다 와. F/W 일정 때문에 못 움직여.”

“저도요.”

“그럼 혼자 갔다 오겠습니다. 가는 김에 신 디렉터도 잠시 만나봐야겠어요.”

“좋죠. 안부 전해 주세요. 그리고 F/W 최종회의 내일 진행하겠습니다. 사장님 자리 비우시기 전에 생산 일정 잡고 싶은데.”

“디자인팀, MD팀 최종 시안 다 나왔습니까?”

“네. 오늘 안에는 다 마무리 짓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내일 오후에 진행하시죠.”

현재 F/W 서울 패션위크와 아리raM 액세서리 런칭 그리고 타미&아리raM 협업브랜드 런칭 일정까지 밀려드는 스케줄에 정신이 없었다.

“이번 주 안에 서울 패션위크 준비 다 마무리하고 파리 가겠습니다. 그리고 뉴욕도 갔다 와야겠네요.”

“네. 패션위크 시작 전에만 입국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모두가 흩어지고 업무를 이어가는 그때 사무실의 문이 열리며 청와대 경호실장인 유해수가 찾아왔다.

‘올 것이 왔네.’

이번 아시아 패션 어워드 결과에 따라 한국은 프랑스와 체결할 패션 체인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오히려 몇 개의 기업에서 가지고 있는 원천기술을 내놓아야 하는 실정이다.

“오랜만입니다. 차 대표님 얼굴이 더 좋아지셨네요.”

“경호실장님도요. 대통령님이 부르시던가요?”

“아닙니다. 괜히 부르면 부담스러워하실 거 같다고 제가 대신 왔습니다.”

“아… 제가 사과를 드려야 하는데.”

마음이 무겁다.

나의 행동으로 많은 것을 잃은 그였다.

“저는 제 일만 하는 편이라 잘 모르지만, 대통령님이 혼내시려고 절 보낸 건 아닌 거 같습니다.”

“그런가요.”

“이거 받으시죠.”

“아… 네.”

“저도 감명받았습니다. 누구도 하지 못할 일을 해내셨어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청와대 경호실장으로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니요. 제가 뭘.”

“아니긴요. 정말 대단한 일을 해주셨습니다. 겸손할 필요가 없을 거 같습니다.”

“커피라도 한잔하고 가시죠.”

“아니요. 일정이 있어서 바로 들어가 봐야 합니다.”

“아… 그럼 다음에 또 오시면 커피 한 잔 대접하겠습니다.”

“네.”

그가 돌아가고 상자 하나가 내 손에 쥐어졌다.

“뭐지? 생각보다 무거운데.”

나는 자리로 돌아가 상자 속을 확인했다.

“감사패?!”

사고를 친 나에게 전달된 크리스탈 감사패라니.

상자 안에는 감사패와 함께 대통령님의 친필 편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 나무라고 싶지만,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서 한 국가의 대통령으로서 부끄러워 그러지 못하겠네요.

저는 정치를 하는 사람이니 이번 일은 제가 최선을 다해 마무리 짓겠습니다. 차 대표는 그 마음으로 소신 있게 앞을 향해 가주길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감사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전 국민을 대신해 감사를 표합니다. 아 그리고 애 엄마가 정말 멋지다고 전해달랍니다.

그의 편지를 보며 코끝이 찡해졌다.

군함도 컬렉션에 의해 화이트 리스트 제외라는 대한민국에 큰 손해를 끼쳤다.

나는 몰매 맞아도 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의 기업들과 국민은 우리를 욕하기보다 일본을 향해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고 일본의 제재에 맞서 싸우는 중이다.

“미안하네.”

그때 다시 한번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의 사람들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차진혁 대표님 계신가요?”

“누구시죠?”

“잠시만요. 제 손님이에요.”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손에는 박카스 두 박스가 쥐어져 있었다.

“여기는 어찌한 일로?”

“감사의 인사 드리려고요. 할아버지들도 같이 오신다는 거 말렸습니다. 그리고 이거… 딱히 뭘 드려야 할지 몰라서.”

나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자리로 안내했다.

“앉으세요. 빈손으로 오셔도 되는데.”

“그래도요. 집회 때 자료를 받아가실 때 설마 했어요. 기대도 했고 근데 진짜 이런 일이 일어났네요. 감사합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마음 쓰지 마세요.”

강제 징용 노동자 집회의 책임자는 나에게 감사를 표하며 기대에 차서 말을 이었다.

“덕분에 사람들 인식도 많이 바뀌고 후원도 들어오고 있어요. 아 일본 전범 기업 중의 한 곳에서 사과 인사와 배상도 하겠다고 연락이 왔고요.”

“여러분이 노력해서 얻은 결과지.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축하드립니다.

나는 오랜 시간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

많은 시간을 강제 징용 노동자들과 보냈고 그녀 또한 그들 중 한 명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힘을 얻었다며 기뻐하는 그 모습에 기뻤다.

“이제 가볼게요. 바쁘신데 시간 뺏는 거 같아요….”

“별말씀을요. 다음 집회에는 저도 참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판단이 옳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 *

켈링 그룹의 정기 주주총회가 한 달도 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기에 노다 헤이치로와 신지혜는 파리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저는 아버지한테 먼저 가볼게요.”

“그렇게 하세요. 파비앙이 우리 쪽에 손을 들어주는 것도 중요하니까.”

“그것보다 오해부터 푸는 게 먼저 같아서요.”

“아. 그러네요. 어서 갔다 오세요.”

그녀는 노다 헤이치로와 하형선은 뒤로하고 켈링 본사에 가기 위해 택시 정거장으로 향했다.

그때 벤츠 세단 한 대가 멈추어 서더니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게 아닌가.

“아가씨.”

“비서님… 설마 또 제 뒤밟으신 거예요?”

“죄송합니다. 아가씨가 해외 출국하시면 보안상 제가 움직이게 되어 있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신지혜는 뉴욕에서도 그렇고 파리에서도 그렇고 자신이 해외로 출국만 하면 어느덧 나타나 있는 비서팀장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마침 잘되었네요. 오늘은 저도 아버지한테 볼일이 있어서요. 같이 가시죠.”

그녀가 멈춰있는 세단에 올라탔다.

아버지는 요새 어떻게 지내세요?”

“……그게.”

그는 차마 말을 잊지 못했다.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고민하는 눈치다.

“저도 대충 눈치채고 왔으니까. 말해주세요.”

“별로 안 좋으십니다. 늘 사색에 잠겨 계시고 얼굴빛이 어두우십니다.”

“개자식들!”

순간 분노가 터져 나왔다.

미운 아버지였지만 켈링을 그룹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쏟아부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보다 아버지와 가까이 지낸 자식들이 그걸 모르지 않을 터. 그런 아버지의 회사를 가지기 위해 등에 비수를 꽂은 격이었다.

어느덧 차량이 켈링 본사 지하 주차장에 멈추었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아저씨는 여기 계세요. 혼자 갔다 올 테니까.”

“네. 그럼 카드 받으세요. 패밀리 전용 승강기 카드입니다.”

“감사합니다.”

“부디 좋은 대화 나누세요”

신지혜는 패밀리 전용 승강기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오랜 시간 앙숙으로 지낸 아버지에게 처음 꺼내야 할 이야기를 고민 중이다.

사과를 해야 할지 아니면 왜 자신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아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12시간 동안 생각했는데… 또 고민하고 있네.”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승강기가 도착했다.

띵!

신지혜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승강기에 올라타려는 그때.

“hi. sister.”

만나지 말아야 하는 셋을 한꺼번에 만나고 말았다.

자신을 볼 때마다 동정과 분노가 함께 섞인 미소를 날리는 새어머니.

그리고 새엄마와 닮은 악마 같은 첫째와 망나니나 다름없는 둘째까지 모두 승강기에 타고 있었다.

잠시 대치 상황이 펼쳐졌고 그 침묵을 깨는 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쥴리아나 로쉘트 여사였다.

“어머 지혜 아니니. 오랜만이다. 더 이뻐졌는데. 여기는 웬일이야?”

나긋한 목소리에 따뜻하게 들릴 거 같은 질문이지만 그 속에는 수십 개의 칼날이 도사리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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