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2화 (132/200)

“무슨 소리야. 파비앙은 우리를 버렸어. 그리고 새어머니를 선택했다고!”

“그것도 잘못 알고 있어. 파비앙은 모든 걸 포기하고 한국으로 들어오려 했네. 하지만 그러지 못했지 쥴리아나의 힘이 그만큼 거대했거든 만약 파비앙이 자네 어머니에게 돌아갔다면 모두 죽었을 거야, 이건 확신할 수 있네.”

오랫동안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복수의 분노로 하루도 쉼 없이 달려온 신 디렉터였다.

그런데 분노로 쌓아 올린 탑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거 같았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노다 헤이치로에게 질문했다.

“그럼 어머니를 죽인 게 새어머니라는 말이죠?”

“직접 죽인 건 자네 새어머니는 아니야. 쥴리아나를 사랑한 아르노겠지.”

베르나르 아르노.

순간 LVMH의 회장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노다 헤이치로는 네 명의 관계가 얽히고설켜 모두가 불행해졌다고 말했다.

“이제 욕심이 조금 생기나?”

“…….”

“최근에 들리는 소리도 하나 있지. 쥴리아나는 이제 파비앙을 사랑하지 않는 거 같더군. 자식들을 움직이는 게 쥴리아나라고 알고 있네.”

“그럼 아버지는 어떻게 되는 거죠?”

“조만간 회장직에서 물러나게 되겠지. 그리고 각종 소송에 시달리게 될 거야. 쥴리아나는 분명 파비앙을 밑바닥까지 끌어 내릴 게 분명하거든.”

신지혜는 새어머니를 떠올리며 침묵했다.

두려운 상대라는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잠시 머문 저택에서 그녀의 모습은 늘 두려움 그 자체였다.

쥴리아나 로쉘트는 선한 미모와 언변을 가진 악마였다.

완벽주의자이자.

자신에게 방해가 된다면 가족도 스스럼없이 벌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신지혜는 혼란스러웠고 두려웠다.

아버지에 대한 복수보다 더 큰 산이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늘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왔던 그녀가 이제는 아버지를 구해야 한다.

“혼란스럽네요.”

“그렇겠지 하지만 지체할 수 없네. 어쩌겠나.”

“…….”

신 디렉터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켈링이라는 거대 그룹의 경영권 싸움에 끼어들기란 쉬운 게 아니다.

“주식은 얼마나 보유하고 계시죠?”

“구짜 12%, 생로랑 18%, 보테가 10%, 발렌시 25% 그 밑에는 최소 20% 이상은 다 들고 있네. 총 12조 원가량이네.”

아버지가 보유한 주식을 인계받는다고 해도 어렵다.

“그걸로는 부족할 텐데요.”

“그건 걱정하지 말게. 쥴리아나가 이번에 크게 실수를 했거든.”

“무슨?”

“베르나르 아르노를 너무 믿었어. 그의 욕심을 읽지 못했지. 그래서 이 싸움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야.”

그의 말을 빌리자면 쥴리아나는 좋은 그림으로 자신의 가문에 켈링을 귀속하려 했다는 거다.

그녀는 LVMH이 노린 켈링을 지킨 영웅이 되고 싶었지만, 아르노의 배신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결과적으로 LVMH가 진짜 켈링을 집어삼키는 꼴이 되어 버렸고 현재는 3파전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말했다.

“제가 아리raM을 떠나면….”

이제는 아리raM이 그녀의 발목을 잡는 꼴이 되었다.

현재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그녀가 회사를 빠져나가 켈링 그룹의 경영권 싸움에 끼어든다면 아리raM에 분명 피해가 생길 거다.

그녀의 공백이 분명 크게 다가올 테니까.

‘나도 결단을 내려야겠네.’

신 디렉터가 경영권에 뛰어드는 시나리오는 아시아 패션 어워드를 진행하기 전 염두에 둔 상황이기는 했지만 내 방향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번 주 안에 결정하게 길게 끌수록 분리해. 작은 지분이라도 확보해야 한다네. 내 힘으로는 부족해. 실질적으로 경영에 참여하는 사람이 나서야 하네.”

“…네.”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니엘과 류미리는 아무 말 없이 무슨 상황인지 눈치만 보고 있었다.

“미안. 사람 앞에 앉혀놓고 우리 이야기만 했네.”

“우리도 가족이야. 힘든 건 같이 힘들고 기쁜 건 같이 기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말해줘.”

나는 조용히 그들의 반대편 의자에 앉아.

이 둘에게 흘러가는 방향만을 제시했다.

많은 사건을 알려준다 해도 이해하기 힘들 것이고 현재로서 가장 중요한 건 아시아 패션 어워드였기에.

“이 정도만 알려주는 걸 이해해줘. 현재로서는 많은 걸 알려줄 수는 없어. 미안하다. 하지만 곧 알게 될 거야.”

다니엘과 류미리는 이 정도도 충분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정말 아시아 패션 어워드 꼭 우승해야 해!”

“바라던 바야.”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 디렉터가 결단을 내렸는지 의자에서 일어나 어렵게 말을 이었다.

그 모습에 다니엘과 류미리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가족이잖아요.”

“당연하죠. 가족이죠.”

“가족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가족이고 함께하지 못해도 가족이잖아요.”

“당연하죠!”

내 대답을 듣던 신지혜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의 결단을 어렵게 꺼내 보였다.

“그럼 저는 잠시 떨어져 있을게요. 잠시만 떨어져 있다가 다시 돌아올게요. 그래도 받아주실래요?”

“당연하죠. 가족인데요.”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힘겨운 길을 응원해주었다.

“잘 갔다 와요. 언니.”

“신 디렉터 잔소리 당분간 안 들어서 좋겠는데 그래도 너무 늦게 오지는 마. 나 심심하니까.”

“그럴게요. 흑… 흑.”

“그만 울어요. 울면 늙어 보여.”

‘어휴 그걸 위로하고 하냐.’

아리raM이라는 울타리에 함께 숨 쉬었고 함께 웃고 울었던 날들을 기억하는 우리가 그녀를 응원해주어야 한다.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 1.

* * *

며칠 뒤 신 디렉터는 노다 헤이치로와 파리로 떠났다.

나는 그녀가 차기 켈링 그룹의 회장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들 왜 이렇게 축 처져 있어.”

“신 디렉터 잔소리 안 들으니까. 몸이 근질근질해.”

“내가 해줄까? 그리고 너 대회 끝나는 즉시 피렌체 좀 갔다 와. 새로운 가방 가죽 좀 물색해와.”

“대회 끝나면 갈 생각이었어 냉정한 놈아!”

“냉정은 무슨! 신 디렉터님 곧 돌아올 건데 왜 그래.”

우리는 여느 때처럼 회사를 운영해 갔다.

다행히 신 디렉터는 떠나기 전 날밤을 새워가며 자신의 공백을 메우려 노력했다.

이제는 우리가 해나가야 한다.

그때 업무를 보고 있던 류미리가 서류 한 장을 들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사장님 아시아 패션 어워드 주최 측에서 공문이 왔는데요.”

“무슨 내용인데요.”

“그게 일정이 바뀌었다고 확인하고 확인 메일 좀 회신해달라네요. 제가 먼저 확인했는데 4차전, 5차전을 한 번에 묶어서 한국과 일본이 같이 진행한답니다.”

“규모가 커지겠네요.”

“네, 곧 있으면 오트 쿠튀르 시즌 시작이라 심사위원들이 건의한 거 아닐까요? 다들 워낙 유명한 사람들이라.”

“뭐 그럴 수도 있고.”

그녀의 말도 일리는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메인 디자이너가 빠진다고 해도 그들이 운영하는 브랜드는 물 흐르듯 돌아간다.

중요한 사항만 총괄디자이너들이 확인하면 될 일이다.

내 추측이지만 가장 걸맞은 이유는 현재 일본과 한국의 사이가 많이 틀어진 점 때문일 거다.

얼마 전 청와대 대국민 발표와 일본 외무성 발표를 지켜본 결과 이번을 대회를 계기로 화합을 도모해보자는 뜻이 상당히 담겨 있었다.

“여기 공문이요. 확인하시고 회신 메일 보내주세요.”

“그럴게요.”

공문 내용은 점수는 각개 채점이 이루어지며 한 가지 채점 항목이 늘어날 거라고 적혀 있었다.

4차전 주제로 현대적 전통의상, 5차전은 무대 콘셉트와 진행을 평가한다.

분명 무대를 이용해 얼마나 디자인을 잘 끌어내냐가 새로운 항목인 거 같았다.

브랜드의 컬렉션 능력까지 심사한다는 게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심사위원들이 다 현직 디자이너들이라 그런지 까다롭네.”

4차전의 주제를 미리 알려줬다는 건 디자인과 제작에 많은 시간을 부여해 준다고 볼 수 있었다.

5차전은 한국과 일본의 장소 한 곳을 정해 피날레 컬렉션을 브랜드 단독으로 진행한다는 걸 봐서 규모 또한 어마어마하다는 걸 예측할 수 있었다.

“일단 한국으로 귀국해야겠어요. 주제를 미리 알려주는 거 보니. 4차전 주제보다는 5차전에 더 큰 비중을 둔 거 같으니. 이제 브랜드로 움직여야겠어요.”

“귀국하자마자. 디자인팀이랑 디렉터팀 회의 잡아놓으라고 할게요.”

“네, 부탁드려요.”

“근데 아버님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대만 병원에 계속 있을 수는 없잖아요.”

“항공사에 의료비행기랑 의료진까지 섭외해뒀습니다.”

“잘하셨네요.”

이제 신 디렉터의 빈자리를 우리의 힘으로 메꿔나가야 한다.

그녀가 돌아오기 전 지금보다 안전한 브랜드로 거듭나 있어야겠다는 마음이 돋아났다.

“5차전 주제에 신 디렉터가 없는 게 아쉽기는 하네.”

* * *

한국 병원에 아버지를 모시고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가는 중이다.

회사에 들어가 업무를 보려 했지만, 어머니 혼자 집에 보내는 게 내심 마음이 쓰였다.

이른 시간이지만 광화문을 지나는 지점부터 상당히 정체되어 있었다.

“이 시간에 차가 왜 이렇게 막히지?”

내가 무심결에 뱉은 질문에 택시 운전사가 말을 이었다.

“이 앞에서 오늘 집회한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래요.”

그의 말을 흘려버리고 창밖을 바라봤다.

모두가 편안하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고 내 눈에는 그저 행복해 보이기만 했다.

그때 택시 운전기사가 집회현장을 바라보며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이고 어른들이 이 추운데 나오셔서 고생이시네.”

택시기사의 툭 던진 한마디에 내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에는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지만, 질서를 지키며 평화로운 집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어!”

그때 내 눈에 낯익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기사님 잠시만요.”

그에게 잠시 차를 멈춰달라는 부탁했다.

“어머니 잠시만요. 먼저 집에 가 있으세요. 금방 뒤따라 갈게요.”

“어, 그래. 무슨 일이야?”

“집회하는 데 아는 분이 있어서요. 인사 좀 드리고 바로 뒤따라 갈게요.”

“그래, 어서 갔다 와.”

나는 택시기사에게 현금을 전달했다.

“기사님 어머니 좀 잘 부탁드릴게요. 잔돈은 필요 없으니 잘 부탁드려요.”

“물론이죠.”

반대편 갓길에 내린 다음 집회가 한창인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위안부 마을의 이장이신 전미숙 여사님이 계셨고 나는 오랜만에 보게 된 여사님에게 반가운 마음으로 다가갔다.

“전미숙 여사님.”

그녀가 내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엇! 차 대표 아니야. 여기는 어떻게 온 거야?!”

“가는 길인데 여사님이 딱 보이더라고요. 잘 지내셨죠?”

“그럼 잘 지내고 말고 차 대표 덕분에 우리야 잘 지내지. 근데 외국에 있어야 될 사람이 왜 한국에 있어?”

“오늘 귀국했습니다. 근데 서울은 어떤 일로 오신 거예요?”

“집회가 있어서 왔지. 안 그래도 텔레비전 잘 봤어. 동네 할머니들이 차 대표 인물 훤하다고 얼마나 성화이신지.”

“제가 한번 찾아뵀어야 했는데 갑자기 바빠져서요. 다음에 꼭 찾아뵙는다고 전해주세요.”

“할머니들 좋아하시겠네.”

나는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며 그녀에게 말을 이었다.

“무슨 집회에요?”

“강제 징용 피해자 어르신들 집회야. 그러고 보니 차 대표 덕분에 여기 와달라고 부탁받고 왔잖아.”

“저 때문에요?”

“VOKE 잡지가 해외에서도 인기 끌면서 해외언론사에서도 위안부에 관한 관심이 커졌거든. 그래서 이번 일도 같이 홍보되면 좋겠다고 제의가 들어온 거야.”

“그렇군요.”

“이왕 온 거 어른들 한번 보고 가.”

“네. 그럴게요.”

얼떨결에 전미숙 여사님의 손에 이끌려 한창 진행 중인 집회의 맨 앞줄까지 오게 되었다.

그곳에는 나이가 아주 지긋한 할아버지들이 앉아 계셨다.

“어르신. 차진혁 대표라고 엄청 유명한 사람이에요.”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차진혁이라고 합니다.”

인사를 받으신 할아버님들이 나를 보며 환하게 미소지으셨다.

젊은 사람이 이런 누추한 곳에 와줬다며 고맙다며 말과 함께.

“어이구 고마워요. 악수 한 번 합시다.”

“네.”

내가 손을 내밀자.

할아버지의 따뜻한 손이 내 손에 휘어 감기는 거 같았다.

“총각 손이 차네요. 이거 받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래도 손이 너무 찬데. 받아.”

나는 할아버지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손을 내밀었다.

할아버지는 내민 내 손을 살며시 잡아당겨 자신의 낡은 가죽 장갑을 끼워 주셨다.

그 순간 이례적으로 빛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내 눈에 영상이 뚜렷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눈앞에 엄청난 크기의 넓은 강이 흘렀고 우거진 풀숲 덕분에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펼쳐졌으며 이 장면만 보아서는 정말 아름답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였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이곳은 내가 상상했던 그런 곳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눈앞에는 검은 교련복을 입고 있는 일본인들 주위에 수십 명의 젊은 청년들이 힘겹게 일하고 있었다.

“46번! 빨리해!”

“네, 네.”

“22번 농땡이 피울 거야!”

번호로 이름이 불리는 이들 모두 20살도 채 되어 보이지 않는 어린아이들.

그들은 산더미 같이 쌓여있는 돌과 모래, 시멘트와 나무를 나르며 고된 노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저렇게 어린 애들한테 도대체 뭘 시키는 거야!”

그 장면을 지켜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거친 돌과 모래를 쉼 없이 나르고 시멘트를 으깨어 거푸집에 붓기를 몇 시간.

단 한 번도 편하게 허리를 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순간 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미친 새끼들! 어떻게 같은 사람한테 저렇게 대할 수 있단 말이야.”

한참 동안 지켜본 결과 이것은 노동이 아니었다.

고문에 가깝다.

젊은 아이들은 안전장비 하나 없이 높은 곳에 올라갔고 장갑 하나 없이 돌과 나무를 나르고 있었으며 생과 사가 나뉘는 위험천만한 상황이 여러 번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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