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게 뭐야? 나는 가진 게 많지 않아.”
“당신이 알고 있는 몇 가지 정보면 돼. 어때 나쁘지 않지.”
단호한 목소리와 똑 부러지는 언변에 나나세는 점점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정보를 내달라는 거야.’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아는 게 많지가 않아. 잘못짚은 거 같은데.”
“알 거야. 잘 생각해봐. 당신네 회장이 지금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말이야.”
“…….”
나나세는 이 짧은 순간 자신이 어느 쪽에 줄을 서야 이득이 될지 생각했다.
사실 답을 나와 있었지만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뭘 믿고 정보를 줘야 하지.”
“믿고 안 믿고는 당신 마음인데. 뭐 좋아.”
긴 생머리의 그녀는 옆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열어 서류를 몇 장을 꺼내 나나세에게 내밀었다.
“확인해봐.”
나나세는 그녀가 내미는 서류를 천천히 확인했다.
순간 멈춰있던 야욕이 피어나 심장을 미친 듯이 펌프질하기 시작했다.
“이 브랜드들은.”
“어때 네가 지금 운영하는 이브보다 몇 배의 가치를 가진 브랜드야. 그 브랜드의 최고 경영자가 되게 해주지. 그리고 주식을 원한다면 그것도 오케이. 어때?”
“좋아! 하지만 조건이 있어. 지금 대회가 진행 중이야. 그 사람들의 신변은 보호해줘.”
갑자기 나나세의 머리에 장료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아씨 차진혁 이 새끼는 왜 떠오르는 건데.’
“그러도록 하지. 하지만 그들과 관계된 자들은 어쩔 수 없어.”
“좋을 대로.”
나쁘지 않은 거래다.
어쩌면 가장 없애버리고 싶은 노다 헤이치로와 그 수족들까지 없애 줄지도 모른다.
나나세는 환한 웃음을 머금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걸 그녀에게 털어내기 시작했다.
‘3차전을 마지막으로 경기를 포기하고 파리로 떠나면 그만이야.’
모두가 진혁을 걱정하는 가운데 나나세는 그러지 못했다.
친하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이 다가가 위로의 말을 전한다는 게 너무 가식적으로 느껴질 거 같았다.
어쩌면 속마음을 들켜버릴 것만 같아 무서웠다.
‘불편해 죽겠네! 빨리 나가란 말이야.’
그런데 나나세는 바람과는 다르게 진혁이 눈물을 훔치며 대회를 진행하자는 말을 하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젠장!’
진혁이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 불안해 집중되지 않았다.
* * *
모두가 노다 헤이치로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오랜 시간을 생각하고 어렵게 말을 이었다.
“차형만 씨는 자네를 위해 우리와 함께 일하기로 되어 있었네.”
“말도 안 되는!”
“내 말에 거짓은 없다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군.”
그는 다시 뜸을 들였다.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증명할 수 있는 부분을 파고들었다.
“자네의 친아버지는 차형만이 아닌 김태현일세 그건 옆에 계시는 자네 어머니가 증명해 주실 테니 가장 빠른 진실일 테지.”
순간 찌릿한 전기가 내 몸 전체를 관통하는 거 같았다.
“김태현….”
“그게 진짜 자네 친부의 이름일세.”
“김태현은 김서진 디자이너의 아버지의 이름인데 내 부친이라고?!”
“설마 자네도 알고 있었던 건가? 김서진 디자이너가 자네의 친형일세.”
순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내게 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순간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악!”
“갑자기 무슨 일이야.”
“사장님.”
“차 디자이너!”
“진혁아.”
모두가 바닥에 주저앉은 나에게 다가왔다.
그 순간.
기억의 파편들이 소용돌이치며 하나하나 맞춰져 가는 느낌이 들었다.
“서진아. 이제 할아비와 단둘이 살아야 한다.”
“진혁이는요?”
“동생을 지켜주고 싶다고 하지 않았니. 그럼 이제 진혁이를 잊어야 한단다.”
“잊어야 지킬 수 있는 거예요?”
“그렇단다. 잊어야 우리 모두 행복할 수 있어.”
“그럼 잊을게요.”
무슨 이유에서일까.
할아버지는 세뇌하듯 내 기억 속에서 동생을 가져가 버렸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나.
내 기억 속에는 동생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떠올랐다.
내 동생 진혁과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추억들까지 말이다.
“흑… 흑….”
동생인 진혁의 몸에 어쩌다 내가 들어오게 된 건지 알 수 없다.
수많은 가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노다 헤이치로에게 물어볼 게 남아있었다.
이 사건이 장료이 집안과 우리 집안이 해결할 문제라면 저 검은 정장이 나를 죽일 이유가 없다.
나는 그의 옆에 서 있는 저 젊은 사내의 정체를 물어봐야 했다.
“그럼 내 형의 죽음도 이 일과 연관되어 있습니까.”
“그러네. 자네 형의 죽음도 분명 이 일과 연관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네.”
노다 헤이치로가 말을 이으려는 그때.
뒤에 서 있던 검은 정장의 사내가 앞으로 다가와 말을 이었다.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저니까요.”
그는 검은 정장의 사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 그대로를 설명해 드리게.”
“네.”
검은 정장의 사내는 나에게 고개를 숙이고 먼저 사과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박종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제 불찰로 형님분을 잃은 데에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
“그게 무슨?”
“회장님의 명령으로 김서진 디자이너의 보호를 전담했던 게 저였습니다. 제가 지키지 못했습니다.”
내가 착각하고 있었다고 박종식이 말하고 있었다.
죽음 직전에 본 상황.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박종식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자가 스스로 나를 죽인 범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제가 달려갔을 때는 김서진 디자이너가 자상을 입은 상태로 바닥에 쓰러져 계셨습니다. 제가 도착하는 순간 숨이 끊어졌습니다.”
“그럼 범인은?”
“범인의 얼굴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제 얼굴에 자상을 입힌 놈이니까요. 하지만 정확한 신상은 알지 못합니다.”
“…….”
“약속드리겠습니다. 제가 꼭 복수해드리겠습니다.”
노다 헤이치로가 박종식을 대신해 말을 이었다.
“박종식 군의 부모님도 그놈에게 당했습니다. 그러니 믿어도 됩니다.”
“…….”
더 따져 물을 수 없는 이유를 듣고 말았다.
“그랬군요. 하지만 그놈에게 복수할 때는 저와 함께여야 할 거예요.”
“약속드리겠습니다.”
이제야 내 죽음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내가 죽기 전 보았던 기억은 죽기 직전에 나를 구하기 위해 나타난 박종식이었다.
이 향기와 얼굴의 자상이 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진혁아 괜찮니?”
“네… 괜찮아요. 어머니.”
마치 검은 안개로 가득했던 내 기억이 맑게 개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떨리는 목소리로 어머니가 나에게 말을 이었다.
“진혁아. 미안하다.”
내가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바라보자.
어머니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그리고는 내 손을 강하게 부여잡았다.
“숨기려고 했던 게 아니야. 네 형이 그렇게 된 사실을 알고 더 숨겼다. 네가 우리를 원망하고 아파할까 봐 무서웠다.”
“네….”
“그리고 단 한 번도 네 아빠랑 나는 네가 친자식이 아니라 생각한 적 없다.”
어머니의 슬픈 얼굴을 보니 혼란스러웠다.
‘내가 아닌 내 동생 진혁이가 이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데 나여서는 안 되는 건데.’
밀려드는 기억의 소용돌이와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들이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거 같았다.
나는 고작해야 2년의 세월을 이 몸에 머물렀다.
하지만 25년이 넘도록 키워주신 분들의 진심을 동생이 들을 수가 없다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동생을 대신해 부모님을 안심시켜 주는 거라 믿고 싶었다.
“괜찮아요. 단 한 번도 그렇게 느낀 적 없으니까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고맙다. 진혁아… 흑흑.”
나는 노다 헤이치로를 바라보며 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말했다.
“이제부터가 더 중요하네. 자네 집안의 이야기니까.”
그렇게 시작부터 놀라운 이야기가 이어졌다.
“조선의 마지막 침선장 김영인 선생님이 자네의 증조부시네. 그 말인즉 자네가 침선장의 후손이라는 거지.”
“옛날 분과 지금 이 일과 무슨 상관이죠?”
“상관이 있지. 모든 사건의 시작이 자네 집안과 우리 집안 어른들 때문에 시작되었으니 말이야.”
“사건이라니?!”
“장료이 아니 자수장의 자손인 내 손주 기원아 너도 함께 듣거라.”
노다 헤이치로의 말에 나는 고개가 돌아갔다.
‘자수장의 자손이라니.’
그 어둠 속에서 옷에 수를 놓은 후 절을 하던 그 자수 장인이 회장과 장료이의 조상이라니.
오랜 시간 궁금해하던 의문이 풀려나갈 때마다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궁금증이 해소되며 온몸에 엔도르핀이 흘러나오는 거 같은 쾌감까지 들게 했다.
이건 마치 운명의 고리가 장료이와 나를 엮어 한자리에 모이게 한 거 같았다.
“이건 자네 아버지가 보관하고 있던 걸 내가 받은 걸세. 이제는 자네가 가지고 있게나.”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회중시계 하나를 내 앞에 내밀었다.
회중시계 머리에는 아주 정교하게 한자로 대한제국이라는 글귀와 태극 무늬가 조각되어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름다움은 전혀 바래지 않았다.
“장인의 작품이군요.”
“그렇다네.”
나는 그에게서 회중시계를 전해 받았다.
노다 헤이치로는 장료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기원아 너도 꺼내 보아라.”
“네.”
장료이는 자신의 주머니에 보관하고 있던 회중시계를 꺼내 내 앞에 내밀었다.
그 순간 두 개의 회중시계가 빛을 발하며 하나로 합쳐지며 광활한 빛을 내뿜어냈다.
나 이외에 모두가 일시적으로 멈추었고 공간이 왜곡되듯 오래전의 일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새로운 진실 2.
* * *
유럽에 파르테논 신전이 있다면 한국에는 경복궁이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란히 나열된 거대한 나무 기둥이 하늘을 덮을 만큼 커다란 지붕을 지탱하고 있었다.
“자수장?!”
이제는 아주 선명하게 자수장의 얼굴이 비쳤다.
이곳에는 자수장을 포함해 내 조상이신 침선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가장자리에 또 다른 인물이 함께 공간을 채워주고 있었다.
“이건 내 마음이니 받아두시오. 상선 어서 전달해 주시오.”
“예, 전하.”
허리가 반쯤 굽은 상선이 회중시계 두 개를 고운 보자기 위에 올려 상의원의 침선장과 자수장에게 전달했다.
“어찌 이리 귀한 것을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내가 의지할 곳이 몇 없소. 자네들은 그나마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니 내 마음이라 생각하고 받아주시오. 시간을 알아야 내 부탁에 귀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니 아주 탁월할 듯싶더이다. 그리고 만일이지만 일이 잘 해결된다면 더 좋은 것을 하사하겠소.”
“일이라니….”
“내가 은밀히 시킨 일이 있소. 그대들이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니 담아두지 마시오.”
한 나라의 군주가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은밀한 일이라니….’
“만일이지만 내 신변이 위험해진다면 세자를 나라 생각하며 잘 보살펴 주시오. 내가 이리 부탁하오.”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부탁이 아닌 어명을 내려 주시옵소서. 어찌 전하께서 하찮은 저희에게 부탁하신단 말입니까.”
“벗이지 않소. 벗에게는 명령이 아닌 부탁을 하고 싶소.”
둘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며 바닥에 이마를 조아렸다.
이 힘든 시국에도 상의원의 식구들과 자신들을 위해 애써주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부탁이라… 그만큼 둘을 신뢰했다는 말인가.”
만월이던 밤이지만 달이 구름에 가려 빛 한 점 땅에 흘러내리지 않는 어두운 밤.
둘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상태에서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찌 눈물을 보인단 말이오. 이만들 일어나시오.”
“예,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