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왔어.”
밝은 에너지를 가득 머금고 있는 목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에는 장료이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야 오나 보네요.”
“아니 나 한 시간 전에 왔어. 인터뷰한다고 이제 들어온 거지. 다들 내 스타성을 알아본다니까. 인터뷰 재미있어.”
“근데 표정은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아… 우리 할아버지가 잠시 왔다 가셨거든. 신경 쓰지마 별거 아니니까.”
“할아버지? 그 가죽장인이라고 하시던.”
“아… 응….”
“아직 계시면 인사 한번 드려도 될까요?”
몽골의 말 안장을 만드는 가죽장인이라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장료이의 할아버지와 가죽에 대한 심도 있는 대화를 통해 한층 더 가죽에 대한 이해도를 올리고 싶었다.
하지만 장료이가 곤란하다며 내 의사를 거절했다.
“아 할아버지가 잠시 들린 거라고 가셨어. 다음에 꼭 보도록 하자고.”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쟝료이와 대화가 마무리될 때쯤.
나나세 디자이너와 아룬 디자이너가 대기실로 등장했다.
순위권에 있는 둘은 긴 시간 기자들에게 잡혀 있었는지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다시는 인터뷰 안 해! 미친 기자들 예의도 없고.”
나나세는 대기실 의자에 앉으며 계속해서 기자들 욕을 뱉어냈다.
‘다행이네. 2차전보다는 안정돼 보여.’
미운 정도 정이라고 2차전에 이어 3차전에서도 멘탈 관리가 안 될 거 같아 걱정했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장료이는 짜증을 가득 머금고 있는 나나세에게 다가가 기분을 풀어주듯이 장난을 치고 있었다.
‘의외네. 장료이 장난을 다 받아주고.’
괴팍한 성격의 그녀지만 장료이가 다가가 장난을 치니 아닌 척 받아주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짧은 휴식시간이 지나가고 시계의 초침이 3차전의 시작을 가리켰다.
아니나 다를까.
촬영 스태프가 대기실로 들어와 디자이너 모두에게 중앙무대 위로 올라와 달라는 부탁을 하곤 사라졌다.
“다들 스탠바이 준비해주세요. 10분 안에 중앙무대에 올라와 주시면 됩니다.”
* * *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집으로 들어왔다.
암흑으로 가득한 거실을 신발장에서 바라보며 잠시 멍하니 서 있을 뿐.
한 걸음도 안으로 걸어 들어갈 수 없었다.
“하…… 내 집인데 불편하네.”
그렇게 울렁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부엌으로 이동해.
컵에 물을 한잔 따른 후.
식탁에 앉아 멍하니 물잔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이야기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내적갈등이 심화되어 갔다.
그때.
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형만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당신 왜 멍하니 앉아있어. 무슨 일 있어?”
“아니… 무슨 일은 아무 일도 없어.”
그녀는 안방으로 들어가 겉옷을 걸고는 내가 앉아있는 식탁으로 다가왔다.
“당신 진짜 별일 없어? 표정이 안 좋은데.”
“여보…….”
“응? 말해요.”
차형만의 표정을 바라본 김현숙은 불안했다.
저런 표정, 그리고 먹먹하게 말을 잊지 못하는 저 모습.
단 한 번 있었다.
30년 가까이 함께 살아오며 단 한 번.
이 사람은 어지간히 힘든 일에는 내색조차 안 하기에 이런 경우는 단 한 번밖에 없었다.
진혁을 데리고 왔던 20여 년 전 그때와 똑같았다.
“무슨 일이에요. 설마 또 보증 선 거야? 이번에는 금액이 큰가 보네.”
심각한 상황이지만 차라리 더 큰 일이 아니길 바라며 장난스레 툭 던져본 농담에도 별 반응이 없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점점 불안해 화가 나려 한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휴… 그럼 무슨 일인데!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차형만은 고심했다.
자신이 모든 걸 짊어지고 갈 것인가.
아니면 아내에게 이 상황을 전달해 같이 헤쳐나갈 것인가.
하지만 후자를 선택한다면 노다 헤이치로의 말처럼 아내도 힘들어질 게 분명하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와 자식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차형만은 그 순간 결심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진혁이 보고 싶어서 그러지.”
“난 또 뭐라고 그게 뭐라고 그렇게 심각하게 있어요. 보고 싶으면 보면 되지. 나도 우리 아들 너무 보고 싶기는 한데. 우리 그럼 말 나온 김에 대만 갈래요?”
“대만?!”
“진혁이 지금 대만에서 3차전 하고 있다고 전화 왔었거든 뭐 대만 정도면 먼 거리도 아닌데. 관광도 할 겸 갔다 오지 뭐.”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지.”
어쩌면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낼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4차전이 들어가면 한국과 일본이라는 가까운 거리에서 대회가 치러질 것이고 그럼 다시 다니엘에게 자기 일을 전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뒤로 노다 헤이치로의 말처럼 은퇴를 선언하고 비밀리에 그의 일을 도울 것이다.
진혁을 위해서 아니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말이다.
“가자. 가서 우리 아들 보자.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데도 가고 말이야.”
복잡했던 마음이 사랑하는 아들을 본다는 생각에 깨끗이 사라졌다.
그리고 현재는 하나만 생각하기로 했다.
가장 사랑하는 아들 차진혁을 지금 보고 싶다고.
“근데 정말 무슨 일 없어?”
“없어! 여보 근데 내가 갑자기 없어진다고 너무 걱정하지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당신이 왜 갑자기 없어져요?”
“아니야. 말이 그렇다고.”
김현숙이 차형만과 함께한 세월이 벌써 30년이 넘어간다.
숨만 쉬어도 어디가 불편한지.
표정만 봐도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 수 있는 세월이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그녀는 남편 차형만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따져 묻지 않았다.
가족을 위해서 모든 걸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가 행하는 모든 일에는 정당한 이유와 믿음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냥 묵묵히 기다려 줄 뿐이다.
“그런 생각 말고 힘들고 걱정되는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요. 머리도 맞대면 좋다잖아.”
“그렇지. 내 아내가 나보다 낫다. 일단 짐 싸. 내가 비행기 예약할게. 오늘 당장 떠나자고.”
“좋아요.”
그녀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차형만은 가슴속에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다.
* * *
디자이너들이 중앙무대에 올라서자 하경의 오프닝 무대가 펼쳐졌다.
여전히 힘이 느껴졌으며 촐랑거리는 진행 스타일이 오늘따라 프로페셔널하게 느껴졌다.
3차전 안내 멘트를 녹화한 이후.
여느 때와 똑같이 디자이너 모두를 인터뷰하듯이 소개해 나갔다.
“여러분 오늘은 아주 특별한 분들을 모셨습니다.”
하경의 멘트를 시작으로 무대 뒤에 설치된 스크린에서 로고 형태의 문장이 크게 나타났다.
나이크X아디도스의 로고.
“나이크X아디도스!? 설마….”
디자이너들 모두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화면을 응시했다.
아시아 무대에 왕국급 브랜드 두 개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다니 놀랄만한 일이다.
로고가 사라지고 나타난 영상은 마치 하나의 영상처럼 흘러나왔다.
나이크와 아디도스의 스마트 팩토리의 모습.
다르지만 같아 보이는 환경.
현재 두 브랜드는 생산을 사람이 아닌 로봇이 대체하고 있으며 의류와 스니커즈를 만드는 스마트 팩토리를 의류 브랜드 최초로 구축했다.
가장 먼저 4차 산업을 알린 기업이라 할 수 있었다.
스마트 팩토리의 영상이 흘러나 간 후.
나이크의 조던시리즈와 에어맥스 라인업이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각종 브랜드와 디자이너들과 함께 진행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협업 한정판 스니커즈를 소개했다.
뒤를 이어 아디도스의 이지부스터 300, 350 v2, 500 라인업이 흘러나왔으며 나이크와 마찬가지로 자신들과 협업을 진행 중이라며 디자이너 스니커즈와 의류를 소개했다.
“소개합니다. 나이크의 협업 담당자 그레이트 그리고 아디도스 총괄디자이너 알렉스입니다. 많은 환호와 박수 부탁드립니다.”
순간 방청석에서 힘찬 박수가 쏟아졌다.
왜 아니겠는가.
가장 보편화된 브랜드이자 전 세계인이 알고 있는 두 브랜드의 핵심인물들이었다.
‘이번 주제는 액티브 웨어겠군.’
먼저 마이크를 들고 말을 이은 건 나이크 협업 담당자인 그레이트였다.
그는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반가워. 다들 대단한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다는 소문에 내가 발 빠르게 이곳을 찾았어. 그러니 이번에도 대단하면서도 트랜드화된 디자인으로 나를 매료시키길 바래. 이상! 무운을 빈다고.”
그는 장난기 가득한 웃음으로 디자이너들에게 엄지손가락을 올려 보이고 물러났다.
뒤를 이어 아디도스의 총괄디자이너 알렉스가 말을 이었다.
“나는 얼마나 당신들이 액티브 스포츠 웨어를 잘 이해하고 있는지를 볼 겁니다. 많은 명품 디자이너들이 스포츠 웨어를 잘못 활용하고 있습니다. 스포츠 웨어만이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는데도 말이죠. 최근에 구짜에서 액티브를 기반으로 만든 디자인이 굉장한 히트를 쳤습니다. 여러분도 그만큼의 능력을 발휘해주길 바랍니다.”
액티브 웨어.
운동할 때 입는 옷을 통틀어 이르는 용어다.
하지만 액티브 웨어의 활용력을 생각하면 패션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웰빙 시대라는 21세기 운동을 하는 그 순간도 패션을 놓칠 수 없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소비층 또한 광범위하다.
액티브 웨어는 스포츠 외에도 힙합, 일상, 자신을 표현하는 용도로 많이 쓰이기도 한다.
특정 활동에 제약이 없는 의상이라 볼 수 있다.
‘예상대로네. 스포츠 웨어라…. 쉽지는 않겠는데.’
그의 말에 액티브 웨어의 이해라는 말이 거슬리게 들렸다.
스포츠의 종류에 따라 기능과 의상 디자인이 확연하게 달라진다.
그걸 파악하기란 쉽지 않으며 전문 액티브 웨어 디자이너가 아니라면 섬유와 소재의 기능을 모두 파악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그의 심사기준이 무엇일까? 우리가 그 능력을 모두 습득하고 있는지를 보고 싶은 걸까??
나는 점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이 부분을 잘 파악하는 사람이 분명 높은 점수를 얻게 될 거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두 심사위원이 마이크를 내려놓자.
하경이 다음 심사위원을 소개하기 위해 마이크를 들어 올렸다.
“마지막 심사위원이 오랜 시간 무대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요. 이제는 소개하겠습니다. 3차전 심사를 맡게 된 디자이너는 바로 아시아 출신으로 현재 패션계에 가장 떠오르는 별이라 칭송받는 파리의 유영미 디자이너입니다.”
그녀의 등장으로 아시아권 디자이너들 모두가 환호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아시아의 떠오르는 별이라는 칭호를 가진 그녀.
천재디자이너 김서진의 뒤를 이은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가 바로 유명미였다.
하지만 한국에서보다 유럽, 미국에서 더 유명하다.
그녀의 브랜드 기반이 파리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브랜드 유영미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만든 남성복 전문 브랜드로 시작부터 대기업도 들어서지 못한 파리의 백화점을 장악했다.
그녀의 행보는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평론가들도 존재하고 있다.
그녀가 무대 위로 올라와.
마이크를 들어 올렸다.
‘오랜만이네. 유영미.’
아버지의 은퇴 6.
* * *
그녀를 알게 된 건 5년 전.
“총괄님 누가 찾아왔던데요?”
“누가?”
“모르겠어요. 동양인이던데 로비에 있어요. 가보세요.”
샤네르에 갓 총괄디자이너로 부임하고 열린 첫 F/W 컬렉션 이후 바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누구시죠. 저를 왜?”
“존경합니다!”
“네?! 무슨 뜬금없이….”
풋내기 디자이너였던 유영미의 첫 모습이 내 머릿속에 선하다.
이른 나이에 디자인학교를 졸업하고 파리로 달려왔다는 그녀.
“그 말 하려고 온 거예요?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아, 그게…… 한국에서 온 김서진 디자이너님 사촌이라고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당돌한 모습의 그녀에게 나는 호기심이 느껴졌다.
“줘봐요.”
“네?!”
“포트폴리오 들고 온 거 아닙니까. 그거 보여주려고 무모한 짓 한 거고요. 그럼 성공했습니다. 심심하던 찰나였으니까요.”
“네….”
그 순간 그녀가 내민 디자인은 나를 매료시켰다.
풋내기 디자이너가 아닌 분명 내 뒤를 이을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디자이너가 될 거라는 기대감이 생겨났다.
“남성복 전문으로 하는 게 좋겠네요. 여성복에는 매력이 없어요. 평범하고 누구나 만들 수 있는 디자인이네요. 하지만 남성복은 정말 매력적이에요. 선과 선을 잘 사용하는 거 같고 남자의 체형에 관해 많은 공부를 한 거 같네요.”
“…….”
“조언이 더 필요한가요?”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절대 안 잊겠습니다.”
“은혜는 무슨 가봐요. 나 바쁘니까.”
그 뒤로 2년 뒤 다시 만난 장소는 바로 파리 도심 한복판에서 열린 남성복 전문 브랜드 유영미의 파리 컬렉션이였다.
“설마 했는데.”
“그때 조언 덕분에 더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그녀와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가는 가운데 호기심을 느낀 바쟐이 다가왔다.
“오! 이런 미인을 숨겨두고 있었단 말이야?”
“넌 알 거 없어. 가자.”
“뭘 가! 나 방금 왔는데. 저는 바쟐이라고 합니다.”
유영미는 우리 둘의 모습을 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유영미라고 합니다. 바쟐 디자이너님 뵙게 돼서 기쁘네요. 최근에 저도 오픈 화이트 의상 자주 이용하고 있습니다.”
“오호 그래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요. 제가 신경 써서 선물해드릴 테니. 그리고 서진이 잘 부탁하고요.”
“네?!”
바쟐의 목을 감아 헤드락을 걸며 뒤돌아서는 나를 보며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적당히 해라. 한 번 본 사이야. 실례라고.”
“아 그랬냐.”
바쟐은 그제야 내 손을 뿌리치고 뒤돌아서며 그녀에게 말을 이었다.
“오늘 파티할 건데 꺄사오 건물 꼭대기로 와요. 디자이너들 모임이니 도움 될 겁니다.”
“네가 뭔데 초대하고 난리냐.”
“내가 모임 회장인데 이 정도 권리도 못 주장하냐.”
“어휴, 뭐 시간 되면 와요.”
그렇게 우리 셋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나는 심사위원이 된 그녀를 바라보며 많은 것이 변했다는걸 새삼 느끼고 있었다.
“반가워요. 유영미입니다. 아시아권 패션 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초청받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액티브 웨어를 얼마나 명품화하면서 패션화할 수 있는지 디자인 능력을 평가할 겁니다. 이전 회차보다 더 냉정하게 판단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