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하게 하세요. 제가 초대한 분인데 불편하게 있으면 되레 미안한걸요. 제 제의를 받아들일 용의는 있으세요?”
“저는 여기서 나고 자랐습니다. 한국이라는 곳을 가본 적도 없고요. 아이도…….”
그녀는 류미리의 무릎에 앉아있는 아이를 지긋이 바라봤다.
‘환경에 적응하기가 힘들기는 하지만.’
“한국에 머물 곳과 아드님 교육도 최대한 저희가 책임져 드리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외국인전문학교로 입학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로부터 그녀는 오랜 시간 고민을 이어갔다.
나고 자란 나라였고 낯선 환경에 간다는 게 두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홑몸도 아닌 자신만을 바라보는 아이가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나를 따라 한국에 간다면 더 나은 삶이 보장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나는 서서히 이 협상의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연봉은 5천만 원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이 나랏돈으로 백이십만 달러 정도 되겠네요.”
“네?! 제 연봉을 그만큼이나 주신단 말씀이신가요?”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나에게 질문을 해왔다.
그 모습이 흥미로웠는지 신 디렉터가 말을 이었다.
“그게 다가 아니에요. 판매수익의 퍼센티지도 계산해서 드릴 겁니다. 처음이라 비율은 낮겠지만요. 아리raM은 제작장인들의 능력을 높게 사는 브랜드니까요.”
“정말이세요?!”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나는 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넘어왔군.’
우리는 식사를 마무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천령진은 연신 나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안 그러셔도 돼요. 아리raM은 호칭만 다들뿐이지 모두 같은 위치에 있으니까요.”
“그래요. 대표님이신데.”
“하여튼 대회 날 아이와 함께 오세요. 그날 보시고 계약서도 작성하시죠. 그리고 저희가 한국에 들어갈 때 함께 들어가는 거로 하죠.”
“네.”
그녀는 다시 한번 우리 모두에게 고개 숙이고는 돌아서 걸어 나갔다.
“사장님 정말 믿어도 되는 거죠?”
류미리는 아직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차차 알게 될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손해 볼 장사할 사람은 아니니까요.”
옆에 있던 신지혜는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저는 전적으로 사장님을 믿습니다.”
“드라마 보셨죠?”
“…….”
그렇게 우리는 하루 일정을 마무리했다.
* * *
한 주가 빠르게 지나갔다.
우리는 아침 일찍부터 타이베이 글로벌 컨벤션 센터로 향했다.
드디어 아시아 패션 어워드 3차전이 시작될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에.
“기자들이 더 늘어난 거 같지 않아요?”
“그러네요. 조금 멀리 대죠. 가까이 가지 말고 분명 저번처럼 잡혀서 인터뷰해야 할 거 같아요.”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고 좋지 않을까요. 홍보 효과도 있고.”
“그건 그런데 대회 전에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습니다.”
아시아 패션 어워드 1차전이 방영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그리고 장료이의 발언도 큰 역할을 해주었다.
덕분에 전 세계에서 아시아 패션 어워드에 큰 관심을 보이었다.
순위에 오른 디자이너의 브랜드들도 상당히 인지도가 늘어났고 그것이 바로 매출에 반영되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희정이가 연락 왔더라고요. 방송 나가고 주문량이 20% 상승했다더라고요. 방송 효과 톡톡히 보는 거 같아요. 1위의 위엄이랄까?!”
“다행이네요. 생산량 늘어나면 센터 직원들 고충도 늘어날 거에요. 최대한 배려해주세요. 강압적으로는 절대 안 돼요. 특근 형태는 무조건 수당이랑 지원금으로 더 챙겨주세요.”
“그럼요. 그것도 지시해 뒀어요. 희정이보고 센터 가서 장인들 의견 물어보고 합의점 찾으라고 했습니다. 내일이면 답변 올 거예요. 답변 오면 보고해드릴게요.”
“네, 부탁드릴게요.”
모두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이동하는 그때.
류미리가 갑자기 당황하며 말을 이었다.
“어… 어어”
“왜요?”
그녀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어!”
모두가 그 자리에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차장인데도 1t 트럭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그 앞에 할아버지 한 분이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큰일 나겠어!”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이 튀어 나갔다.
“이런!”
끼익!
내가 차 앞으로 튀어 나가자.
차량의 운전사가 급브레이크를 잡으며 핸들을 돌렸다.
그리고는 다시 빠르게 그 장소를 벗어났다.
사과 한마디 없이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욕을 뱉어낼 뻔했다.
“하아…….”
나는 가빠오는 숨을 정리하고 내 앞에 넘어져 계시는 할아버지에게 말을 이었다.
“괜찮으세요?”
“총각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뻔했네.”
일본식 억양이 섞여 있지만, 한국어를 잘 구사하고 있다.
“한국말을 잘하시네요.”
나는 할아버지를 부축해 일으켜 세워드렸다.
“한국말이라. 한국 사람이니까.”
“근데 억양이?”
“재일동포일세. 일본사람은 아니지.”
“그러셨군요. 큰일 날뻔했습니다.”
“고맙네. 자네 덕분에 오늘 하루도 더 살아가게 됐어.”
그는 부축하고 있던 내 손을 살짝 밀어내며 흐트러진 자신의 옷을 정돈했다.
잠시 후.
검은 정장을 입은 젊은 청년이 헐레벌떡 뛰어오며 할아버지의 상태를 확인했다.
“회장님!”
“괜찮아. 별일 아니야.”
‘회장님?’
근데 이상했다.
갑자기 나타난 젊은 사내에게서 익숙한 향기가 내 코로 흘러들어왔다.
다시는 맡고 싶지 않은 역한 두 가지 향수가 섞여 있는 이 향기.
나는 고개를 돌려 젊은 사내를 바라봤다.
고통스러운 기억이 떠오르며 몸이 기억을 거부하듯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놈이다.’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듯한 얼굴의 흉터 그리고 이 찐한 향수의 향.
바로 그놈이었다.
중국에서 놓쳐버린 그놈!
주먹이라도 날려버리고 싶은 충동이 끌어 올랐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이놈이 모시는 회장이 나를 죽이라고 사주했다면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내 원수인 건가?’
순간 헛웃음이 튀어 나왔다.
‘원수를 내 손으로 살려준 꼴이라니. 정말 바보 같잖아!’
나 자신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하늘 높이 날 준비를 하고 있던 나의 날개를 꺾어버리고 모든 걸 앗싸 간 놈을 내 손으로 구하다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을 뿐.
“자네. 브랜드 아리raM의 차진혁 디자이너지. 곧 대회가 시작될 거 같은데 안 가봐도 되나?”
“…….”
눈앞에 원수가 있는데 내가 어딜 간다는 말인가.
하지만 현재의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명분이 없어….’
그때 내 뒤편으로 신 디렉터와 다니엘, 류미리가 다가왔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어찌하시려고….”
“진짜 남자다잉 멋있었어. 사장.”
그들의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머릿속이 온통 두 명의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서만 쓰이고 있었다.
“우리는 이만 가봐야겠군. 구해줘서 고마워. 이 은혜는 내가 차후에 갚도록 하지.”
은혜를 갚는다는 말에 구역질이 올라올 거 같았다.
분명 옳은 일을 했다.
하지만 내 행동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순간 저놈들이 누군지 어떻게 찾아가면 되는지 물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젠장!’
“혹시 누구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나 말이야? 젊은 친구 우리는 다시 보게 될 거야. 그러니 너무 조바심내지 말게.”
할아버지의 말에 검은 정장의 사내도 나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다시 보게 될 거라니…. 아니 꼭 그렇게 될 거야. 내가 너희를 찾아갈 테니까!’
나는 그 둘이 떠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복수를 다짐했다.
.
.
.
유영미 디자이너가 주차된 차량에서 내리자.
파리에서부터 친분이 있던 바쟐 디자이너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려는 그때.
바쟐이 어딘가를 주시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어딜 보고 있는 거야?”
그녀가 고개를 돌리니.
현재 아시아 패션 어워드 종합 1위를 지키고 있는 아리raM의 대표 차진혁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자신도 알고 있는 노년의 신사가 서 있었다.
“노다 헤이치로…?”
그림자 그룹으로 알려진 JB그룹의 회장이 이런 곳에 있다니 의아한 상황이 펼쳐졌다.
아직 물 위에 등장한 그룹은 아니지만, 일본의 정치인들을 구워삶아 그림자 그룹이 되었다는 소문도 들은 적이 있었다.
매우 불편하고 어려운 기업이다.
“아시아 패션 어워드에도 관심을 가지는 거야?”
그가 현재 패션 시장에 행하고 있는 일들은 대충 알고 있다.
“신인들 브랜드도 흡수하려는 거야?”
많은 의문이 들지만, 관심을 두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생각을 거두고 바쟐에게 다가가 말을 이었다.
“바쟐 디자이너?!”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바쟐이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네?! 아, 오 Ms 유 이게 얼마 만이야.”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아무것도 아니야.”
바쟐은 피고 있던 담배를 구두 바닥으로 끄고는 유영미를 강하게 끼어 앉았다.
반가움의 표시.
그리고 무언가 찔리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는 반응이었다.
“이번 심사위원 너랑 나인가?”
“아니 이번에는 내 동생을 보려고 잠시 들렸어.”
“응?! 너한테 동생이 있었어. 너 동생 없지 않았나.”
“아… 서진의 동생.”
“응?! 서진의 동생이라고!”
그녀의 시선이 진혁을 향했다.
오래전 같은 한국인으로서 패션의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었던 사람이었다.
“그렇다는 말이지.”
“친동생은 아니야. 그래도 서진의 추억을 되뇌게 해주는 사람이지. 나에게는 소중한 사람이고.”
“지금 동생 잘 봐달라는 건 아니지?”
“내가 그런 사람이냐. 들어가기나 하자. 대회 곧 시작 아니야?”
“근데 도대체 내 파트너는 누구야. 왜 안 알려주는 거야!”
그녀는 투덜거리며 바쟐과 대회 홀로 걸어 들어갔다.
바쟐은 씁쓸한 표정으로 진혁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버지의 은퇴 5.
* * *
센터 입구부터 곤욕을 치르며 들어왔다.
입구는 각종 매체의 기자들과 패션 잡지사의 디렉터까지 몰려 인산인해를 방불케 했다.
모두 출전하고 있는 디자이너들의 인터뷰를 따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대회 참석도 못 할 정도로 막아서니….”
“그러게요. 하여튼 기자들 막무가내라니까. 다른 디자이너는 다 잡혀서 인터뷰하고 있던데요.”
“겨우 도망쳐 왔네요.”
대기실로 들어서자.
친해진 몇몇 디자이너들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Mr. 차, 오랜만이야.”
“오 차진혁 디자이너. 오늘도 잘 부탁해요.”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