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왜?”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자개장의 양쪽 문을 열어젖혔다.
“진혁아! 왜 여기에….”
혼자가 된 지 이틀은 되어 보였다.
온 얼굴이 눈물범벅이었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아저씨야. 형만이 아저씨야. 괜찮아.”
차형만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긴장이 풀린 것인지 진혁은 그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 순식간에 말이다.
“이게 무슨 일이야….”
장 안에서 울고 있던 아이는 친구의 둘째인 진혁이였다.
갓 돌이 지난 아기다.
“왜 이런 데 혼자?!”
차형만은 그 순간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설마. 그 약속 지키라는 거냐.”
진혁을 가슴 품에 안고 주위를 둘러보니.
장 안에는 작은 편지와 쪽지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차형만은 울음을 진정시키자 잠든 진혁을 푹신한 이불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편지와 쪽지를 확인했다.
― 아들의 친구이자. 내 자식 같은 형만이에게.
태현이의 유언을 핑계로 이 아이의 운명을 맡기마. 헤어짐만이 이 두 아이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기에 무리한 부탁의 말을 전한다.
고아인 자신을 친자식처럼 보살펴 주시던 친구 아버지의 부탁.
진혁이를 자신에게 맡긴다는 작은 쪽지.
그리고 손자에게 남긴 편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태현의 아버지는 장남인 서진이만을 데리고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 방법이 가장 안전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 이후로도 이상한 일이 계속 벌어졌다.
며칠 동안 낯선 외국인들이 태현의 집을 오갔고 외진 곳에 있던 마을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그곳에 있는 모든 걸 지워버리려는 거 같았다.
그 뒤로 차형만은 그곳을 떠났다.
“그랬군요.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혹시 편지는 가지고 오셨습니까?”
“네.”
그가 내민 흰색 종이 한 장.
벌써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편지에는 세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곳에는 할아버지가 진혁에게 남긴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 할아버지를 용서하렴. 둘을 지키기 위해 이 어려운 선택을 했구나. 너에게만큼은 이 운명을 남겨주고 싶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이유를 적어둔 편지만 남겨둔 채 홀연 듯이 사라진 진혁의 할아버지.
그리고 세월이 지나 소문으로 들려온 친구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시간이 지나 서진이 대단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까지.
모두 노다 헤이치로에게 말해주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진혁이 더 성숙하면 알려주려 했는데 이제는 보여줄 자신이 없습니다”
“김서진 디자이너가 죽어버려서겠죠.”
“네… 어째서 비극이 이어지는지. 진혁의 할아버지 말처럼 숨기면 제 아들에게만큼은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을 거 같았습니다.”
차형만은 복잡한 심경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진혁이만큼은 지키고 싶습니다.”
그는 왜 이런 비극이 이어지는지 인제 와서 알고 싶었고 친구의 아들 아니, 자신이 가슴으로 낳은 아들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
“결정하셨습니까?”
노다 헤이치로는 차형만에게 확답을 받아야만 비밀을 말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네! 마음의 준비는 되었습니다.”
“그럼 아리raM을 빠져나와 제 지시에 따라 움직이셔야 합니다. 그리고 신변에 큰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점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는 노다 헤이치로의 말에 엄청난 무게가 담겨 있다고 짐작했다.
무슨 일을 시킬지는 모르지만, 목숨을 내걸 만큼의 중대한 일이라는 건 분명하다.
“이 비극의 이유는 김태현 씨 집안이 바로 침선장의 집안이기 때문입니다.”
“네?! 침선장이라니… 침선장은 박주선 선생님이신데.”
“현재의 침선장은 진짜라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가짜도 아니죠. 하문희 궁녀가 그녀를 가르쳤으니까요. 이제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를 믿어주셔야 합니다.”
노다 헤이치로가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랜 세월 이들이 행해왔던 일과 대업이라는 큰 틀의 사명.
수많은 사건과 진실.
차형만은 들으면 들을수록 알 수 있었다.
그 모든 사건의 시작과 끝이 친구의 집안에서 시작되었다는 점까지 말이다.
“조선의 마지막 침선장 김명인의 후손들, 지금의 침선장보다 분명 김태현 씨 아버지가 더욱 침선장에 가까운 실력을 갖추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김태현 씨가 그 뒤를 이었을 테고요.”
“그게 왜. 문제가 됩니까? 좋은 일 아닙니까.”
“우리 관점에서야 좋은 일이지만 아닌 자들도 있는 법입니다. 김명인의 후손들이 없어져야 웃을 수 있는 자도 있습니다.”
노다 헤이치로의 속내가 밖으로 드러날수록 그 말이 사슬이 되어 차형만을 조여왔다.
“이제 시작입니다.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노다 헤이치로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듣고 있던 차형만의 표정이 순간순간 변했다.
그리고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실에서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앞에 앉아 있는 자가 절대 거짓을 말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믿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이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
“차형만 씨는 이제 한국이라는 나라도 잠시 떠나야 할 겁니다. 아내분을 데리고 가셔도 됩니다. 하지만 혼자가 더 편하실 겁니다.”
“그건. 아내와 상의하겠습니다.”
“아내분에게는 이 이야기를 비밀로 하는 게 더 안전할 겁니다.”
“하지만… 아내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제 아들의 엄마니까요.”
“알겠습니다.”
차형만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오른쪽 다리가 떨려와 움직임이 둔해졌다.
심리적으로도 매우 불안했으며 어떻게 이 일을 헤쳐나가야 할지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 * *
2차전을 마무리하고 대만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우리는 호텔을 잡고 회사 업무를 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나와 류미리는 9월에 시작하는 F/W 컬렉션 그리고 봄 시장을 노릴 수 있는 디자인을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온갖 인상을 쓰며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신 디렉터는 시장 상황과 오프라인 매장 개점 준비에 바빴다.
‘컬렉션은 아직 여유가 있지만 봄 신상을 미룰 수 없어.’
S/S 시즌 의상과 함께 출시할 봄 시장 신상품은 컬렉션에 많이 빗나가지 않는 선에서 여러 형태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트렌드와 새로움이라는 두 가지는 무조건 새롭게 창조해 고객의 흥미를 돋워야 한다.
그것이 명품이고 디자이너가 해야 하는 일이기에.
“류미리 디자이너 급한 불부터 끄죠. 봄 시장 디자인부터 가지고 오세요. 저번에 말해 드렸던 부분만 수정하고 저랑 회의 진행하시죠. 그리고 형준 씨랑 정원 씨도 스니커즈랑 구두, 부츠 디자인 메일로 보내라고 전달해주세요.”
“네. 그럴게요.”
대회 기간 중 틈틈이 그녀가 초안을 잡아놓았고 중간중간 내가 확인하며 수정해 나갔다.
그런 만큼. 일정을 여유 있게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다니엘이 다가와 나에게 말을 이었다.
“가방 디자인 언제 넘겨줄 거야. 4차전 한국이잖아. 들어가는 김에 패턴, 가죽, 상품화 교육했으면 하는데.”
“아…… 조금만 더 기다려봐. 지금 라인업 구축해야 해서 손도 못 댔어.”
“그러니까 무리라니까. 그게 하루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고 디자인팀 인원이라도 늘리고 하던지.”
“잔소리 사절이다. 실력이 다 형편없는데 어떻게 채용해!”
“그게 문제야. 키워야지.”
“누가 모르냐. 시간이 없잖아. 지금 대회인데 어떻게 키워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할 테니까. 지금 가방제작팀 상황 보고 좀 해봐.”
현재 주요 인사들이 모두 해외에 나와 있는 상태다.
그리고 출하 전 검수를 전담하던 다니엘이 나와 함께 움직이는 상황이기에 수시로 상황을 보고 받아야 한다.
CS 건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브랜드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어 예민하다.
“가방 쪽은 이상 없어. 아버지가 잘해주고 계셔 장인분들이 너 신경 쓸 거 같다고 자체 검수까지 해주시고 있고 본사로 들어오는 A/S 건은 아버지가 처리하시고 지방은 공방 장인분들이 맡아주고 있어. 특별한 사항 생기면 말해줄게.”
“장인분들한테 미안하네. A/S 건 아니라도 바쁘실 텐데.”
“바쁘지 지금 가방 매출 확인해봐. 엄청나다 엄청나. 두 달이 밀려있어. 내가 여기서라도 만들어서 출하해야 할 판이야.”
“어제 봤어. 하… 너 귀국할래?”
“사양한다. 내가 잔소리하니까 그러는 거지.”
“알면 조용히 해.”
다니엘을 귀국시키는 건 무리다.
대회가 진행되는 가운데 가죽장인과 의상제작자인 류미리의 역할은 나와 동등하다.
“나 나갔다 올게.”
다니엘이 말을 남기고 호텔 방을 빠져나갔다.
더 있다가는 숨 막혀 죽을 거 같다며 말이다.
“다니엘 씨….”
신 디렉터와 류미리 디자이너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부러운 눈빛을 날리고 있었다.
제작총괄인 다니엘은 이곳이 휴가지였고 그녀들에게는 여기가 지옥이었다.
업무량이 배로 늘어나 버렸기 때문이다.
“신 디렉터님. 이상하게 여기 와서 더 바쁜 거 같지 않으세요?”
“대회 일정이랑 겹치니까. 그럴 거예요. 저도 해외 건만 처리하면 되는데 사장님이랑 같이 있으니까 한국 본사 거까지 처리하고 있잖아.”
“희영 총괄님한테 맡기세요.”
“그러려고 해도 대회 기간에 사고 터질까 봐. 제가 이중으로 처리하고 있어요.”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이상하게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
‘뭐지.’
“지금 저 들으라고 하는 말이죠?”
“절대 절대 아니에요. 상황이 그렇다는 거죠.”
나는 환하게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아닌 거 같은데.”
“정말이라니까요.”
둘은 내 말에 발끈하며 손을 내저었다.
‘맞네, 맞아.’
나는 시계를 바라보며 그들에게 말을 이었다.
‘벌써 식사시간이네. 잠시 쉬자.’
시계가 벌써 저녁 식사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실 몇 가지 업무보고를 더 받아야 했지만 잠시 미루기로 했다.
“제가 사과의 의미로 저녁 살게요. 같이 나가시죠.”
“진짜요! 이 앞에 진짜 맛있는 중화요릿집 있어요. 블로그에서 봤어요.”
“그래요. 거기로 갑사죠.”
“다니엘 씨는?”
“버리고 갑시다.”
“분명 화내실 텐데.”
“뺀질거린 벌이죠. 가시죠.”
우리 셋이 간단하게 준비를 마치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한국인 관광객들도 엄청 많이 간대요.”
“그래요. 기대되네요. 나는 사천식으로 먹어야지.”
“신 디렉터님 매운 거 잘 드세요?”
“네, 저는 잘 안 가리죠.”
“부럽다. 저는 매운 거 하나도 못 먹는데.”
두 여자의 수다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노점상이 많네.’
우리가 이동하는 길가 한쪽에 길게 노점들이 나열해 있었다.
노점상을 구경하며 지나가는 그때.
“잠시만요!”
내가 걸어가는 두 여인을 멈추어 세웠다.
‘밝은 빛이야.’
아버지의 은퇴 3.
* * *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 업무를 이어나갔다.
늘 함께 붙어 있던 덕분에 크고 작은 일을 공유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딱히 일상 대화에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었다.
그런 이유에 자연스럽게 식사시간이 업무의 연장선이 되어 버렸다.
“3차전은 일주일 뒤니까. 쉬엄쉬엄하세요.”
“사장님 건강부터 챙기세요. 이틀 밤새신 거는 알고 계세요? 사장님이 안 쉬니까. 저희가 못 쉬는 거잖아요. 그러고 보니 이유가 있었네.”
“밥 먹는데 잔소리는 사절입니다. 하여튼 죄송합니다.”
“뭐 하루 이틀 아니니까. 그러려니 합니다. 비싼 밥 사주시는 거로 대신할게요. 그리고 저희 다. 프로잖아요. 신경 안 써주셔도 알아서 컨디션 조절한다고요. 그러니 사장님이나 몸 챙기세요.”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네요. 라인 업 계획을 제가 벌린 거라 책임감이 커요.”
“그렇게 한 시즌 미루자고 했잖아요.”
“더 미룰 수가 없으니까요. 더 잘 아시는 분이 그러세요. 매출이랑 직결되는 일이잖아요. 오프라인의 장점을 극대화해야 하니까.”
F/W 시즌은 가장 큰 매출을 가져와 준다.
각종 파티와 행사가 많은 하반기 소비심리가 크게 작용한다.
그 말인즉.
브랜드의 큰 매출을 기대할 수 있다는 소리.
하지만 현재 아리raM의 상태로는 큰 매출을 기대하기 어렵다.
사치품에 해당하는 가죽제품 라인 업 부족으로 수요고객층이 많이 줄어들뿐더러 오프라인 매장의 장점인 디드로 효과[Diderot Effect]를 누리지 못하게 된다.
디드로 효과는 하나의 물건을 구매하면 그 물건과 어울리는 다른 제품들을 계속 구매하는 소비심리다.
소비심리를 이용하려면 그 배경을 뒷받침해 줄 만큼의 라인이 중요하다.
추진하고 있는 오프라인 매장 증가와 의상 라인의 탄탄함을 이용하기에 지금이 가장 적기다.
‘가죽제품 라인 업은 너무 부족해.’
현재까지 출시된 온리 원 백과 시크릿 백, 도형 백까지 모두 여성을 위한 가방이다.
나는 남성 고객을 끌어오기 위해 비즈니스 백과 크로스백을 준비 중이며 남성용, 여성용 각각 클러치, 파우치, 지갑, 벨트 라인을 구축할 예정이다.
‘오프라인 매장 개점도 곧이네.’
국내는 한 달.
해외는 두 달 안에 오픈이 가능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