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 (123/200)

‘나라면… 주제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가장 고객 폭이 넓은 대만에 점수를 더 줬을 거 같은데.’

중국과 대만의 런웨이를 지켜본 내 의견과 감정이 그랬다.

쟝료이의 의상은 도전적이기는 하나 고객의 관점에서 상당히 부담을 가질 수 있는 디자인이라는 점 그리고 색상의 선택.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네.’

어찌 생각해보면 쟝료이 디자이너는 나와는 정반대 성향의 디자인을 선보이는 거 같았다.

그때 첸 디자이너가 마이크를 들고 말을 이었다.

“1위는 중국의 장료이 디자이너입니다.”

‘중국이라….’

내 예상이 빗나갔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장료이 디자이너는 제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디자인을 선보였습니다. 이 대회처럼 아주 도전적이면서도 모험심이 강했습니다. 그 점을 아주 높게 평가했습니다.”

그녀의 한마디에 1위가 된 이유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도전적.

큰 대회에서 쉽게 할 수 없는 행위다.

실패라는 변수만 없다면 누구나 도전적인 디자인과 자신만의 세계관을 디자인할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하지 못하는 대단한 일이다.

장료이라는 디자이너는 그걸 주저하지 않았으며 좋은 결과까지 손에 얻은 것이다.

그의 승리를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그만큼 실력이 뒷받침 해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2차전이었다.

그때 기뻐하는 장료이에게 발란리아가 다가왔다.

“아주 좋은 디자인이에요. 제가 설명하는 거보다는 의상과 가방을 만든 디자이너가 직접 설명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어때요?”

“하겠습니다!”

발란리아는 우렁차게 대답하는 장료이에게 자신의 마이크를 건넸다.

마이크를 건네받은 그가 짧은 시간 골똘히 생각을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주제를 잘 이해하려 노력했습니다. 어울리는 가방이 무엇일까. 그날의 분위기, 날씨, 상황에 따라 의상과 가방이 바뀐다면 만약 평범하게, 독특하게, 아니면 어젯밤에 보았던 영화의 주인공 같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요. 최종적으로 저는 새로운 도전을 해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형식화되어 있지 않은 의상과 가방을 만들겠다고 말이죠.”

내 눈에 비친 그의 의상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바로 재료였다.

광택을 한가득 머금은 붉은색 가죽.

그리고 검은색의 굵은 실선.

‘슈트라. 가죽장인다워.’

그가 만든 의상은 마치 여성 히어로가 입을 법한 몸매가 화끈하게 도드라져 보이는 타이트한 슈트다.

그 화려한 슈트 속에 일체화된 가방.

이것이 바로 높은 점수를 받게 큰 원인일 거다.

얼핏 보기에 슈트가 마치 가방 같았으며 가방이 마치 슈트 같았다.

그만큼 매칭의 밸런스를 잘 맞춰 만든 의상이다.

그때.

내 생각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장료이가 마네킹에서 의상을 벗기기 시작했다.

심사위원들은 살짝 미소 띤 모습으로 그를 바라봤다.

“뭘 하려고?”

“갑자기 의상은 왜?”

디자이너 모두 그의 행동을 놓치지 않고 바라봤다.

그 순간.

“와…….”

“대단하네요. 장료이 디자이너.”

“정말 독특하네요.”

정말 히어로가 몰래 옷을 가지고 다닐 수 있게 설계한 거 같이 의상을 몇 번 접어.

가슴에 달린 작은 주머니에 집어넣으니 정말 감쪽같이 슈트는 사라졌고.

들고 다니기 편한 백 팩 가방이 되어 있었다.

“여기 보시면 가방의 어깨 스트랩은 슈트 상태의 벨트입니다. 그리고 일체화된 신발은 가방의 바닥을 향하게 설계했습니다.”

상세한 부분 모두 설명이 이어졌다.

모여 있던 디자이너들이 재미있다며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참 재미있는 디자인이면서도 실용성과 아이디어, 그리고 제작능력까지 두루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장료이는 가장 중요한 주제에 전혀 벗어나지 않는 디자인을 만들어 냈다.

‘대단하다. 참신한 데다가 능력까지 출중해. 내가 생각한 이상이야.’

장료이가 모두에게 고개를 숙이고 디자인 발표를 끝마쳤다.

“이상입니다.”

짝짝짝!

그의 설명을 마지막으로 하경이 배턴을 이어받아 대회를 진행했다.

“아쉬움이 많이 남은 2차전이었습니다. 모든 디자이너의 결과가 스크린을 통해 보일 예정입니다.”

잠시 후.

화면을 통해 1차전과 2차전 점수가 나타났다.

디자이너들의 표정을 통해 희비가 갈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총점수 격차가 2차전으로 확연하게 차이가 나겠어.’

2차전 1등과 2등의 격차는 3점 차이였다.

장료이가 93점이고 내가 90점이다.

그리고 3위를 한 아룬 디자이너가 나와 2점 차로 88점을 획득했다.

4위 대만, 5위 러시아, 6위 일본, 7위 인도네시아, 8위 사우디아라비아, 9위 태국, 10위 터키로 5위부터는 큰 격차로 점수가 달라졌다.

종합점수로 따진다면 당연히 아리raM이 1등이고 2등이 인도의 비아드, 3등 중국의 타이거, 4등 러시아의 임페리얼, 5등이 일본의 이브였다.

그 외에는 큰 격차로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화면을 보고 있던 아리raM 직원들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다들 왜 힘이 빠졌어요. 2등이라고요. 2등 그리고 아직 종합 1등이고요. 어깨 펴세요.”

“아쉬워. 더 열심히 해야 했는데.”

다니엘이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내 욕심과 착오 때문이다.

“내 판단오류였어. 다음에는 이런 일 없을 거야. 그러니 네가 아니라 내가 반성해야 하는 거야. 너는 충분히 잘해줬어.”

“…그러니까 말이야. 최선을 다해서 너를 뜯어말렸어야 했는데. 내가 너를 너무 맹신했어. 이제부터 엄격하게 대해야지.”

“아… 그런 의미로 아쉬운 거냐.”

“응… 당연하지 사장 놈아 뭘 기대한 거냐?”

‘이걸 그냥! 한 대 쥐어박을 수도 없고.’

“그래. 내가 죽일 놈이다. 아오!”

내가 한숨을 내쉬며 모두를 뒤로하고 대회장을 빠져나가자.

다니엘이 웃으며 달려왔다.

“장난이야, 장난. 삐졌냐?”

“삐지긴, 내 잘못인데 뭘 삐져! 어깨에 손 올리지 마라. 이 장인 놈아.”

“삐졌네. 신 디렉터, 수석디자이너. 사장 삐졌어.”

“아니라고!”

내가 버럭 화를 내자.

다니엘이 웃으며 대회장을 빠져나갔다.

2차전은 이렇게 마무리가 되어갔다.

* * *

빌딩 숲인 서울의 도심을 빠져나와.

인천 외곽에 위치한 한 호텔에 승용차가 멈추어 섰다.

차형만이 차량에서 발을 내디뎠다.

그가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또 다른 인물이 다가왔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네.”

그리고 그가 자신을 데리고 온 젊은 사내에게 말을 이었다.

“고생했어. 회장님이 쉬라고 하더군.”

“그래요.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박종식은 자신보다 상관인 그의 명령에 따라 다시 차에 올라탔다.

두근거리는 심장 때문에 도저히 숙소에 들어가서 쉴 수가 없었다.

“이제 정말 복수를 할 수 있는 건가?”

그의 뇌리에는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을 고아로 만든 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구해준 이를 위해 한평생을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지 벌써 20년이 흘러갔다.

자신의 가족을 모두 죽이고 마지막에 자신의 얼굴에 칼을 가져다 댄 그놈을 이제는 자신의 칼로 죽일 수 있게 된 거다.

그놈을 잊지 않기 위해.

그날 그놈의 향기를 몸에 간직하고 그놈의 차디찬 칼날을 닮기 위해 노력했다.

박종식은 창밖으로 보이는 호텔로 들어가는 차형만을 바라보며 복수의 날이 머지않았다는 걸 짐작했다.

“이번만큼은 어떠한 사람도 잃지 않을 겁니다. 부디 회장님과 함께해주세요.”

.

.

.

차형만이 스위트 룸에 들어가는 순간.

공기 자체가 무거워져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숨 막힐 정도의 무거워진 공기를 들이마시며 대화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방 하나를 건너 걸음을 재촉하니 커다란 회의실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때 옆에서 자신을 안내하던 비서가 말을 이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가 정중히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노다 헤이치로가 반대쪽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의 등장에 차형만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그러셔도 됩니다. 앉으세요. 어려운 자리가 아닙니다.”

“네.”

자신보다 연배가 훨씬 많아 보이는 그에게 예를 갖추려 하자.

반대로 그가 차형만에게 예를 다하며 대해 주었다.

“어려운 발걸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큰 결심을 해주셨습니다.”

“아들의 일입니다. 당연히 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결정을 내린 건 아닙니다.”

“아직이군요…….”

“저에게는 아내도 있습니다. 쉬운 결정은 아닙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내분은 저희가 보호해 드릴 겁니다. 제가 결정하는 데 필요한 한 가지를 더 말씀해 드리죠. 그럼 결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차형만 씨는 김태현 씨의 친구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 대업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대업이라….”

얼마 전 자신에게 연락이 왔던 젊은 사내도 차형만에게 이와 같은 말을 전달했다.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 힘이 필요하다고.

힘을 보태 달라고 말이다.

‘거창한 말뿐이야. 이럴 때는 중립에 서 있는 게 가장 좋아.’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은 무언가에 홀려 허울뿐인 거창한 말들을 뱉어낼 뿐이라 생각했는데.

그의 입에서 가슴에 묻어둔 친구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태현아….’

차형만은 순간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한순간의 추억을 떠올렸다.

“내가 만약에 안 좋은 일에 휘말리면 우리 애들은 네가 책임져라. 너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거 같다.”

“미친놈! 별소리를 다 한다. 젊은 놈이 얼마 뒤에 죽을 거 같이 말하고 있어. 재수 없게!”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언덕 위.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얼굴에 그늘이 가득했다.

‘왜 갑자기 이런 소리를 해? 찝찝하게.’

외국을 자주 오가는 모델이라는 직업을 가진 친구였다.

하지만 자주 보지는 못해도 오랜 세월을 함께한 친구이기에 어떤 감정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냥 만약에라도 보험 들어 놓으면 좋잖아. 그것도 가장 좋은 놈한테.”

“그딴 보험 나한테 들지 말고 네가 잘 키워. 저런 떡두꺼비 같은 아들놈들 두고 죽기는 왜 죽어!”

“하여튼 그런 일 있으면 네가 우리 서진이랑 진혁이 아빠 되어 주는 거다.”

“그러던지. 저렇게 잘생긴 아들들 생기면 나야 좋지.”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행복한 모습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태현이가 세상을 떠났다.

어이없게도 빗길에 차가 전복되었고 서진과 진혁만이 살아남았다.

더욱 이상한 건 그 뒤로 이상한 일이 끊이지 않았다는 거다.

아버지의 은퇴 2.

* * *

차형만은 태현의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뒤.

그와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설마 진짜로 둘을 나한테 맡긴다고 했겠어. 할아버지도 계시는데.”

우스갯소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가도 그날의 기억이 선명해져 갔다.

“아씨. 간다 가. 간다고!”

찝찝한 기분을 버릴 수 없었다.

차형만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친구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버지 계세요? 아버지… 아버지….”

아무리 불러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늘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맞이해 주시던 친구의 아버지.

순간 장례식장에서 죄인처럼 계시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디 가셨나?”

차형만이 대문을 살짝 건들자.

잠겨있지 않았던 녹이 슨 대문이 쇳소리를 내며 뒤로 밀려났다.

끼익!

그 순간.

차형만의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마당의 모습이 아니었다.

“무슨!”

무슨 일인지 엉망진창이 된 집안을 바라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때 어디선가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으앙!”

마치 자신을 살려달라는 듯한 처절한 울음소리.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에서 간절함이 묻어났다.

차형만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따라 집안 깊숙이 들어갔다.

그리고 커다란 자개장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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