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8/200)

아무리 뛰어도 달리는 차를 따라잡기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순간 숨이 턱 끝까지 밀려왔다.

“젠장!”

나는 긴장이 풀려버린 나머지 지하 주차장 기둥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 짧은 생각들을 정리했다.

“검은 정장… 만약 바쟐이 말한 검은 정장의 사내가 저놈이라면…….”

내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순간

답이 나왔다.

“바쟐은 모든 비밀을 알고 있구나.”

친구와의 재회 3.

* * *

복잡한 심경에 몸까지 무거워지는 거 같았다.

겨우 몸을 일으켜 숙소로 들어왔다.

나는 씻을 생각도 못 하고 지친 몸을 침대에 뉘었다.

복잡한 심경을 잊기 위해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 했지만, 혼란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었다.

“내 죽음에 JB그룹과 한신회가 엮여 있다. 이제부터 그걸 알아봐야 하는 걸까?”

어디서부터 알아봐야 할지 감이 서지 않는다.

그들이 서 있는 위치와 내가 있는 곳이 다르다.

내가 그들의 신상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만 한다.

“현재 믿을 수 있는 건 바쟐밖에 없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봐야 하나?”

내 죽음에 의심이 간다는 걸 말한다면 바쟐의 속내를 파헤쳐 볼 수도 있을 거 같다.

“아씨…! 우선은 아시아 패션 어워드 우승이야. 힘을 길러야 해.”

이 대회에서 작은 힘을 키우고 바쟐을 구워삶아 진실을 파헤치는 방법.

그리고 가장 강해질 수 있는 카드가 하나 있다.

“신 디렉터.”

신 디렉터의 아버지인 프랑수아즈 파비앙를 내 편으로 만든다면 큰 힘이 될 것이다.

“신 디렉터를 켈링 그룹의 회장으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지.”

현재 패션업계에 큰 사건이 불어닥치고 있었다.

들려오는 소문으로 켈링 그룹의 친족 경영 다툼이 시작되었고 파비앙은 어느 곳도 선택하지 못한 처지였다.

그 말인즉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고 대외 이미지도 안 좋은 상태.

배다른 자식들의 싸움.

현재 신 디렉터는 그곳에서 빠져 있지만, 그녀가 조금 더 욕심을 내 경영 싸움에 들어선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신 디렉터라면 가능해.”

그녀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경영권 싸움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인맥, 능력, 학벌, 사람을 포용하는 능력까지 많은 것이 우세하다.

“내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어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흐르고 있는데 파비앙이 아직 후계자를 정하지 못했다는 건 신 디렉터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거겠지.”

파리에서 파비앙의 속내를 어렴풋이 들여다본 내 느낌으로 그의 마음속에 신 디렉터가 있다.

공평하게 경영권 승계의 자격을 주고 싶은 못난 아버지의 마음과 능력을 중시하는 그의 성격으로는 신지혜만 한 인물이 없을 테니까.

“영감탱이 내가 우승을 못 할 거 같으니까. 미루는 거겠지.”

만약 파비앙의 주식이 신 디렉터에게 양도된다면 삼파전이 이어질 거다.

그 뒤로는 주주들의 몫이다.

“주주들이라면 멍청한 그놈들보다야 신 디렉터를 선택할 거야.”

오늘 하루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다.

죽음에 무뎌진 나에게 다시 내 죽음을 쫓으라고 누군가가 알려주는 거 같았다.

“어쩌면….”

신비한 능력과 내 죽음이 어쩌면 하나에서 파생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문제일 거야. 같은 맥락일 리가 없어.”

* * *

다음 날.

바쟐의 숙소에는 큰 언성이 오가고 있었다.

“JB건 한신회건 질려버렸다고 그리고 너희도 의심 대상이야!”

“네가 의심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이 세계에 발 들인 이상 나갈 수 없다고 말했을 텐데. 네가 원했던 정보 김서진의 죽음에 대해 우리가 알려줬으니. 너도 우리에게 도움이 돼야 할 거야.”

그녀의 경고가 가득 담긴 발언에 바쟐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왜 나도 죽이게? 나는 말이야. 너희도 서진의 죽음에 한몫했다고 생각하는데.”

“말조심하는 게 좋아. 회장님이 아신다면 넌 이쪽도 네가 사는 그쪽에서도 발붙이지 못할 거야.”

“해볼 테면 해봐! 패션 세계는 그런 곳이 아니야. 아무리 회장이 힘이 있다고 해도 말이야.”

“하여튼 나는 말을 전했어. 시킨 대로 하라고.”

“도대체 쟝료이가 누구길래….”

“넌 알 필요 없어. 그놈을 파리로 오게 만들어 그게 네가 할 일이야.”

“쉣!”

둘의 논쟁이 끝이 나고 그녀는 방을 빠져나갔다.

바쟐은 아픈 속을 매만지며 어제의 일을 되뇌었다.

“차진혁 어제 분명 나한테 뭐라고 했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안 좋단 말이야.”

기억을 되뇌며 바쟐은 자신이 술기운에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이런 미친… 괜찮겠지. 하 인간아. 술을 얼마나 처먹은 거야….”

바쟐은 술기운에 내뱉은 푸념이 진혁과는 연관성이 없는 이야기라 생각하고 가슴에 담아 두지 않기로 했다.

가장 머리가 아파지는 건 장료이다.

한신회가 그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

“그를 한신회에 소속시킬 생각인 건가? 그렇다고 장료이를 우승시키라는 터무니없는 부탁을 들어줄 거 같아!”

바잘은 머리를 흩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기운이 아직 빠지지 않아 머리가 아픈데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머리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젠장! 한신회 X 자식들….”

바쟐은 한신회라는 겉치레 한 장막 뒤에 거대한 패션그룹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자신 또한 그 소속에 들어감으로써 많은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생각을 거듭할수록 의심만이 가중되었다.

“서진이 투자제의를 받은 그 날. 살해당했어. 그럼 한신회는 아니야. 서진을 살해한 건 JB가 확실하긴 한데…. 근데 왜?!”

바쟐은 가장 중요한 한신회와 JB그룹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

둘의 싸움에 피해를 본 게 서진이라는 가정이 들어서는 순간부터 한신회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진실은 둘의 관계에서부터야. 더 알아봐야겠어.”

바쟐은 어제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지고 샤워실로 들어가 차가운 물을 뒤집어썼다.

잠시나마 정신을 맑게 하고 싶었다.

“하…. 서진아 넌 알고 있냐.”

* * *

우리는 인도네시아에 도착해 빠듯한 일정에도 대회까지 회사업무를 보고 있었다.

대회 중이지만 겨울 시즌이 막바지였고 다가오는 F/W 시즌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호텔 방이 마치 아리raM의 사무실이 되어있었다.

“사장님. 이동하셔야 할 거 같은데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다들 준비하시죠.”

“네.”

2차전 일정을 위해 호텔에서 빠져나와 대회가 열리는 글로벌 컨벤션 센터로 향했다.

“이번 대회 주제는 뭘까요?”

“제 예상이지만 가방일 거 같습니다. 의상을 했으니 다음 메인인 가방을 해야 순서가 맞을 거 같아요.”

내 말을 들은 다니엘이 주먹을 불끈 쥐고는 말을 이었다.

“드디어 내가 나설 차례인가.”

“이번에도 쉽지는 않을 거야. 긴장 좀 해줘라.”

“알고 있어. 충분히 긴장도 했거든 잔소리 사절이야.”

“아. 그리고 류미리 디자이너도 준비해 주세요. 제가 부탁한 거 연습하셨죠?”

내 질문에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류미리가 말을 이었다.

“물론이죠. 며칠을 연습했어요.”

“좋습니다.”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때쯤.

우리를 태운 밴이 컨벤션 앞에 도착했다.

“가볼까요.”

“네.”

우리가 도착하자.

대형 홀 안에 많은 기자단이 진을 치고 있었다.

“오늘 무슨 날이에요. 유난히 기자들이 많은 거 같네요.”

“그러게요. 와 CNN, SKY 방송국까지 메이저급 언론사들이 다 모여 있네요.”

나는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며 무리를 살피기 시작했다.

“진짜 그러네요.”

“대회 규모가 있으니까. 언론사들도 앞다투어서 취재하나 봐요.”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컨벤션 홀로 들어가기 위해 문을 열어젖혔다.

“와! 차진혁 디자이너다.”

우리가 들어서는 그 순간.

기자 한 명의 목소리가 거대한 라운지 전체에 울려 퍼졌다.

순간 모든 시선이 나를 향했다.

“CNN입니다. 차진혁 디자이너 인터뷰 좀 부탁합니다.”

“SKY채널 김진수 기자입니다. 저도 부탁드립니다!”

메이저급 기자들이 나서자.

작은 언론사들은 나설 엄두도 내지 못하고 멀뚱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몸을 밀치고 카메라를 들이밀다 누군가 크게 다칠 거 같았다.

‘이러다 사고 나겠는데.’

“잠시만요!”

내 한마디에 기자단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 멈추어 섰고 라운지에 울려 퍼지던 목소리들도 잠잠해졌다.

“인터뷰는 모두 응해드릴 테니 질서를 지켜주세요. 곧 대회가 시작하니 길게는 못해 드립니다.”

내 말을 알아들은 기자단은 라인을 설치라고 나와 아리raM 직원들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렇게 세계 언론사들이 우리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

.

.

장료이가 비서와 함께 차에서 내려 컨벤션 홀로 들어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그의 시야에 차진혁 디자이너가 눈에 들어왔다.

“1등의 위엄이 대단하기는 하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아쉽게 되었습니다.”

“아쉽기는요. 4등과 1등의 차이는 상당한데요.”

“그러고 보니 회장님 내려오셨다고 들었는데. 이야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뭐. 아시잖아요. 할아버지 성격에 잘 나눴을 리가 없죠. 하지만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도련님 아니 쟝료이 디자이너님. 이건 분명히 아셔야 해요. 회장님은 가업을 이어가는 거뿐이지 절대 가족들을 힘들게 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미안해하고 계세요. 그것만은 알아주세요.”

“주 비서님은 여전하시네요. 한결같아요. 아주 할아버지의 충신이십니다.”

“저는 진실만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저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유를 알고서부터는 더욱 회장님에게 힘이 되고 싶어 이곳에 남았습니다.”

“어련하시게요. 들어가시죠.”

장료이도 할아버지가 가족들을 미워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아껴서 그러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감옥 같은 관심이 장료이는 싫었다.

‘가업이라.’

장료이가 컨벤션 홀에 들어가는 순간.

아리raM 인터뷰에 끼어들지 못한 언론사들이 장료이에게 접근했다.

“장료이 디자이너. 시간 좀 내주세요.”

“네?!”

“부탁드립니다.”

“네, 네.”

그도 얼떨결에 기자에게 잡혀서 어딘가로 끌려갔다.

.

.

.

직원들의 간단한 인터뷰가 끝이 나고 내 인터뷰가 진행되려는 순간.

장료이가 이쪽으로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작은 언론사들은 장료이를 핑계 삼아 인터뷰에 참여하려는 그림이 그려졌다.

“장료이 디자이너….”

“오호! 차진혁 디자이너.”

그가 어색한 웃음으로 나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때 CNN 기자가 MC 역할을 자처하며 마이크를 들고 우리 옆에 앉았다.

“우승 후보 중 2분을 모시게 되었네요. 차진혁 디자이너와 장료이 디자이너.”

“아, 네.”

카메라 앵글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먼저 1차전 1위로 마무리한 차진혁 디자이너에게 질문하겠습니다. 만일이지만 우승을 하게 되면 다음엔 무얼 도전하시겠습니까?”

질문의 맥락.

나에게 자극적인 대답을 끌어내려는 의도가 보인다.

숨김없이 말해도 상관없다.

내가 지향하는 건 벌써 몇 번이나 언론에 흘렸기에.

“파리로 갈 겁니다. 그곳에서 한국의 명품을 알릴 예정입니다.”

“역시 명품의 뿌리라 할 수 있는 파리에서 시작하실 생각이신가 보네요. 아리raM도 그럼 파리에 속한 명품으로 거듭나겠네요.”

“뿌리라. 아리raM의 뿌리는 한국입니다. 제가 나고 자라 한국의 전통을 이용해 브랜드를 만들었으니까요. 제가 파리로 갈려는 이유는…….”

“대단하네요. 대단한 자신감과 애국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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