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7/200)

장료이의 호텔숙소.

“보기 좋게 4등을 했더구나.”

“이제 1차전인데요. 재미로만 하라 하실 때는 언제고.”

“난 네가 아예 참가하지 않길 바랐다.”

“언제까지 숨어 살길 바라시는 거예요!”

“숨어 살라고 하지 않았다. 내 그림자 뒤에 살라고 했지. 하여튼 나가게 된 이상 꼭 우승해라. 그래야 네가 내 앞에 설 수 있을 게다.”

“그럴 겁니다.”

다부진 몸과 아직도 시들지 않은 광택이 나이를 무색하게 했다.

얼핏 보기에는 50대 후반의 중년이지만 벌써 70세를 훌쩍 넘긴 장료이의 할아버지였다.

그는 자신의 손주를 바라보며 오래전의 자신을 생각했다.

‘속을 알 수 없는 놈. 아들은 욕심으로 죽음을 불러오더니 손주 놈은 몸에 뱀을 백 마리는 두르고 있구나.’

그는 잠시 생각을 날려버리고 다시 장료이에게 말을 이었다.

“난 이만 가봐야겠다.”

“설마 그 말 하려고 일본에서 이곳까지 오신 거예요?”

“너는 몰라도 된다.”

그때 뒤에서 있던 검은 정장을 입고 있는 남자가 노년의 회장에게 말을 이었다.

“회장님 나나세가 체크인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알겠네.”

말을 엿들은 장료이가 말을 이었다.

“나나세 누나는 대회 때 아는 척도 안 하더라.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대해 섭섭하게.”

“제가 지시 내렸습니다. 도련님을 절대 노출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뭐 어때? 무슨 문제 있어.”

“문제라기보다는 신분을 숨기시는 게 좋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왜 내가 노다 헤이치로의 손자라서 아니면 JB그룹 회장의 손자라서 둘 중의 하나일 거 아니야. 이제는 내 신분을 드러낼 때도 되지 않았어?”

“…그런 게 아닙니다.”

검은 정장의 사내가 당황하며 말을 흐렸다.

장료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이야기다.

그때 노다 헤이치로가 말을 이었다.

“너를 중국으로 보내. 가짜 할아버지를 만들고 신분을 세탁하는 데 많은 돈을 사용했다. 왜 그랬는지 내 의중을 알고도 하는 소리냐.”

“당연하죠. 아버지처럼 죽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이 고얀 놈을 봤나. 어찌 내 심중을 이해하지 못한단 말이냐!”

“당연하죠. 할아버지의 욕심 때문에 가족들 전체가 불행한 거 제가 모를까 봐요. 어머니의 얼굴을 못 본 지도 5년이 지났습니다. 찾고 계시는 게 무엇이길래. 다들 숨어 살아야 합니까!”

“너는 몰라도 된다.”

“할아버지 이제는 알려주실 때도 됐잖아요.”

“네 아비가 그 사실을 알고 얼마 가지 않아 죽었다. 내가 하나뿐인 손주 놈까지 잃으란 말이냐!”

둘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아버지도 많이 달라졌다.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하고 있지만, 가족 모두가 뿔뿔이 흩어졌고 모두 가짜 신분으로 살고 있었다.

한참 동안 이어진 논쟁이 끝이 나고 JB의 회장은 끝내 백기를 들고 말았다.

“넌 나가 있어라.”

“예.”

검은 정장의 사내가 문을 빠져나가는 걸 확인한 노다 헤이치로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이 이야기는 너와 나만이 알고 있어야 하며 절대 욕심을 부려서는 아니 된다. 그리고 넌 절대 이 일에 끼어들어선 안 된다.”

벌써 4대째를 이어온 비밀.

왜 할아버지가 패션에 이리 집착하는지에 대해 드디어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한참 동안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어안이 벙벙했다.

현실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

“말도 안 돼요. 어떻게…. 그럴 수가.”

“믿기지 않겠지만 내가 말한 모든 게 진실이다. 네 아비는 그 보물을 찾기 위해 신분을 드러내다 죽게 되었고.”

“할아버지는 왜?”

“나 하나 지킬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너희들은 아니다. 우리가 대를 이어 보물을 찾으려 하는 거처럼 또 다른 무리가 그 보물을 지키려 한다. 그러니 너는 나서지 말아라. 만약 나서야 한다면 내가 죽고 나서다!”

장료이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의 자신이 짊어질 수 없는 무게의 이야기였기에.

“나는 이만 나나세에게 가봐야겠구나. 이만 쉬어라.”

“네….”

장료이는 자리에 앉아 고민에 빠져들었다.

할아버지의 말이 진실이라면 패션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더 큰 걸 얻을 수 있을 거 같았다.

* * *

벌써 2시간 동안 이야기가 이어졌다.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쉬지 않고 오랜 추억들을 회상해내 떠들어 댔다.

“그래서 그날 서진이 여자한테 까이고 온 거야. 나한테 진짜 사랑했다면서 우는데 얼마나 웃기던지 웃음 참는다고 혼났지 뭐야.”

‘아 그래…. 내 진정한 사랑이 너한테 웃음거리였다 이거지. 에라 이거나 먹어라.’

나는 입을 벌리고 웃고 있는 바쟐의 입으로 방울토마토 하나를 넣어줬다.

“캑!”

“아…. 죄송해요.”

“아…. 죽을뻔했네. 괜찮아. 그래서 말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이야기.

멈출 수조차 없었다.

‘보자 지금 브랜드 들어간 거 이야기했으니까. 1시간 정도만 더 들으면 끝나겠네.’

하지만 내 생각의 오류를 발견했다.

대학 시절과 무명의 시간보다 회사생활을 했을 때의 에피소드가 두세 배는 많았다.

.

.

.

“젠장! 그만해.”

술기운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뭐?! 뭐라고 했… 냐….”

바쟐이 화를 내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순간.

다시 의자에 착석했다.

“아놔… 취했네. 너 서진이 동네 동생이라고 안 봐준다. 내가 딱 기억했어, 내일 죽었어! 이 형이 제대로 교육해주겠어. 내가 미국인이지만 동방예의지국의 정신을 서진에게 배웠다고.”

‘그래… 그런 놈이 보자마자. 반말하냐.’

나는 술 취한 바쟐을 바라봤지만 전혀 내일이 두렵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절대 내일 지금 있었던 일 모두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내가 주섬주섬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때.

바쟐이 잠꼬대를 하듯 말을 이었다.

“서진아… 내가 꼭 복수해줄게… 걱정 마….”

직감적으로 이 이야기를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위스키 한 잔 더요.”

나는 바텐더에게 위스키 한 잔을 받아들고 바쟐이 흐느끼는 말을 하나하나 주워 담기 시작했다.

“JB그룹… 위험해. 그놈들이 너를 노리고 있었어.”

“JB?”

호텔 로비에서 나를 의심하던 바쟐이 입에서 내뱉었던 키워드와 같다.

JB그룹?!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

“조심해…… 도망치라고!”

“잠꼬대 한번 요란하네.”

“한신회… 네놈들도 똑같은 놈들이야! X 자식들아.”

“한신회?”

둘 다 생전 처음 들어 보는 키워드다.

도대체 뭘까.

나와 관계되어 있을까.

점점 머리가 복잡해져 왔다.

바쟐의 잠꼬대가 이어지는 가운데.

긴 생머리의 170cm는 되어 보이는 매끈한 키와 몸매를 가진 여성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때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엎드려 있는 바쟐에게 다가가 말을 이었다.

“바쟐, 여기서 뭐 해! 호텔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누구시죠?”

“아 인사가 늦었네요. 바쟐의 여자친구예요. 미국에서 오늘 왔거든요. 서프라이즈해 줄려고 연락 없이 왔는데. 여기에 있네요.”

“아… 그러시군요.”

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그녀에게 흘리듯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의식했는지.

휴대전화를 꺼내 바쟐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거면 확실하죠. 제가 바쟐의 여자친구라는 거.”

“아… 네.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그럴 수 있죠.”

사진 속 바쟐과 함께 팔짱을 끼고 있는 그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 있는 바쟐.

누가 보아도 연인 사이로 볼 수밖에 없는 애정이 담긴 사진이었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바쟐을 그녀가 부축해서 일으키려 했다.

“아 좀 일어나봐.”

하지만 저 거구의 사내를 여자가 부축하기란 쉽지 않았다.

“숙소까지 도와드릴게요.”

“그럼 감사하죠.”

나는 거구의 육체를 가진 바쟐을 둘러업고 엘리베이터에 올라섰다.

그리고 짜증이 가득 베여 있는 바쟐의 여자친구에게 말을 건넸다.

“멀리서 오셨는데. 바쟐이 이 지경이 돼버렸네요. 죄송합니다.”

“그쪽이 죄송할 건 아니죠. 근데 낯이 익네요.”

“그런가요. 흔한 얼굴은 아닌데.”

“뭐 스치듯 봤을 수도 있죠.”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고 그녀가 먼저 그 공간을 벗어났다.

마치 나를 경계하듯이 말이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부축할게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그럼 내일 바쟐 디자이너에게 말 잘 전해주세요.”

“네.”

승강기 문이 닫히자 이상하리만큼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바쟐이 흘린 키워드를 주워 담아 끼워 맞추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JB그룹이었고 두 번째는 한신회다. 세 번째는 검은 정장.

두 개는 무슨 모임이나 회사의 이름 같았고 하나는 누군가를 칭하는 거 같았다.

“분명 나와 연관이 있어.”

띵!

승강기 문이 열렸다.

내가 내리려는 순간.

노년의 사내와 살짝 부딪치고 말았다.

“헙…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젊은 사람이 앞도 안 보고 다니나.”

노년의 사내는 일본 사람인 듯했다.

하지만 어눌하게 한국어를 구사했다.

“죄송합니다.”

내가 고개를 숙이자.

그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나를 지나쳐 승강기에 올라탔다.

그런데 그때였다.

“회장님.”

“그래 이야기는 마무리했고?”

“예.”

내가 승강기를 내리자.

검은 정장의 사내가 나를 지나쳐 승강기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에게서 아주 익숙하면서도 불쾌한 향기가 내 코끝을 자극했다.

흔한 화이트 머스크에 크리드 향수를 뒤섞어 놓은듯한 향기.

승강기의 문이 서서히 닫히고 나는 주체할 수 없이 내 속의 내용물의 역류하는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빠르게 내 방으로 달려가 화장실 변기를 들어 올렸다.

“우웩!”

절대 과음으로 인해서 올라온 토사물이 아니었다.

그 순간 내 죽음의 기억이 맞춰지며 등줄기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고 손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려왔다.

주저앉아 있던 다리까지도 심하게 떨려왔다.

하지만 나는 일어나서 달려나가야 한다.

“분명 그놈이야….”

나는 떨려오는 손으로 허벅지를 감싸 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승강기로 뛰기 시작했다.

“F5!”

벌써 지하까지 내려간 승강기.

따라잡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내 머리를 지배했다.

하지만 여기서 놓칠 수 없었다.

반대편 승강기가 도착하고 나는 빠르게 몸을 실어 그곳으로 향했다.

두렵다.

불안한지 손은 끊임없이 떨려왔다.

띵!

내 두려움 따위는 알 필요도 없다는 듯.

승강기가 지하 5층에 도착했다.

많은 생각이 내 머리를 휘젓고 있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나는 모든 생각을 지워버리고 몸을 승강기 밖으로 내던졌다.

“없어….”

주위는 고요함만이 가득했다.

그때 주차장의 에폭시 바닥과 타이어의 마찰음이 들려왔다.

끼익!

나는 그 소리를 따라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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