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5.
* * *
바쟐은 의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순위권에 들어올 거 같은 디자이너를 염두에 두었다.
하지만 런웨이를 지켜보는 과정 중.
생각이 끊임없이 바뀌어 갔다.
실질적인 모델의 움직임과 빛의 조화를 사용한 디자이너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기대 이상의 성과에 내심 놀라 하고 있었다.
‘런웨이 공지도 하지 않았는데 조명을 이용할 생각을 했어…. 완성도로 따지면 차진혁 디자이너, 의상의 표현력과 창의력이라면 장료이야. 화려한 미래지향적인 의상의 나나세도 빼놓을 수 없지. 하지만….’
바쟐은 머리를 긁적이며 점수를 매겨 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차토세가 바쟐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즐겨요. 바쟐 디자이너 너무 딱딱하게 할 거 없잖아요. 부담은 다음 타자들한테 넘기자고요.”
“그렇기는 한데. 4개 디자인의 점수가 너무 수평적이라 고민이네요.”
“그럼 그대로 해요. 뭐 어때요. 어차피 제 점수랑 합쳐서 발표할 거라 이상 없을 거 같은데요.”
“일단은 참고하겠습니다.”
바쟐은 그녀의 말에 마음을 굳히고 최종 점수를 매긴 서류를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이제 발표하러 가볼까요.”
“그러죠.”
바쟐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차토세가 앞장서서 디자이너들이 모여있는 주 무대로 향했다.
“심사가 끝났나 봅니다. 차토세 디자이너와 바쟐 디자이너가 무대 위로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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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하경의 멘트에 고개가 돌아갔다.
각국의 대표들이고 자신의 나라에서 나름 인정을 받는 디자이너들이지만 아시아에서 열리는 큰 대회이니만큼 긴장된 모습이 가득했다.
* * *
영상 속의 아름다운 엘프가 괴수를 공격하는 과정에 펼쳐진 휘황찬란한 모습.
“현실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야. 하지만 느낌 정도는 낼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녀의 움직임과 세부적인 모습을 떠올리며 의상에 새로운 요소를 집어넣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빛과 바람이다.
늘 우리가 맞닥뜨리고 살아가는 자연을 이용하는 거다.
“스와브로스키보다 더 빛에 쉽게 노출되는 게 필요한데.”
실크에 가려진 스와브로스키가 내가 생각한 기능처럼 빛을 발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방법이기에 고뇌할 수밖에 없는 작업이 이어졌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무대 뒤로 이동했다.
아이디어를 뒷받침해줄 재료를 찾아야 한다.
“비즈…. 이건 안 돼.”
형형색색의 비즈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보석류.
주위를 둘러보고 뒤적거리는 가운데 무언가가 내 눈에 반짝이며 스쳐 지나갔다.
“빛?!”
내가 고개를 돌리자.
“크리스털!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파츠가 가득 들어 있는 단 하나를 들어 올리자.
그곳에 고급 크리스털들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마치 보물상자를 발견한 듯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거면 되겠어. 양도 충분하고.”
누군가 크리스털 하나를 파츠 상자 위에 떨어트린 모양이다.
그로 인해 내가 이 상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크리스털 상자를 채로 들고 와.
흰색 원단에 부착시키기 시작했다.
단순하지만 오랜 시간이 소모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조금 아쉽기는 한데. 어쩔 수 없네. 자수를 겸비하면 훨씬 좋을 거 같은데.”
회사의 인원을 참가시킬 수 있었다면 류미리 디자이너를 무대 위에 올려 수를 놓게 하고 싶었다.
하나의 뿌리에서 뻗어 나온 수십여 개의 가지.
그곳에 크리스털을 겹겹이 붙인다면 그럴싸한 작품 하나가 탄생할 거 같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쉽네.”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크리스털을 부착해 나갔다.
그리고 한 가지 요인을 추가시켰다.
“만약을 대비해야지.”
만일이라는 가정.
그 가정이 실현된다면 분명 가산점의 요인이 될 수 있다.
치마 아래에 작은 주머니를 만들어 살짝 구멍을 내놓으면 모델이 걸을 때마다 크리스털이 조금씩 흘러내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무대로 뿜어져 나오는 빛으로 인해.
마치 바닥에 아름다운 빛 가루를 뿌리는 거 같은 효과를 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걸로 끝이야.”
* * *
바쟐이 차토세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우리를 평가한 차트 하나가 들려져 있었다.
무대 아래에서 카메라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모든 준비가 끝이 나고 스탠바이 신호에 바쟐이 마이크를 들어 올려 말을 이었다.
“10위와 9위는 런웨이 점수는 평가되지 못했으며 10위는 인도네시아 9위는 대만입니다. 두 나라의 대표는 2차전에 더 분발해 주시기 바랍니다.”
바쟐의 첫마디에 인도네시아와 대만 디자이너의 인상이 구겨졌다.
“이제 8위부터 발표하겠습니다.”
모두가 긴장된 모습으로 그의 발표를 기다렸다.
“8위는 태국입니다.”
“하….”
태국 디자이너의 깊은 한숨이 들려왔다.
그 뒤로 바쟐의 평가가 이어졌다.
“태국 디자이너의 의상은 충분히 판타지스럽기는 했으나. 상업적이지 않았고 일상생활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코스프레 의상에 가까워요. 주제인 판타지에 너무 치중했네요.”
7위 터키와 6위 사우디아라비아는 종교적 성격 뚜렷한 디자인이 너무 돋보인다는 이유로 낮은 순위에 안착했다.
“5위는 러시아입니다. 돋보이는 의상이고 소재에 충분히 부합합니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지만, 더욱 분발해 주세요.”
분명 러시아 디자이너의 의상은 좋은 디자인이었고 상업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심사결과는 5위였다.
‘난 몇 위라는 거야.’
저 정도 퀄리티를 가진 의상이 5위라면 내 순위도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4위는 중국입니다.”
바쟐의 발표에 모두가 의아한 표정으로 장료이를 바라봤다.
장료이 디자이너 본인도 생각지도 못한 평가에 바닥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장료이 디자이너의 아이디어는 이중 가장 돋보였어요. 점프슈트와 D 링을 사용한 의상디자인이라 창의적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어요.”
장료이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바쟐의 말을 기다렸다.
“카테고리에서 너무 벗어났습니다. 너무 억지스러움 때문에 가치가 떨어져 보여요. 스토리는 가득 담겨 있는데 실속이 없는 느낌이랄까. 그것이 감점 요인이었습니다.”
돌려서 말하지만 상업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그리고 억지스러움이란 유화해서 말한 것일 뿐.
부담스러워 입기 꺼려지는 옷이라는 말과 같았다.
평가를 들은 장료이가 어금니를 강하게 깨물었는지 턱 근육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예요. 눈이 즐거웠습니다.”
바쟐의 말처럼 정말 나쁘지 않은 디자인이다.
하지만 그거뿐이었다는 것.
심사위원들은 비싼 옷을 팔아먹고 있는 상위 디자이너들이다.
이들의 우리에게 준 주제가 큰 카테고리라면 그 속에 작은 카테고리 수십 개가 내재되어 있을 것이다.
그중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상업적 가치.
말 그대로 잘 팔리는 의상을 디자인하지 않으면 감점시키겠다는 말들이 여럿 비쳤다.
“3위는 일본입니다.”
그의 발표에 나는 나름 안도했다.
하지만 나나세의 표정은 자신의 순위를 인정하지 못한 듯했다.
그리고 기대했을 것이다.
장료이가 4위라면 자신이 1등일 확률이 높다는 가정.
“또!”
그녀는 나를 꼬나보며 얼굴을 붉혔다.
이쯤 되면 인정할 만도 한데 아직도 자신이 내 위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주 징글징글하다 너도.’
나는 그녀에게 옅게 미소를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내 눈을 피했다.
‘재수 없는 년.’
“일본의 나나세 디자이너의 디자인과 아이디어는 현대와 판타지를 적절하게 잘 조화시켰습니다. 상업성도 뛰어났고요. 하지만 차토세 디자이너와 저의 개인적인 점수에서 차이가 났을 뿐이니 너무 실망하지 말기 바랍니다.”
내가 본 그녀의 디자인은 분명 그러했다.
가장 트렌디하면서도 상업적이라 할 수 있는 디자인.
나는 그 순간.
인도 디자이너에게 고개가 돌아갔다.
‘나나세보다. 아니 나보다 위일지도 모른다.’
뜻밖의 결과에 모두가 의아해하고 있었다.
우승 후보인 장료이가 4위, 이중 가장 많은 경험을 가진 나나세가 3위다.
분명 내가 스치듯 본 인도 디자이너의 의상은 평범했는데.
‘뭐지…. 기준을 알 수가 없네.’
바쟐이 다시 차트를 들어 올렸다.
모두 누가 1위인지 궁금해하며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만을 기다렸다.
“1위는 한국의 차진혁 디자이너! 2위는 인도의 아룬 디자이너입니다.”
나는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기준은 알 수 없지만 1차전에 1등으로 통과했다는 거에 안도했다.
하지만 모두가 받아들이는 건 아니었다.
나나세와 러시아 디자이너가 손을 들며 말을 이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룬 디자이너의 의상을 저희도 봤는데 2등이라니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평범한 드레스였습니다. 인정할 수 없어요. 어떻게 2등을 할 수 있습니까!”
두 디자이너의 발언이 상당히 모욕적으로 받아들여진 아룬이 발끈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들 수준에서 그 정도로 보인 거겠지.”
“…….”
아룬 디자이너의 한마디에 둘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상황을 지켜보던 바쟐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모두 의아해하는 거 같네요. 화면으로만 봐서 그럴 겁니다.”
그때 바쟐이 공평성을 보여주겠다며 하경에게 다가가 부탁했다.
무대 뒤에 있는 인도의 인상을 무대로 가져와달라는 말인 듯했다.
잠시 후.
인도의 의상이 주 무대에 올라왔다.
“다들 이리 와서 아룬 디자이너의 의상을 자세히 보세요. 그리고 PD님은 조명 강도를 조절해서 의상에 비춰주세요.”
바쟐의 말에 디자이너들이 일제히 그곳으로 향했다.
그 순간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어!”
“5단으로 의상을 만들었네….”
“색이…. 변하잖아.”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고.”
아룬 디자이너.
인도의 브랜드 비아드의 창립자로 현지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내수시장만으로도 엄청난 성과를 내고 있었고 장료이의 뒤를 이은 매출 기록을 보유한 신예 디자이너였다.
그의 디자인은 5가지 원단을 사용해 하나의 의상으로 만든 디자인으로 드레스 다섯 벌을 겹쳐놓은 형태다.
조명과 자연광의 강함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달라 보이는 신비로운 발상이 들어간 드레스.
원단의 이해력과 지식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만들 수 없는 의상이다.
모두가 인정이라도 하듯 아룬 디자이너의 순위에 불평불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모두 인정하는 듯하군요. 아룬 디자이너의 의상은 매우 상업적이면서도 심사위원이 제시한 주제에도 아주 부합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지금 당장 출시한다 해도 히트를 할 수 있는 드레스였습니다.”
아룬 디자이너의 의상은 고해상도 카메라로도 담을 수 없는 신비함이 묻어나는 의상이었다.
영상을 편집하는 과정에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이 묻어날 테지만 아까는 정말 알지 못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했다.
러시아 디자이너는 아룬 디자이너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며 사과했다.
“아까는 너무 흥분했네요. 사과드립니다. 이런 의상을 보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닙니다. 영상을 보는 저도 의아했으니까요. 되려 죄송합니다.”
둘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지켜보며 모두의 눈이 나나세를 향했다.
아룬 디자이너에게 사과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아직 4차전의 대회가 남아있는데 서로 얼굴 붉혀서 좋을 리가 없기에.
쉽게 나서는 이는 없었다.
“나나세 씨 사과하시죠. 한국 속담에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분위기 만들어 줄 때 사과하세요.”
“네가 뭔데 하라 마라야. 안 그래도 하려고 했어.”
나나세는 아룬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아룬도 환한 웃음으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 사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회가 끝날 때까지 서로 최선을 다해보죠.”
“네.”
그렇게 아룬의 평가가 끝이 나고 내 차례가 다가왔다.
모두의 관심이 나의 평가에 집중되었다.
이번에는 바쟐이 아닌 차토세가 차트를 들고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