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화 (114/200)

판타지 4.

* * *

현대와 판타지의 정확한 경계선에 놓여 있는 디자인을 완성했다.

이제 제작만이 남은 상태.

나는 가장 메인이 되는 가죽 치마 제작에 들어갔다.

“패턴부터!”

전체적인 핏을 잡아주는 허리선에 가장 많이 신경을 쓰며 패턴을 만들어갔다.

허리를 감싸는 부분은 굽히고 펼 때 불편함이 없어야 하기에 아주 얇게 피할해야 했다.

“옆 라인에 길게 트임을 줘도 좋겠는데….”

거대한 괴수와 싸우던 그녀를 지켜본 결과.

역동적인 움직임이 가능하도록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패턴을 만들고 재단과 피할까지 마친 이후에는 탄력과 모양을 만들어 주는 부자재를 붙일 예정이다.

그래야만 착용감과 내구성을 올릴 수 있다.

“이 정도면 되겠어.”

빠르게 패턴을 완성했다.

사피아노 가죽을 넓은 선반 위에 펼치고 구두칼로 절단을 시작했다.

패턴을 따라 구두칼이 춤을 추듯 부드럽게 움직였다.

“깔끔하게 재단했어.”

원피에서 패턴 모양으로 모두 절단한 후부터가 더 정교한 작업이 이어진다.

바늘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가죽의 테두리 20~30mm를 얇게 깎는 피할 작업이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가죽과 가죽이 겹쳐지는 부분이 두꺼워져서 바느질할 수 없게 될 수도 있기에 신중히 처리해야 한다.

찌이잉! 찌이잉!

자동 피할기가 큰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내가 재단한 가죽을 가져가 대는 순간.

까끌까끌한 고구마 돌이 가죽을 밀어주며 날카로운 칼날에 가죽이 깎여 나가기 시작했다.

잘못하다가는 가죽에 손상이 가기 쉽기에 집중해야 하는 공정이 이어졌다.

이 과정이 끝이 나면 부자재와 접착제를 이용해.

전체적인 모양을 잡아준다.

“접착제는 최대한 적게 사용하자.”

전체적인 모양을 만들어가면 그리프라는 포크 모양의 도구로 가죽에 일정하게 구멍을 뚫어준다.

그 구멍으로 실이 들어가게 된다.

가장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과정이었다.

한참 동안 작업이 이어졌고 2시간가량을 오롯이 가죽 치마에 투자했다.

“완성!”

가죽 치마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아주 옅은 기운의 따뜻함과 함께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는 거 같았다.

“기분 좋게 하네. 이제 원피스를 만들어야겠어.”

나는 블랙계열 실크 원단을 추가했다.

원래는 흰색 원단을 전체적으로 채용하려 했지만, 강렬한 이미지와 판타지의 몽환적인 느낌을 표현하기로 결정 내렸다.

우선 베이스가 되는 30수 면을 재단해 마네킹에 걸친 후.

원피스 전체의 길이를 예측.

“이 정도면 되겠어.”

그리고 모양을 잡은 원단을 옷핀을 이용해 고정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빠르면서도 정교하게 다음 작업이 부드럽게 이어질 수 있도록 말이다.

“수정할 게 따로 없을 거 같네. 역시!”

핀을 고정하며 조금씩 고쳐나간 후.

가봉에 들어가는데 아주 완벽했다.

이제는 가봉해야 할 차례다.

이 과정만 지나면 바로 재봉틀을 이용해 완성된 모습에 가깝게 만들 수 있다.

집중해서 작업을 이어가는 시점에 MC 하경이 경기 종료까지 1시간이 남았다는 걸 알려왔다.

“벌써…. 잘못하면 늦겠는데.”

나는 조금 더 집중해 속도를 올렸다.

블랙 실크와 화이트 실크가 한 공간에 공존하지만, 서로의 아름다움을 표현해야 한다.

각각의 색을 돋보이게 하려고 나는 톤에 따라 볼륨을 주어 높낮이를 표현하며 재봉을 이어갔다.

“다 됐어.”

완성된 의상을 일차적으로 마네킹에 입힌 후.

잘못된 부분을 다시 수정해야 한다.

재봉이 잘못되었거나 액세서리가 잘못 결박된 걸 확인하는 것이다.

최종단계에서 해야 하는 일이다.

“정말 끝났어. 완성이야!”

나에게 배정된 모델에게 의상을 가져가 입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델에게 질문을 이었다.

“어때요?”

“편안해요. 면과 실크라서 그런지 촉감도 좋네요.”

예상대로 입는 사람이 편안한 의상이 완성되었다.

편안하다는 건 꾸준히 손이 갈 수밖에 없는 의상이다.

“여신이 된 느낌인데요. 화려하고 고풍스럽네요.”

“그래요?! 저는 여전사로 만들 예정인데.”

나는 가죽 아웃 웨어를 활짝 펼치며 모델의 허리선에 가져다 댔다.

“흠…. 코르셋이네요. 숨 막히는 거 아니에요? 너무 조르지 마요.”

“편할 거예요.”

가죽 치마는 중세의 코르셋처럼 뒤에서 끈으로 묶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코르셋은 중세에 몸매를 보정하는 역할을 하던 속옷이다.

그만큼 착용하는 사람에게 고통을 선사하는 속옷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내가 만든 가죽 치마는 다르다.

코르셋처럼 강하게 쪼일 필요도 없고 허리선에 가죽을 얇게 피할한 덕분에 잘 늘어난다.

입기에는 살짝 불편함은 있을 수 있지만, 착용 이후에는 어느 때보다 편할 거다.

하나 더 말을 보태자면 허리를 펴주고 척추를 보조해 줌으로써 안정감을 줄 것이다.

“생각보다 무겁지 않네요?”

“그만큼 가죽을 깎아냈습니다. 편하게 움직여 보시겠어요.”

“가죽인데. 가능해요?”

“네, 믿고 움직여 보세요.”

“손상 가더라도 혼내시면 안 돼요.”

내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모델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그 순간 고개를 갸웃하더니 몸을 더욱 크게 움직여 보였다.

“와 엄청 편해요. 가죽이라서 불편할 거로 생각했는데 탄성이 너무 좋은데요.”

“내부에 원피를 없애고 그 자리에 부자재로 채워 넣었거든요.”

그녀의 반응.

내가 원했던 모든 사항 그대로를 반영했다.

활동성과 편안함 그리고 대회 주제에 맞는 디자인.

3가지 요소를 모두 잡은 상태에서 의상을 완성시켰다.

“경기 종료입니다! 모두 손을 들고 무대 아래로 내려와 주세요.”

하경은 활기찬 목소리로 디자이너들을 불러 모았다.

그런데 디자이너 모두가 만족할만한 표정을 짓는 건 아니다.

두 팀은 아직 모델에게 의상 착용조차 하지 못한 상태로 무대를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아쉽네요. 인도네시아와 대만 디자이너는 모델 피팅조차 마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탈락이 없는 대회니까요! 다음에 잘하세요.”

하경의 말과는 다르게 두 디자이너의 표정은 괜찮지 않았다.

분명 감점 요인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모델들에게 만들어진 의상을 입혔다는 건.

분명 런웨이를 시킨다는 소리.

런웨이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끔찍하다.

“장료이….”

내 고개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장료이가 만든 의상이었다.

그가 나에게 말한 거처럼 삼국지의 장수가 입을지도 모르겠다는 착각이 들 정도의 갑주를 모델이 입고 있었다.

“금속 액세서리를 사용했네.”

D형 금속 액세서리를 실로 하나하나 엮은 것이 인상적이다.

그가 만든 의상은 가슴 전면을 D형 고리 장식과 상의와 바지를 하나로 합친 점프슈트 형태의 디자인이 매우 인상적이다.

그리고 바지 하단의 통을 넓혀 점프슈트의 답답함을 해소했다.

“말을 타고 달리면 멋질지도 모르겠네.”

장료이는 신선한 아이디어와 재료를 사용하는 감각이 눈에 띄어 보였다.

그는 판타지 주제에 적절한 의상을 완성한 듯 보였다.

내가 그의 의상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자.

엄지손가락을 나에게 들어 올렸다.

“진짜 알다가도 모를 놈이네. 진지한 면이 없는 건가?”

그의 의상 바로 옆 일본 대표 나나세의 의상이 눈에 들어왔다.

블랙 원단으로 제작된, 자객이나 닌자가 입을법한 의상으로 블랙 베이스에 기하학적 폰트를 화려한 컬러로 표현했다.

마치 원단에 화려한 영상미를 머금게 한 듯.

그녀의 디자인을 쉽게 설명하자면 RGB의 3가지 색을 빛으로 쏘아 겹쳐놓은 이미지다.

3가지 색을 머금은 폰트들을 겹쳐지며 새로운 색을 만들어 냈고 그것이 모여 화려한 디자인이 탄생했다.

신선한 아이디어였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생각의 반전이다.

마치 공상과학적인 판타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의상이다.

“의외네.”

내 말을 옆에서 들은 걸까.

나나세의 눈빛이 날카롭게 쏟아졌다.

“자 이제 모델들은 메인 무대로 이동해 주세요!”

“메인 무대?”

역시 런웨이를 할 작정이다.

‘방송국 놈들이나 심사위원들이나 이벤트 참 좋아해.’

하경의 말에 따라 모델들이 중앙 무대를 벗어나.

세트 뒤편으로 사라졌다.

그곳에 모인 디자이너들은 계획에 없던 상황에 당황스러워했다.

“디자이너분들은 뒤편에 설치된 화면을 봐주세요.”

디자이너들 모두 고개를 돌리자.

모델들이 카메라를 통해 나타났다.

무대 아래에 차토세와 바쟐 심사위원이 근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제야 말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아시아 패션 어워드의 마지막 심사의 피날레는 항상 런웨이로 마무리됩니다.”

그의 어이없는 멘트에 몇몇 디자이너가 화를 내려는 순간.

무대 뒤편 런웨이장에서 일렉트로닉스 전자음이 흘러나오기 시작되었다.

“런웨이 시작인가.”

암흑에 가까운 깜깜한 배경 속 스포트라이트 하나만이 존재하는 런웨이.

무미건조한 무대이지만 의상만큼은 아주 뚜렷하고 선명하게 보여주는 무대였다.

오로지 하나의 의상을 보여주기 위해 논스톱 런웨이가 아닌 단독 런웨이가 이어졌다.

“와…. 나나세 디자이너 의상 아름답네요.”

“장료이 디자이너 의상 참 재미있고 신선하네요.”

“이제 어느 나라 차례야?”

모두 서로의 의상을 평가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음이 내 차례인가?”

다섯 번째.

드디어 내가 만든 의상이 런웨이를 시작했다.

“와 실크를 이렇게 잘 사용하다니 대단하네요.”

“감사합니다.”

모델이 메인 스트레이트에 도착해 포즈를 취하는 그때였다.

싱가포르의 디자이너의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와! 저 의상 안에 뭘 넣어 만든 거야?”

그녀의 목소리에 모든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때 러시아 디자이너가 말을 이었다.

“뭐야 한국 대표는 런웨이를 하는 거 알고 있었던 거야?”

그의 궁금증이 가득 담긴 질문.

다른 사람들도 궁금했는지 모두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저도 몰랐습니다.”

“진짜 몰랐던 거 맞아!”

“모두에게 공평했어. 차진혁 디자이너는 저걸 위해 시간을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을 거야. 도박 같은 거라고 인정할 건 인정해주자고.”

장료이가 얼굴을 붉히며 내 편을 들어 주었다.

‘당연하지. 저거 때문에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데.’

나는 밝은 빛에서 뿜어져 나온 영상을 통해.

또 다른 요소를 집어넣었다.

* * *

바쟐과 차토세는 세부적인 심사 요소를 전날 결정지었다.

첫 번째는 얼마나 주제인 판타지에 가깝게 디자인했는가.

두 번째 시장에 만들어진 의상을 반영할 수 있는가.

세 번째 상품 가치가 있는가였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세부적인 요소도 있지만 그건 개인적인 판단에서 채점이 달라질 것이었다.

“모두가 화려하고 판타지답기는 하네요.”

“어중이떠중이를 보낸 건 아닌 거 같은데. 상업성으로 따지면 몇 개 안 되네요. 마치 코스프레 의상 같은 게 너무 많아요.”

“바쟐 디자이너가 생각한 코스프레 같은 의상은 상업적인 부분이 중점인가요? 아니면 현실에 반영할 수 없는 거에 감점 요인인가요?”

“뭐 별개의 문제겠죠. 저런 취향을 가진 고객도 존재할 테니까요.”

둘은 아주 냉정하게 평가했다.

1차전이지만 대회에서는 첫 시작의 순위도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중국 디자이너는 점프슈트를 소재와 잘 섞었네요. 만약 점프슈트 형태를 쓰지 않았다면 모든 요소에서 벗어났을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디자인으로서는 어느 나라건 나쁘지 않아요.”

“인도 디자이너의 의상도 생각 이상으로 너무 좋았어요. 바쟐 디자이너 평가는 어때요?”

“저도 순위권에 인도 디자이너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눈에 들어왔던 디자인이 있어서 기대 중입니다.”

“네?! 어느 나라 디자인인가요.”

“지금 나오네요. 대한민국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