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나다. 이놈아.’
바쟐은 슬픈 눈빛으로 나를 이리저리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상하게 닮았단 말이야?”
“누구랑 말이죠?”
“샤네르의 김서진 디자이너.”
바쟐이 덩치에 안 맞게 감정이 복받쳤는지 눈시울이 붉게 물들려 하고 있었다.
‘다 큰 놈이 울려고 그래. 아씨 답답해 미치겠네.’
“김서진 디자이너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천재 디자이너잖아요. 저도 그분을 엄청 존경했는걸요. 근데 저랑 닮지는 않았죠. 제가 훨씬 잘생겼는데요.”
“그건 맞는 말이야. 하하하하!”
‘이 새끼를 죽여 말아.’
그래도 그의 웃음을 보니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나로 인해 내 친구의 우는 모습을 본다면 버티고 있는 감정이 무너질 거 같았다.
바로 앞에 나를 알아주고 아껴주었던 친구가 있다.
바쟐은 한참 동안 웃다가 손사래 치며 자리를 떠나갔다.
그런데 흘리듯 말을 남기고 지나가는 게 아닌가.
‘너무 한쪽에만 힘을 싣지는 마.’
흘리듯 말하고 가는 바쟐의 말에 뒤통수가 띵해졌다.
“그러고 보니.”
메인 의상에만 치중했던 터라,
큰 그림을 생각하지 못했다.
강력한 포인트를 주기 위해 메인 의상에 너무 많은 힘이 들어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스케치를 눈높이로 들어올려 전체적인 이미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전체 이미지가 안 보이네… 치마만 보여.”
천과 실크로 힘을 실어주었다 생각했는데.
가죽 치마의 무게가 너무 실린 나머지 상체의 원피스가 느껴지지 않았다.
“원피스 전체를 수정해야겠는데.”
소재는 그대로 가되 원단을 추가하기로 했다.
두꺼운 블랙 실크를 이용해.
가슴 부위를 시스루로 비치게 만들고 숄더와 목 전체를 블랙 실크로 감싸는 디자인.
어두운 톤의 색이 무게감과 판타지의 보호적인 느낌을 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좋은데.”
스케치를 완성했다.
순간 내 눈에 검붉은 빛이 아닌 화려한 밝은 빛무리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 * *
바쟐은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져들었다.
경연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한국 대표인 차진혁에게 눈이 갔다.
그에게서 풍겨오는 느낌이 이상하리만큼 친숙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행동거지 하나, 하나가 가장 보고 싶은 친구와 많이 닮아 있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멍청하게.”
그는 죽었다.
자신이 장례식까지 치러주지 않았는가.
그런데 처음 보는 차진혁 디자이너라는 놈이 계속해서 자신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고 있었다.
중국 대표 장료이 디자이너와의 대화를 듣는 순간 차진혁에게 다시 한번 고개가 돌아갔다.
서진이 자주 사용하던 영어 악센트.
“저런 촌스러운 영어 악센트는 그놈뿐인데….”
잠깐 지켜본 그는 서진과 너무 닮아 있었다.
하나의 의심을 지우면 또 다른 행동으로 자신의 마음을 흔드는 저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 하는 놈이야. 재수 없게!”
재료가 전시된 곳에서 가죽을 만지며 기분 나쁘게 웃고 있는 행동.
좋은 가죽에 심취한 저 눈빛.
분명 저건 김서진이 무의식중에 하는 행동들이었다.
“아 아니야. 바쟐 정신 차려. 서진이 어떻게 살아 돌아와.”
바쟐은 종교도 없고 미신도 믿지 않는다.
오로지 보여지는 것만 믿는 스타일이다.
근데 계속 저놈에게 눈길이 간다.
김서진.
교통사고로 허무하게 생을 마감한 천재적인 디자인 능력을 가지고 있던 나의 친구.
차진혁을 바라보며 설마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럴 리가 없지. 소설 속 이야기일 뿐이야.”
그렇게 부정 아닌 부정을 이어가며 한 시간이 지나가는 시점.
차진혁에게서 또 거슬리는 행동이 포착되었다.
“미친! 저 새끼 진짜 정체가 뭐야.”
서진이 깊은 내면의 고민에 빠졌을 때 하는 버릇.
모나미 볼펜 뒷부분이 부서져라, 잘근잘근 씹는 저 버릇.
작은 부분까지 너무 닮아 있는 진혁을 바라보며 분노에서 기쁨으로, 다음은 만약이라도 좋으니 자신의 친구이길 바라는 희망이 돋아났다.
판타지 같은 일이 일어나길 간절히 바라며.
“저 잠시만요. 무대에 내려가서 심사하겠습니다.”
“그러시면 저는 재료 쪽으로 가보죠.”
바쟐과 차토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중앙무대로 향했다.
바쟐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숨기며 진혁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볼펜을 그렇게 씹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나?”
바쟐은 선반에 놓여있는 진혁의 디자인 스케치를 보고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베이스가 되는 인체를 그린 형태.
그리고 펜을 사용하는 방법, 선의 모양까지.
마치 서진의 스케치를 복사해서 붙여넣은 거 같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오 신이시여.’
너무 당황스러웠다.
‘진정하자. 서진은 죽었어. 이놈은 서진이 아니야! 정신 차려.’
그렇게 속으로 되뇌고 되뇌며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이자가 서진과 관계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말하지 않은 가족이나 어린 시절 친구일지도 모른다.
서진과 어린 시절의 추억을 함께 보내온 사람이라면 닮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내 친구도 당신과 같은 버릇이 있었는데 신기하네.”
“네?! 같은 버릇이요?”
“생각이 깊어지면 볼펜이 부서져라 씹는 놈이 있었거든.”
“아….”
바쟐은 아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상하게 닮았단 말이야?”
“누구랑 말이죠?”
“샤네르의 김서진 디자이너.”
바쟐을 자신의 죽은 친구의 이름을 뱉어냈다.
서진이 죽은 이후.
그를 잊기 위해.
절대 자신의 입 밖으로 김서진이라는 이름을 내뱉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눈에서는 어김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으니까.
‘제발….’
상대가 정말 서진과 관계가 된 사람이라면 분명 반응을 보일 거라는 가정하에 그의 이름을 거론했다.
바쟐은 대답을 기다리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지로 억눌렀다.
이 두근거림은 자신의 생각에 대한 궁금증.
아니면 부정적인 대답에 대한 두근거림일까.
“김서진 디자이너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대단한 디자이너셨죠.”
바쟐은 진혁의 대답에 감사하면서도 실망했다.
기다리던 반응이 아니었다.
자신의 추억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길 간절히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아닌가 보군.’
하지만 죽은 친구를 좋게 기억해 주는 이가 자신 말고 또 있다는 것에 기뻤다.
“저도 그분을 엄청 존경했거든요. 닮고 싶을 정도로.”
서진의 이 대답에 바쟐은 자신이 의심했던 모든 걸 털어 내 버렸다.
‘그랬구나.’
“근데 저랑 닮지는 않았죠. 제가 훨씬 잘생겼는데요.”
“그건 맞는 말이야. 하하하하!”
순간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렇지 김서진이 이렇게 잘생긴 꽃미남일 리가 없지.
만약 이렇게 새롭게 태어났다면 억울하지.
바쟐은 진혁의 농담을 듣고 그제야 자신의 친구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서진이 이런 시답잖은 농담을 할 리가 없으니까.
‘그 진지충이 이런 농담을 할 리가 없지. 하… 보고 싶은 새끼.’
바쟐은 자리를 떠나기 전.
자신의 친구를 존경하고 기억해주는 차진혁이라는 디자이너에게 작은 선물을 주기로 했다.
왜 진혁이 스케치를 멍하니 보며 생각에 잠긴지 캐치할 수 있었기에.
세계적인 디자이너들도 자주 하는 실수다.
너무 한 부분의 디자인에 집중하다 보니 디자인 전체의 균형이 무너지는 안 좋은 상황.
컬렉션 준비나 시즌 준비하는 과정이라면 회의를 통해 수정하고 새롭게 조정하면 되지만 경연대회에서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디자인은 나쁘지 않아. 아니 너무 좋은데.’
좋은 디자인은 분명하다.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아이디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한쪽에만 힘이 들어가 밸런스가 무너져 버려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될 거다.
바쟐을 흘리듯 작은 소리로 말을 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너무 한쪽에만 힘을 싣지는 마.”
그가 디자이너라면 이 정도 힌트에도 알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만약이지만 기회가 된다면 이자와 와인을 퍼마시며 자신의 속내를 보여주고 싶었다.
오랜 시절 한 친구에게 털어놓았던 고민들을 말이다.
오랜 추억을 떠올리며.
* * *
주변의 모든 것이 서서히 멈추며 밝은 빛무리가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이 현상에 이질감은 사라졌지만 또 다른 감정 두려움이 생겨나고 있었다.
“게임 영상인가?!”
게임 속의 대자연의 모습이 내 앞에 나타났다.
주위에 고층건물보다 한층 더 거대한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
현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운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참나… 별의별 게 다 보이네.”
그때 내 앞에 판타지 속에서나 존재하는 뾰족 귀를 가진 아름다운 엘프 무리가 나타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선두에 서 있는 가장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느낌이 나는 엘프가 입고 있는 옷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디자인한 의상이잖아!”
신기했다.
이런 환경이 나타난 것도 신기했지만, 게임 속의 주인공이 내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에 몽환적인 느낌마저 들게 했다.
“색다른 경험이네. 참나.”
그때 절벽 아래에서 기괴한 울림이 터져 나오자.
엘프들이 일제히 그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모두 조심해라. 히드라의 독은 죽음을 불러온다!”
“예!”
두 개의 뿔에 여성의 헐벗은 상체.
그리고 긴 뱀의 꼬리, 형형색색의 비늘을 두르고 있는 거대 괴수가 등장했다.
“…….”
거대한 괴수는 숲은 파괴하며 엘프들에게 다가갔다.
끼애액!
괴수의 포효에 내 귀까지 멍해지는 그때.
엘프들의 사냥이 시작되었다.
한참 동안 이어진 접전 끝에 괴수를 절벽 앞까지 몰아간 엘프 무리.
그때 가장 선두에 서 있던 우두머리 엘프가 괴수의 머리 위로 도약해 올라갔다.
하지만 괴수는 죽지 않으려는 듯.
온 힘을 다해 자신의 분비물을 뿜어냈다.
“피해!”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소리쳤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연스럽게 몸을 비틀어 히드라의 정수리에 검을 꽂아 넣었다.
멀리서 지켜보는 내가 보아도 그녀는 용감하고 아름다웠다.
바닥에 착지한 그녀의 몸에서 아름다운 빛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와, 축하드립니다. 신의 축복이.”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그녀를 축하하는 그때.
내 머릿속에 또 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오호. 나쁘지 않은데.”
짧은 영상이 끝이 나고 스케치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은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확신에 차듯 디자인 일부를 수정했다.
이 디자인이라면 분명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제작에 들어가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