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12/200)

“그래서 말인데 1차전 과제를 정했으면 해서요.”

“생각해둔 거 있습니까?”

“저는 생각해둔 게 없어요. 제 생각에는 뚜렷한 능력을 볼 수 있는 소재가 좋을 거 같은데. 또 너무 딱딱하면 재미가 없을 거 같아서 고민이네요.”

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때 바쟐이 손가락을 맞부딪치며 아이디어 하나를 떠올렸다.

“이건 어떻습니까?”

“말씀해 보세요.”

“흠…… 판타지 의상!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할 테고 화려하고 복잡한 구조이니만큼 제작 스킬도 엿볼 수 있을 거 같은데.”

“판타지라 조금 더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 키워드만으로는 가늠이 안 되네요.”

“그럼. 밖에서 이럴 게 아니고 안으로 들어오시죠.”

“그럼 실례 좀 할게요.”

“위스키 마시고 있었는데 한 잔 드릴까요?”

“저는 술을 못해서요. 음료나 한 잔 주세요.”

“오케이.”

바쟐이 그녀에게 오렌지 주스를 내밀며 끊어졌던 대화를 이어갔다.

“자세하게 설명 좀 부탁드릴게요.”

“아하.”

바쟐은 말하기에는 너무 광범위한 걸 알고 있기에.

여러 가지 게임 사이트와 판타지 소설의 세계관이 잘 드러난 요약집을 찾아.

그녀에게 내밀었다.

“화면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녀는 마시고 있던 주스 잔을 내려놓고 화면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바쟐은 화면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설명을 이어갔다.

“여러 가지 직업이 존재합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의상 디자인이 탄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종족에 따라 변형되기도 하죠.”

“그러네요. 굉장히 흥미로운 소재예요.”

차토세는 바쟐의 노트북을 빼앗듯 받아 들어.

판타지의 세계관에 대해 찾아보기 시작했다.

“어떠십니까?”

“재미있네요. 미래와 과거, 현재가 모두 공존하는 세계관이네요. 디자이너의 재량에 따라 많은 것이 바뀌겠어요. 이런 소재는 어떻게 생각한 거예요. 대단하네요.”

바쟐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말을 이었다.

“제가 사실 판타지 세계관 게임 마니아거든요. 그래서 늘 이런 의상을 출시하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요. 그럼 한번 출시해보시지. 바쟐 디자이너의 능력이라면 대히트 칠 거 같은데요.”

바쟐은 손을 휘저으며 말을 이었다.

“한번… 한번 시도는 해봤습니다.”

“정말요!”

바쟐을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피식 웃고 있었다.

“바쟐! 너 나한테 왜 이래. 브랜드 이미지 다 망칠 생각이야.”

“뭔 또 이미지를 망친다고 그러세요. 이 디자인이면 대히트라니까요. 대히트. 루이바통도 변화가 필요합니다. 총괄디렉터가 그것도 못 알아보냐!”

“……변화 좋아하네. 어린애들 장난을 디자인에 접목시켜! 루이바통이야 루이바통. 그런 디자인은 절대 안 돼!”

루이바통의 총괄디자이너가 되고 첫 시즌을 맞이한 바쟐이 만든 디자인의 소재가 게임판타지였다.

의상보다는 액세서리와 가방 위주로 큰 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루이바통의 총괄디렉터의 반대로 최종심에서 무산되어 버렸다.

“내가 하고 싶다니까. 히트 칠 수 있다고.”

“아… 머리야. 너 계속 이러면 회장님한테 보고한다.”

“아씨. 이럴 거면 왜 여기 데리고 온 건데. 변화하고 싶다고 총괄디자이너 자리 준 거 아니야.”

“그게 내가 최근에 한 최대 실수야. 그러니까 다시 디자인해!”

하지만 바쟐은 의사를 굽히지 않고 총괄디렉터를 구워삶았다.

그리고 여름 시즌에 루이바통X바쟐 특별 한정판 상품을 출시했다.

“설마. 작년 여름에 출시했던 체인백이랑 체인 클러치, 액세서리들이 그래서 탄생한 건가요?”

“네, 하하하. 모두 포기하고 그 상품들만 겨우 출시했습니다.”

“대단하네요. 저도 구하려다 못 구했거든요. 체인 클러치.”

“정말요. 제가 소장하고 있는 거 하나 드리겠습니다. 차토세 디자이너가 원하신다면요.”

“저야. 영광이죠.”

특별 한정판은 출시 3일 만에 완판되는 엄청난 성과를 보여주었다.

루이바통의 일부 가방 라인과 클러치에 붉은색 플라스틱 체인을 결합한 상품.

고전적인 루이바통의 디자인에 판타지스러운 아이템이 붙어 있는 스페셜 에디션.

대 히트에 힘을 입어.

액세서리에도 디자인이 접목되어 출시되었다.

“하하하. 역시 듣던 대로 재미있는 분이네요. 그리고 대단해요.”

“제가요?!”

“패션업계에서는 유명하죠. 바쟐 디자이너.”

“그런가요. 원래는 안 그랬는데… 제가 나름 진지한 사람이었는데 누구한테 물들어서 이렇습니다.”

“하여튼 판타지 소재 좋을 거 같네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재미있기도 하고 충분히 상품성이 있다는 판단이 서네요.”

“제 의견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저도 좋다고 생각해서 판단한 건데요. 제가 고맙죠. 그럼 판타지로 소재를 정한 겁니다.”

“네.”

“그리고 내일 잘 부탁드려요.”

“저도요.”

1차전 심사위원 차토세, 바쟐.

아시아 패션 어워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심사위원들의 재량과 아이디어로 대회를 이끌어 나가게 된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5명의 유명 디자이너들은 이 방법을 택했다.

그 이유로는 사전에 정보가 유출되는 걸 방지.

그리고 심사위원들도 흥미를 가질 수 있는 대회 방식을 채택한 거다.

* * *

MC 하경이 마이크를 들고 말을 이었다.

“1차전 소재는 판타지입니다.”

하경의 말에 다시 한번 스크린에 영상이 흘러나왔다.

아주 화려하고 역동적인 액션, 화려한 세계관.

화면에는 커다란 세계수가 나타났고 그곳에는 많은 이종족들의 전투가 펼쳐지고 있었다.

“저거 바쟐 놈이 밤새도록 하던 그 게임들인데.”

내 눈에 모두 익숙한 게임들이었다.

‘미친놈. 지가 하던 게임을 소재로 잡은 거야.’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엉뚱한 면을 가진 바쟐이라면 가능할 거라는 판단을 내렸다.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온라인 게임과는 다르게 차별화된 화려함과 특색이 강한 게임들이 즐비하다.

“여러분 화면 속 의상을 잘 봐주십시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판타지 의상들 그것이 이번의 과제입니다.”

하경의 말이 끝나자.

바쟐이 마이크를 들고 말을 이었다.

“보여진 건 판타지 세계이지만 당신들은 현재에 살고 있는 디자이너라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디자이너는 의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입니다. 그럼 이 판타지의 의상도 누구나 선호하고 누구나 입고 싶어 하는 의상으로 만들어야 할 겁니다.”

바쟐의 말에 무슨 의미가 담겨있는지 캐치할 수 있었다.

우리는 브랜드의 디자이너들인 만큼 상업적인 요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바쟐다운 소재네.’

바쟐이 마이크를 내려놓자.

하경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멘트를 이어갔다.

“바쟐 디자이너님 말씀 들으니까 제가 다 떨리는데요. 제작 시간은 총 4시간입니다. 이 시간 동안 디자인, 제작, 모델 피팅까지 끝내셔야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모두 준비는 끝나셨죠?”

디자이너들은 하경의 말에 소리 내어 대답은 하지 않았다.

눈빛만으로 그 대답을 대신했다.

“준비가 끝난 거 같네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하경의 시작 멘트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때 중앙무대 오른쪽에 설치되어 있는 대형 전자시계의 초가 흘러가기 시작했다.

디자이너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간, 순간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스케치로 옮기는 디자이너.

원단과 재료를 구하러 달려가는 디자이너.

나는 최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재료를 살펴보기 위해 천천히 중앙을 벗어났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내 팔을 끌어당기는 게 아닌가.

내가 고개를 돌리자.

“장료이? 대회 시작했는데….”

“대회 시작한 거랑 무슨 상관이야. 궁금해서 말야. 넌 뭐 만들 거야?”

“응?!”

이놈은 오지랖이 넓은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내가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을 보더니 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삼국지가 떠올랐어! 중국에 유럽의 판타지를 섞는 거지 거기에 현대의 편안함을 섞을 거야. 내 아이디어 어때.”

“뭐… 그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알아.”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에게 내 의견을 피력했다.

“판타지 세계관이 얼마나 광범위한데. 그리고 이미지화하지 않은 디자인을 어떻게 알겠어.”

“그런가….”

장료이는 시무룩한 얼굴로 재료가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진짜 알다가도 모를 놈이네.”

이런저런 설명을 듣는다 해도 한 획에서 많은 변화가 이루어지는 게 디자인이다.

그의 생각을 모두 읽을 수는 없지만 분명 좋은 의상이 탄생할 거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장료이의 표정이 벌써부터 나를 긴장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원단과 재료를 살피기 위해.

장료이의 뒤를 따라 재료가 전시된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하나하나 꼼꼼히 재료를 살피기 시작했다.

“판타지라….”

판타지 게임 속의 의상을 생각하면 평상복 위에 걸쳐 입는 갑옷이 주를 이룬다.

바바리안은 헐벗은 몸에 심장과 주요 장기만을 지키는 방어구.

엘프라면 단아하면서도 자연과 친화적인 의상을 선호한다.

인간은 철로 만든 가공된 갑주가 주를 이룬다.

직업적으로 보았을 때도 전사와 마법사, 힐러, 도적의 의상이 모두 다르다.

그만큼 만드는 과정과 아이디어에 따라 많은 것들이 바뀔 거다.

“가죽이 가장 판타지에 적합하긴 한데. 금속을 가공할 수는 없으니까.”

이번 1차전은 브랜드의 장인들의 참여할 수 없다.

오로지 디자이너의 역량을 평가한다는 소리.

가죽을 만질 수 있는 디자이너에게 플러스 요인일 수밖에 없다.

“사피아노가 좋을 거 같은데.”

사피아노.

1913년에 프라다가 만들어진 같은 해에 사피아노 가죽이 개발됐다.

사피아노는 이탈리아어로 ‘철망’을 뜻한다.

소가죽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을 가공해.

빗살무늬 또는 철망무늬 스탬프로 패턴을 넣은 후 다시 광택을 내서 만든 것이다.

브랜드에서는 사피아노라는 이름을 붙인 가방을 판매하고 있을 정도로 특색이 강한 가죽이다.

내가 사피아노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철망 느낌이 강한 패턴이기 때문이다.

“내부 의상은 원피스 형태로 하고.”

나는 탄색 사피아노 가죽을 들고 지정받은 자리로 이동했다.

그제야 가죽을 선반 위로 올려놓고 의상 스케치를 이어갔다.

내가 선택한 종족은 엘프다.

역동적인 움직임과 자연 친화적인 아름다운 모습.

그리고 단아함과 아름다움을 표현할 의상을 만들기로 했다.

원단은 아주 얇은 실로 만들어진 30수의 흰색 면을 선택했다.

그리고 내부가 환히 비치는 화이트 계열의 실크.

이 둘을 합치면 분명 맑고 깨끗한 느낌이 강하게 들 거라는 판단이 섰다.

“활동적으로 치마를 짧게 만들어야겠어.”

내부 의상 디자인 스케치가 끝이 나고 가장 포인트가 되는 디자인에 들어갔다.

허리 전체를 가죽으로 감아주고 치마의 느낌을 주기 위해 아랫부분은 크게 6가지 조각을 낸 가죽을 허벅지로 흘려보낸 디자인이다.

활동이 편안하고 전면부는 노출되도록 디자인했다.

“벨트를 채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나는 많은 시간을 메인 디자인 스케치에 투자했다.

생각해낸 가죽 치마를 만들기 위해서는 패턴 작업도 이어가야 했기에 분주하게 움직였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들어가네.”

한참 동안 작업이 이어지고서야 스케치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부족하다.

내가 만든 디자인에 끌림이 느껴지지 않는다.

“뭐가 문제지?”

분명 화려하고 판타지스러우며 당장 시내를 나간다 해도 부담스럽지 않다.

“왜지… 이 느낌이 아닌데.”

다시 연필을 들어 수정하기 수십 번.

“아니야… 막혀버렸네.”

내가 처음부터 떠올린 이미지는 맞지만 상업적 시선에서 보았을 때.

상품성을 찾아볼 수 없는 디자인이다.

그 순간 내 생각이라도 읽은 걸까.

스케치한 디자인에서 옅은 검붉은 빛이 피어 올라왔다.

판타지 3.

* * *

“하…… 젠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 디자인에서 검붉은 빛이라니.

내 생각을 훔쳐보기라도 한 듯 피어오르는 빛무리를 바라보고 있자니 짜증이 밀려왔다.

내가 멍하니 스케치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그때.

심사위원인 바쟐이 나에게 다가왔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새끼 언제 봤다고 반말이냐. 아주 날 지 아래로 보고 있고만.’

멍하니 스케치만 바라보고 있는 내가 이상했던 모양이다.

“볼펜을 그렇게 씹는다고 달라져. 행동으로 옮겨야지.”

‘아 내가 또 볼펜을 씹고 있었구나.’

생각이 깊어지면 무의식중에 볼펜을 씹는 버릇.

그럼 내 모습을 바쟐이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 친구도 당신과 같은 버릇이 있었는데 신기하네.”

“네?! 같은 버릇이요?”

“생각이 깊어지면 볼펜이 부서져라. 씹는 놈이 있었거든.”

“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