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11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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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쟐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허접한 디자인으로 이곳에 올라선다면 가차 없이 뭉개버릴 겁니다. 그리고 뒤에서 헛된 꿈을 꾸고 있는 브랜드들은 일찌감치 포기하세요. 그 꿈은 허상일 뿐이니까! 내가 그 꿈을 짓밟을 겁니다.”

의미가 가득 담긴 짧은 말이 끝나고 무대 아래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단상 위에 서 있던 디자이너들은 그가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다는 듯 웃음을 겨우 참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돌리니 주위에 있던 나나세가 자신의 입술을 강하게 깨물고 있었다.

‘또 뭔 짓을 꾸민 거야.’

그리고 잠시 멈췄던 바쟐이 말을 이었다.

“여기 모인 심사위원들은 외부의 영향력 없이 아주 공평하게 심사할 겁니다. 그러니 의심하지 마세요. 의심은 당신들의 디자인능력에 대해 하십시오. 꼭 디자인에 능력도 없고 실력도 없는 것들이 핑계만 많은 겁니다.”

바쟐이 마지막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고 마이크를 사회자에게 넘겼다.

사회자는 당황하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했다.

“다른 디자이너분들은 할 말 없으십니까?”

“바쟐이 우리 이야기를 다 해줬네요. 저는 할 말 없습니다.”

“저도요.”

“me too.”

심사위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대 뒤로 빠져나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각국의 디자이너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왜 웃기냐.

‘위치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새끼 많이 변했네. 센 척… 와.’

장난기 가득하고 나에게만큼은 천사 같던 바쟐.

어쩌면 바쟐은 원래 저런 인간일지 모른다.

늘 내 그림자 때문에 빛을 발하지 못했던 친구다.

그때도 디자인 능력과 사업적 능력은 인정받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세계적인 디자이너들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았고 그들도 그는 인정하는 모습이 비춰졌다.

‘많이 컸다.’

* * *

아시아 패션 대회는 방송을 타고 전 세계에 제휴되어 있는 채널로 방영될 예정이다.

그래서인지 거대한 홀에 화려하게 만들어진 세트가 눈에 들어왔다.

“장난 아니네.”

중앙무대 뒤편으로 전 세계에서 가지고 온 듯한 원단과 가죽, 부자재가 가득했다.

얼핏 보기에도 최고급 원단과 장인 무두장이가 만든 가죽, 유명 브랜드의 장식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앙무대에는 의상과 가죽가방, 슈즈를 만들 때 필요한 도구가 놓여 있었다.

마치 작은 공방 수십 개를 붙여놓은 듯한 규모의 세트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디자이너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떨리냐?”

“떨리기는 설렌다.”

“역시 사장 놈. 강심장이라니까. 내 도움 필요하면 꼭 찾아.”

“응. 당연히 그래야지.”

아직 어떠한 과제가 주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디자인 파트와 제작 파트의 경계선이 없다는 건 분명하다.

디자이너의 디자인 능력과 제작 능력을 평가하고 브랜드의 장인들의 수준을 함께 평가할 것으로 보여진다.

나는 브랜드 전체의 영향이 고스란히 드러나도록 과제가 주어질 거라는 판단을 내렸다.

“관계자를 제외한 모두 자리에 착석해 주십시오!”

짧은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아리raM의 식구들을 비롯해.

각 브랜드의 관계자들은 뒤에 마련된 자신의 자리를 찾아 물러났다.

“브랜드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분들은 중앙무대에 올라주세요. 방송녹화 10분 전입니다.”

총 10개의 브랜드.

강한 우승 후보로 정해진 중국의 장료이, 그리고 일본의 나나세.

둘 모두 매출과 시장의 영향력으로 봤을 때 가장 유력하다는 평가가 내려졌다.

싱가폴과 대만 디자이너도 나름의 유명세를 얻고 있지만, 우승 후보에 들어가지 못했다.

디자이너들이 중앙무대에 나란히 오르자.

중국 국민 MC 하경이 무대에 뒤늦게 올라왔다.

“닌하오, 닌하오. 기다리고 기다렸던 아시아 패션 어워드의 첫 번째 대회의 MC를 맡은 하경입니다.”

그가 여러 대의 카메라 앞에서 능청스럽게 오프닝을 시작했다.

그는 오프닝 인사를 마치고 나란히 서 있는 디자이너에게 다가와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오호, 장료이 디자이너. 제가 장료이 디자이너를 잘 아는데 천재라는 단어가 아쉬운 디자이너죠.”

“과찬이십니다.”

“그럼 천재 장료이 디자이너가 가장 경계하는 디자이너는 누구입니까?”

모든 디자이너가 경계하는 대상이 장료이다.

그의 발언에 두 번째 우승 후보가 정해지는 것과 마찬가지.

“흠……. 모두 자신의 특색이 강하고 뛰어난 디자이너분들이라 제가 판단하기는 어려울 거 같은데요.”

“그럼 질문을 바꿔보죠. 가장 마음에 담아둔 사람은 누구입니까. 앞에서 말하기 그러면 저한테만 말해주세요.”

하경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손을 귀에 올리고는 장료이의 입으로 가져다 댔다.

그러자 장료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용히 누군가의 이름을 그에게 말해주었다.

장료이의 말을 들은 하경은 놀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장료이 디자이너가 저한테만 말해 줬는데요. 모두 궁금하시죠!”

그때 방청석에 일반인 참여자들과 브랜드의 관계자들이 궁금하다는 듯 소리쳤다.

“네!”

“그럼 제가 말해드리죠. 저는 사실 비밀이 없는 남자라서요.”

하경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장료이에게 눈을 찡긋하고는 말을 이었다.

“장료이 디자이너가 가장 경계하는 디자이너는 한국의 차진혁 디자이너입니다.”

순간 중앙무대에 서 있던 디자이너들의 표정과 방청석 인원들의 표정이 아리송해졌다.

당연히 인지도와 유명세로만 따졌을 때.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는 나나세일 테니까.

그때 내 옆에 서 있던 나나세가 나를 바라본 후.

짜증이 났다는 듯 조용히 자신의 마음을 뱉어냈다.

“젠장!”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녀의 시선을 회피했다.

‘성격 여전하네.’

장료이의 인터뷰가 끝이 나고 MC 하경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걸어왔다.

“장료이 디자이너가 차진혁 디자이너를 강한 우승 후보이자 라이벌이라고 지목했는데 심정이 어떠신가요?”

내 대답에 따라.

평가가 나뉠 거다.

이런 자리에서 겸손할 필요도 너무 과할 필요도 없다.

뭐, 내 예전 성격이라면 아주 깔아 뭉개버릴 발언을 했겠지만 현재 그랬다가는 아주 건방진 이미지가 박힐 게 뻔하다.

“저를 높게 평가해주셔서 장료이 디자이너에게 감사합니다. 사실 저도 눈여겨보고 있는 디자이너가 바로 장료이 디자이너였습니다. 대회 기간 동안 서로의 영향을 최대한으로 펼치고 싶네요.”

“와우! 정말 아름다운 라이벌 구도인데요.”

하경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청석에서 뜨거운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이번에는 이 중에 프레타 포르테 경험이 있는 브랜드의 디자이너. 이브의 나나세 디자이너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나나세 디자이너. 가장 우승에 가까운 브랜드는 어디라고 생각하세요.”

어떤 누구도 그녀를 지목하지 않았다.

‘고민 좀 되겠네.’

장료이나 나를 지목한다면 자신이 아래에서 시작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나나세는 한참 동안 고민하더니 말을 이었다.

“이브! 제가 우승할 겁니다.”

그녀의 발언에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풋!”

설마설마했는데.

너무 그녀다운 대답이지 않은가.

내 웃음 소리를 들은 건지 나나세가 내 얼굴이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하경도 당황했는지 빨리 무대를 정리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웃어?”

“아 실수입니다. 너무 당신다워서요.”

“그 웃음 언제까지 가나 보자.”

나나세도 무안했는지 귀가 아주 빨갛게 물들었다.

모든 디자이너의 인터뷰가 끝이 나고 1차전 심사위원들이 소개되었다.

“모두 뒤에 설치된 화면을 봐주십시오!”

디자이너 모두가 뒤로 돌아서는 순간.

차토세 디자이너의 일하는 모습이 스크린을 통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본스러운 구제 느낌의 작업실.

그곳에서는 차토세의 지시를 받고 작업을 이어가는 장인들의 모습이 비쳤다.

차토세의 브랜드 다크 그램!

그녀의 브랜드는 모두가 선호하는 블랙, 화이트, 아이보리를 기반으로 포인트를 집어넣어 특별함과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

나는 화면 속 그녀의 디자인을 바라보며 끌림을 느끼고 있었다.

“모두 큰 박수로 환호해 주십시오. 다크 그램의 차토세 디자이너를 소개합니다!”

그 순간 뒤편의 대형 스크린이 올라가자.

차토세 디자이너가 천천히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작은 키에 단발머리로 일본인 특유의 향을 가득 머금은 디자이너였다.

“반갑습니다. 1차전 심사위원을 맡은 차토세 디자이너입니다.”

그녀가 등장하자 스크린이 다시 내려갔다.

그리고 또 다른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파리의 전경이 펼쳐지며 눈에 익은 작업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픈화이트 작업장이네….’

내 집 안방처럼 들락날락했던 바쟐의 작업실.

저곳에서 취하도록 와인을 마시고 서로의 디자인을 평가하며 우리는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기를 꿈꿨다.

오래전과는 다르게 더 화려해진 작업실이지만 우리의 추억은 고스란히 배어있는 그곳이 내 눈에 들어오자.

내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갑자기 떨리네.’

나는 추억을 되뇌며 영상을 바라봤다.

여러 가지 모습이 흘러나왔고 마지막으로 바쟐이 진행하는 회의 모습이 비쳤다.

주위에 모여 있던 오픈화이트의 간부들이 나타났고 눈에 익은 사람들도 존재했다.

그런데.

“어!”

그때 반가우면서도 가장 미안한 사람의 얼굴이 화면을 스쳐 지나갔다.

‘네가 왜?!’

여러 가지 의문이 드는 순간.

흘러나오던 영상이 끝이 났다.

그렇게 좀 전과 마찬가지로 스크린이 올라가고 그곳에서 흑인의 거구 바쟐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걸어 나왔다.

“오픈화이트의 수장이자 루이바통의 총괄디자이너인 바쟐디자이너를 소개합니다.”

하경의 멘트에 방청석과 중앙무대 위 디자이너들의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새끼 건방지게 걸어오네.’

* * *

바쟐은 아시아 패션 어워드가 어떤 이유에서 개최되었는지 알고부터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패션과 정치가 엮여 있다는 것도 구역질이 났지만, 내부적으로 검은 손길이 뻗쳐 왔다는 게 더 화가 났다.

자신이 속한 생디카가 더럽게 물들어가는 거 같았기 때문이다.

“생디카 영감탱이들. 도대체 뭘 받아 처먹었길래. 그딴 조건을 받아들인 거야. 이브 같은 브랜드를 생디카에 말도 안 돼!”

로버트의 말을 되뇌며 바쟐은 이브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대표님 자료 보냈습니다. 확인해보세요.”

“바쁠 텐데 고마워.”

바쟐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노트북 화면을 바라봤다.

“네가 생디카에 올 정도의 능력이 있나 보자.”

브랜드 이브의 성장 과정과 프레타 포르테, 그녀의 약력, 브랜드가 보유한 장인들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알아보기로 했다.

컬렉션 의상 이외에 기본 의상도 모두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딴 디자인으로 프레타 포르테에 오르다니 어이가 없네. 처음부터 끝까지 의문인 브랜드잖아.”

프레타 포르테.

기성복 패션쇼이지만 디자이너라면 이렇게 말할 거다.

꿈의 무대라고 그런 무대에 이런 디자인을 들고 올라와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니 터무니없는 잘못된 기사들이었다.

“내가 심사위원 하는 이상 비리는 없어. 거지 같은 기사를 쓰는 놈들은 내가 짓뭉개버릴 거야.”

바쟐은 자신의 모든 권한과 인맥을 사용해서라도 이 대회의 정당성을 입증할 예정이다.

짜증을 삭이듯 노트북을 닫고는 위스키 한 잔을 마시고 있을 무렵.

누군가가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 방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누구?!”

“바쟐 디자이너. 저예요.”

판타지 2.

* * *

“누구?”

“바쟐 디자이너. 저 차토세예요.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네. 잠시만요.”

바쟐은 벗고 있던 몸을 샤워 가운으로 가리고 문을 열었다.

“무슨 일로?”

“아 별건 아니고 내일 정해도 되기는 한데. 저도 어느 정도 조사를 하고 평가하고 싶어서요. 바쟐 디자이너가 1차전 저랑 같이 심사위원이더라고요.”

“아 그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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