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10/200)

“맞아요. 이제 CS교육도 끝났으니 회식 같이해요.”

“벌써 끝났다고요?”

명품 매장의 매니저가 되려면 기술자만큼 디테일한 부분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 VIP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으니까.

그런 만큼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데 한 달 만에 모두 마스터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저도 좀 놀랐어요. 모두 열정적이기도 했고 상황대처능력이 생각보다 좋으시더라고요. 당연히 교육성적도 좋구요.”

“그런가요. 잘됐네요.”

상인들은 낮에는 매장을 지키고 밤에는 신 디렉터와 본사매장 매니저에게 CS교육을 꾸준히 받았다.

“그리고 몇 분이랑 발령 건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고향이 지방이신 분들은 그쪽으로 배정을 원하더라고요. 주요 광역시 매장에는 두 분씩 배정하기로 했습니다. 차후에 백화점 입점하게 되면 그때 다시 인사이동 여부도 말해드렸습니다.”

“네, 그건 신 디렉터님이 알아서 해주세요. 그리고 파리 가기 전에 장희영 팀장한테 그 일에 대해서 인수인계도 부탁드리고요.”

“네.”

이제부터는 아리raM의 이름을 세계에 알릴 시간이 다가왔다.

김경진의 아시아 패션 어워드 포기로 인해 재심사가 이루어졌고 일주일 만에 한국패션협회는 아리raM을 한국 대표로 새롭게 공지했다.

변수가 있었지만 그 누구도 브랜드 아리raM이 한국 대표가 된 걸 부정하지 않았다.

아시아 패션 어워드 3.

* * *

* * *

바쁜 한 해가 지나갔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렸던 아시아 패션 어워드가 개최되었다.

참여국은 아시아 10개국으로 나름대로 패션사업이 성장하고 있는 곳들로 구성되었다.

이번 대회는 예선전 없이 5가지 주제가 진행되며 한 부분마다 점수를 매긴 후.

최종적으로 모든 점수를 합산해 우승을 매기는 대회다.

첫 국제대회에 참관하기 위해 신 디렉터도 파리에서 베이징으로 날아왔다.

그리고 아리raM은 새로운 총괄 디렉터 장희영과 제작 총괄 다니엘, 수석디자이너 류미리, 아버지까지 개막식에 참여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더 크게 진행되네요.”

“이번에 프랑스가 주최 측이라서 그런지 생디카에서도 지원한다고 들었어요.”

“생디카요?! 그럼 관계자들도 참여하겠네요.”

“그건 모르겠는데 이번에 심사위원으로 켈링 그룹이랑 LVMH 그룹에서 한 명씩 초빙됐다고 들었어요. 생디카 소속브랜드일 거예요.”

“나쁘지 않네요. 저도 대회 기간에 여기 머물러야겠어요.”

패션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이태리와 프랑스 브랜드에서 한 명씩 심사위원으로 왔다.

더욱 의미가 있고 우승을 하게 된다면 디자이너로서도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각국의 대표들을 베이징에 있는 엑스포관에 모여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낯선 인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파리와 런던, 피렌체 유학파 출신 디자이너들과 잡지에서 한 번쯤은 본 인물들.

그때 나를 향해 누군가가 밝은 미소를 머금고 다가왔다.

“헤이, 헤이!”

“누구?”

“아 미안 내가 원래 좀 이래. 인사가 늦었지. 나는 중국 대표 장료이라고 하는데. 너 VOKE 잡지에서 봤어. 한국브랜드 아리raM의 차진혁 대표!”

“타이거?”

“오호! 내 브랜드도 알고 있구나. 이거 영광인데.”

모를 리가 있나 매출로만 따진다면 타이거는 아리raM의 10배는 넘어가는 대형 패션기업이다.

뭐 국내 매출만 해도 엄청나기에 그럴 수밖에 없지만, 현재는 해외에서도 나름대로 인정을 받고 있다고 알고 있다.

그만큼 장료이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었다.

“다음에 볼 때는 적이겠어. 나는 친구가 좋은데 아쉽다 그지.”

“뭐, 좋은 대결 이후에는 좋은 친구가 되겠지.”

“오 멋진 말인데.”

그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내 말을 옮겨 적었다.

‘특이한 놈이네.’

“그럼 여기 사인 좀 해.”

“웬 사인?”

“난 너랑 친구가 되고 싶거든. 최고의 대결 이후에 좋은 친구가 되자!”

“…그…. 래.”

정말 뜬금없는 놈이기는 한데 다니엘같이 미워할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다니엘을 바라봤다.

“날 왜 보냐. 사장 놈아.”

다니엘이 살짝 질투를 느끼듯 툴툴거리자.

장료이는 다니엘에게 다가가 손을 부여잡았다.

“장인이구나.”

다니엘이 순간 흠칫 놀랐다.

“너도 장인이구나. 우리 사장 놈 손만큼 거칠어.”

“오호 그래. 차진혁 디자이너에게 더 흥미가 생기는데.”

둘의 대화로 장료이는 가방, 가죽 제작에 능력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보통 패션디자이너라면 의상 제작은 기본적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가죽 제작은 다른 분류에 속한다.

아예 다른 카테고리에 속하는 거다.

점점 장료이 디자이너라는 인물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피렌체 가죽 학교 출신인가?”

“아니 그건 아니야. 나는 할아버지에게 배웠어. 우리 할아버지가 중국에서 꽤 유명한 가죽장인이시거든 몽골 출신으로 말안장을 만들던 분이시지.”

그는 어깨를 쫙 펴고는 자신 있게 자신의 할아버지를 자랑했다.

장료이는 다니엘의 손을 놓고 말을 이었다.

“그쪽 친구도 대회가 끝나면 좋은 친구로 같이 가죽을 만지자고.”

“좋아!”

다니엘은 장료이의 말에 환한 미소로 답했다.

‘어휴 속도 없는 가죽장인 놈.’

서글서글한 미소에 잘생긴 외모를 가진 청년 장료이.

뒤돌아서 걸어가는 그의 모습에서 오래된 장인의 느낌이 풍겨왔다.

마치 거장의 영혼을 둘러쓴 느낌이었다.

“사장.”

“응?!”

“저놈 손톱.”

“손톱이 왜?!”

“무두질도 하는 거 같아. 염색약이 깊이 배어 있어.”

“무두질이라. 어려운 상대네.”

가죽을 가공하는 기술까지 가진 장인이라면 가죽을 보는 안목도 일반적인 장인의 범주를 한 단계 더 뛰어넘었다는 이야기다.

“가장 경계해야 할 디자이너라는 소리인가.”

장료이가 다녀간 이후.

나나세도 나를 슬쩍 쳐다보고 지나갔다.

그곳에 모인 디자이너들이 서로를 알아보며 신경전 아닌 신경전을 벌이는 가운데 개막식이 시작되었다.

개막식은 여느 대회와 마찬가지로 형식적으로 진행되었다.

프랑스, 일본, 중국, 한국이 밀실에서 합의한 빅딜은 어느 곳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때 사회자가 마지막으로 심사위원들을 소개하기 위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이번에는 대회의 처음과 끝을 모두 심사해줄 심사위원님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사회자가 심사위원들이 이름이 호명하자.

누구나 알 수 있는 브랜드의 디자이너들이 단상 위로 한 명씩 올라왔다.

“중국의 첸 디자이너!”

첸 디자이너는 세계적인 스파브랜드와의 협업으로 세계에 이름을 알린 디자이너다.

중국에서는 1세대 디자이너로 유명하다.

“한국의 유영미 디자이너!”

유영미 깔끔하고 댄디한 스타일로 프레타 포르테를 섭렵한 한국의 자랑이라 할 수 있는 디자이너로 만약 차세대 디자이너가 아닌 유명순으로 대회에 참가했다면 그녀가 참여했을 것이다.

“일본의 차토세 디자이너.”

준명품 브랜드의 수장으로 일상 속의 특별함을 추구하는 디자이너다.

그녀의 디자인은 오랜 세월 동안 사랑받아 왔으며 일본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라 할 수 있다.

“이탈리아 발렌시의 총괄디자이너 발란리아!”

발란리아.

브랜드 베트뭉을 런칭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고 세계적인 명품 발렌시를 이어받은 천재 디자이너.

현재 발렌시를 다시 정상으로 인도한 자라는 칭호를 가진 디자이너다.

발렌시는 프랑스 브랜드이지만 이탈리아 켈링 그룹을 대표해서 심사위원으로 온 듯하다.

“마지막으로 프랑스의 오픈 화이트 & 루이바통 총괄디자이너인 바쟐 디자이너!”

사회자의 말에 나는 등골에 소름이 쫘르륵 흐르기 시작했다.

“바쟐…….”

스포트라이트가 그를 비추자.

내 눈앞에 늘 그립고 보고 싶던 절친의 모습이 비쳤다.

순간 눈물이 쏟아질 거만 같았다.

만약 무대 위에 올라갈 수 있다면 그를 안으며 내가 아직 살아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네. 갑자기 왜 이러지.”

순간의 기쁨과 슬픔이 몸에 변화를 일으킨 걸까.

식은땀이 비가 오듯 흘러내렸다.

나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며 바쟐의 모습을 놓치지 않기 위해 뚫어져라. 그를 바라봤다.

할아버지를 잃고 떠나온 피렌체 이후 런던의 생활.

그곳에서 힘겹게 공부를 이어오던 나에게 큰 힘이 되어준 가족 같은 친구 바쟐이 내 앞에 있었다.

일 년 전만 해도 나는 다시 파리의 정상에 올라서는 그때.

그와 다시 친구가 되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이른 시일에 바쟐을 만나니 기분이 묘했다.

사회자의 소개가 끝이 날 무렵.

바쟐이 지키고 있던 자리를 이동해.

사회자에게 다가갔다.

“마이크.”

“네?!”

“마이크 달라고.”

“네.”

사회자의 마이크를 뺏듯 받아낸 바쟐은 말을 이었다.

* * *

나나세는 개막식이 끝나자마자.

개막식 파티도 참여하지 않고 자신이 머무는 호텔로 돌아왔다.

자신의 목을 옭아매고 있던 답답한 목도리를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한쪽에 비치된 와인 병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X발 하나같이 왜 나 갖고 그러는 거야! 쉽게 좀 가면 안 되냐고! 바쟐 X 자식! 분명 이브를 지목한 거나 마찬가지야.”

블랙 기업은 이브를 생디카에 가입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자신들이 들고 있는 패.

브랜드 이브의 위치를 상승시켜 동등한 브랜드끼리의 기업 인수를 추진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벌써 빨간불이 켜진 거다.

“우승 못 하면 회장이 분명…. 생각하기도 싫어.”

나나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생각을 지우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두려웠는지 와인병을 들고 있는 오른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또…. 진정해 나나세. 이때까지 잘했잖아.”

나나세는 엄청난 부와 기회를 준다는 사탕발림에 자신의 인생을 투자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은 벌어졌고 자신도 뒤처지고 싶지 않았다.

그때 그녀가 머무는 호텔 방의 현관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너 우승할 수 있겠어? 생디카 가입 때문에 바쟐 디자이너 완전 독기 품었던데.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니까. 멍청하기는.”

“나가.”

“네가 회장님한테 부탁했잖아. 생디카 관계자들 설득해 달라고.”

사실 생디카에서 이브가 언급된 건.

나나세의 욕심 때문이었다.

많은 명품기업을 자신의 밑에 두고 싶기도 했고 블랙 기업 내에서의 위치도 안정적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런 이유에 이 방법을 회장에게 제시한 거다.

사실 나나세는 쉽게 생디카 가입이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늘 회장이 나서면 불가능한 것도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의도한 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생디카는 역으로 이브에 아시아 대회 우승이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넌 너무 세상을 쉽게 봐. 나나세 충고 하나 하자면 미련하게 버티지 말고 지금이라도 포기해? 그럼 회장님이 그냥 능력 없는 인간이라고 버리기만 하실 거야.”

“꺼져!”

검은 정장의 사내.

오늘은 캐쥬얼한 청바지에 스웨터를 입고 나타났다.

오른쪽 턱 밑 칼자국 흉터가 옅게 있었지만, 그 흉터마저도 얼굴이 가려줄 정도로 잘생겼다.

“말도 없이 이렇게 불쑥불쑥 나타나지 마! 개자식아.”

“왜. 내가 너를 덮칠까 봐?”

“역겨운 소리 작작 해라.”

“나나세. 네가 반하는 일은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 긴장하지 마. 안쓰러워서 충고 정도 해주려고 온 거니까.”

“나는 우승할 수 있어. 그런 능력이 있으니까 그딴 걱정하지 마!”

“그렇구나. 하하하. 그래 한번 믿어볼게. 아 그리고 만약에 우승 못 하면 나한테 부탁해야 할 거야. 빨리 죽여달라고 안 그러면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될 거 같거든.”

나나세는 그의 말에 분노가 끓어올랐다.

“X새끼야 꺼지라고.”

그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들고 있던 와인병을 사내를 향해 있는 힘껏 던졌다.

사내는 날아든 병을 가볍게 낚아채듯 받아냈다.

“비싼 술을 막 던지고 그러면 되나.”

그는 그녀를 비웃듯 와인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그녀를 향해 있는 힘껏 다시 던졌다.

쾅!

그녀의 뒤에 있던 화장대의 유리가 와장창 무너지며 파편이 호텔 바닥에 나뒹굴었다.

“술맛이 별로야. 역시 술은 압생트가 최곤데 말이야. 나나세 뒤에 봐.”

나나세는 부서진 화장대 유리와 와인병을 바라봤다.

“조심하라고 너도 저렇게 되는 건 한순간이야.”

“…….”

“나는 이제 가볼 테니까. 좋은 꿈 꿔. 하하하.”

나나세는 깨진 유리를 뚫어지라 바라보며 자신의 욕심을 증오했다.

포기하고 싶은 적도 많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리하고 부담되는 일들이 늘어났고 실패의 회수가 늘어날수록 심리적으로 너무 불안했다.

하지만 저 사내의 말처럼 포기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죽지는 않겠지만 분명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게 될 테니까.

“이번만큼은 꼭 우승해야 해.”

그렇게 나나세의 하루가 지나갔다.

판타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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