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09/200)

“하…….”

“한국도 참여한대. 서진의 고향 한국 말이야.”

“뭐?! 한국. 한국에서 그런 대회에 나올 인물이 있기나 해? 패션 후진국인 줄 알았는데.”

“한국에 대해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유영미 디자이너도 있고 요새 파리 시장에서도 활동하는 디자이너들 중에서도 한국 출신 많아. 한국도 떠오르는 패션시장이라고.”

“무시가 아니라 서진이를 뛰어넘는 디자이너가 한국에서는 없었으니까.”

“야 김서진은 백 년 아니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하는 인재야. 그놈이랑 비교를 하냐.”

“그런가….”

“아! 재미있는 소문이 있기는 한데.”

“뭔데?”

“공짜로?”

“아… 싫으면 말하지 말든가.”

“좀 넘어와 주면 안 되냐.”

로버트는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말을 이었다.

“요번에 한국에 엄청난 신인이 한 명 있다고는 들었는데 진짜인지 거짓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 신인이 이브 CEO, 총괄디자이너인 나나세를 정상회담에서 디자인으로 코를 납작하게 해줬다더군.”

“나나세! 그 성격 파괴자 같은 년 말하는 거야.”

“응…… 뭐 얼굴은 이쁘잖아.”

바쟐은 손을 공중에 휘휘 휘저으며 혀를 찼다.

“감당할 수 없는 여자야.”

“그거 알아. 고급의상점 조합에서 이브가 이번 대회 우승하면 생디카에 가입시킨다는 거 어디서 입김이 들어왔는지 받아들여졌어. 생디카에서 최대한 양보해서 대회 우승이지만 말이야.”

“미친!”

“자네가 화낸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생디카 쳐들어가도 달라지는 거 없고. 몇 가지 조건은 이미 갖추었고 프레타포르테에도 한 번 선 저력이 있는 브랜드라 영감들이 승인한 거 같아.”

“한 번! 나는 몇 번을 서고 욕도 왕창 먹고 루이바통 총괄 돼서야 겨우 들어간 생디카를 그렇게 날로 처먹는단 말이야.”

“여러 브랜드에서도 찬성했나 봐. 신기하기는 한데.”

“그렇다는 말이지.”

이야기를 들은 바쟐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자신이 그녀를 시험하고 평가하겠다는 열의를 내비치고 있었다.

“그럼 하는 걸로 할게.”

“넌 진짜 정이 안 간다.”

“너도 마찬가지야. 다음에 오면 내가 맛있는 와인에 식사까지 대접하지. 미슐랭으로 말이야.”

“오호. 약속 지키라고 바쁘다고 도망 다니지 말고.”

“알겠어. 아시아 갔다 와서 살게.”

로버트가 사무실을 빠져나가고 바쟐은 아련한 추억에 잠들었다.

그의 친구가 말해준 그곳의 아름다움과 향기.

이야기로만 들었던 그것을 느끼고 싶어진 것이다.

“서진 거기서 잘 지내고 있어라. 네 복수는 내가 꼭 해줄게.”

바쟐은 서진의 죽음 이후.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시아 패션 어워드 2.

* * *

* * *

“누가 내 이야기 하나. 귀가 간질간질하네.”

아침 일찍이 회사 업무를 마친 뒤.

분주하게 동대문 구시가지로 향했다.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누군가에게는 정말 긴 시간일 테고 누군가에게는 아주 짧을 시간일 터였다.

“가보면 알겠지.”

김경진의 결정 여하에 따라 아리raM의 대처도 달라질 것이다.

내가 동대문 구시가지 초입에 들어서는 순간.

“무슨 일이….”

어제와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옷가지들이 인도에 뿌려지듯 널브러져 있었고 그 옷을 주섬주섬 주워 담는 상인들이 눈에 비쳤다.

그들의 표정에서 더 이상의 희망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아이즈의 입구에 들어서자.

더욱 심각한 모습이 나타났다.

디스플레이는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손상이 가 있었고 비품들 또한 모두 못 쓰게 되었다.

“이렇게까지….”

내가 가게 깊숙이 들어가자.

김경진이 의자에 주저앉아 바닥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차마 어제의 질문의 답을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내가 더 악당 같네.’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괜찮으세요. 김경진 씨?”

“아… 대표님 오셨어요.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마음 좀 추스르고 대화하시죠.”

김경진은 잠시 후.

눈물로 범벅되었던 얼굴을 씻고 나타났다.

“……포기하겠습니다. 이제 희망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만 나가주세요. 대표님이랑 입씨름하기도 싫습니다. 하…… 저희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억울해 미치겠네.”

“…….”

그의 분노가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기에 그의 분노가 사그라들 때까지 들어 주기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내가 말을 이었다.

“김경진 씨. 잠시 저 따라오실래요?”

“대표님을 따라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냥 가주세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귀를 쫑긋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로 가실 건데요?”

“따라오세요.”

.

.

.

그와 함께 시장 부근에 있는 작은 밥집으로 들어갔다.

분명 밥도 먹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었을 거다.

“식사부터 하죠. 배가 든든해야 이야기도 하죠.”

“입맛이….”

“일단 먹으세요.”

그는 내 말에 울며 겨자 먹기로 밥은 뜨기 시작했다.

그래도 배가 고팠는지 수저를 끊임없이 입에 가져다 대는 모습에 가슴이 메어왔다.

현재의 나와는 나이 차이가 크지 않겠지만 내가 김서진의 모습이었다면 한참은 동생이었을 그다.

“먹으면서 들으세요. 아시아 대회는 포기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네…….”

“그리고 그 조건으로 제가 작은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분명 서로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조건부터 듣고 싶습니다.”

“디자이너분들은 아리raM에서 스카우트하겠습니다. 하지만 수습과정을 통해 디자이너와 마이스터로 나누겠습니다. 젊은 분들이니 배움이 빠를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능력에 맞게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아리raM은 최고가 아니면 안 되는 곳이니까요.”

꿀꺽!

“판매를 전문적으로 하던 상인들은 아리raM의 매장 매니저로 고용하겠습니다. 계약서와 연봉에 관한 건 김경진 씨 메일로 발송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상인들을 대표하는 분이 김경진 씨이니 물어봐 주세요. 분명 원하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저는 원하지 않는 분들까지 받을 생각은 없으니 그 점도 유념해주세요.”

나는 세 번째 방법을 택했다.

최대한 아리raM의 예산을 건들지 않고 이들에게 가장 큰 기회를 줄 수 있는 방법.

그리고 아리raM에도 도움이 되는 방법 말이다.

‘매니저들은 문제가 아닌데. 디자이너와 마이스터 교육이 문제네.’

현재 전국 광역시에 매장 오픈을 준비 중이다.

인테리어가 끝나갈 무렵 백화점이나 프리미엄샵에서 매니저들을 스카우트해올 계획이 있었다.

나는 그 부분을 동대문 상인으로 대체할 생각이다.

개인 사업을 해본 사람.

이 타이틀만으로도 판매에 대해 누구보다 예민하고 센스 있게 대처할 수 있을 테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아리raM 매니저는 인센티브제로 운영되고 있기에 판매 성과에 비례해 성과금을 지급하니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명품매장, 프리미엄샵의 CS [Customer Service]는 신 디렉터와 본사 매장 매니저가 교육을 하면 될 거라는 판단이 섰다.

문제는 디자이너들인데.

“디자이너들은 총 몇 명이죠?”

“총 5명입니다. 모두 개인매장을 운영 중이고 다들 특색이 달라서….”

“그럼 일단 디자이너들과 미팅 날짜 한번 잡아보죠.”

“네.”

김경진과 남은 밥을 깨끗이 비우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아까 전과는 다르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 앞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저는 회사로 다시 들어가 보겠습니다. 협회도 들러야 하고요.”

“네, 사장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상인회 분들에게 잘 말해주세요.”

“네!”

그가 군기가 가득 잡힌 목소리로 대답했다.

.

.

.

엉망이 된 가게를 정리하고 있는 상인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은 김경진의 매장을 보며 감정이 더욱 격앙되었다.

몇몇은 눈물을 보이고 있었고 몇몇은 분노를 억누르며 욕을 뱉어냈다.

“경진아 네 가게 어쩌냐. 아이고. X새끼들!”

“우리가 힘이 없어서 이 어린놈한테 기대기만 하고 미안하다.”

“경진아… 흑흑.”

그런데 상인들의 감정과 다르게 김경진이 실성을 한 듯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저 괜찮아요. 누나 형님들 안 그러셔도 됩니다.”

“응?!”

김경진이 울상인 상인들을 향해 환한 미소로 차진혁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달했다.

“여러분 좋은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처럼요.”

“무슨?”

“좋은 기회라니? 어여 말해봐.”

김경진은 차진혁이 보내준 계약서와 관련 서류를 그들에게 보여주며 설명을 이어갔다.

“아리raM 대표 차진혁은 동대문 구시가지 상인 모두를 아리raM의 정식 사원으로 스카우트합니다.”

“아리raM?!”

“요즘 떠오르는 명품브랜드에서 우리를 왜?”

“경진아… 진짜냐!”

김경진은 자신감에 가득 찬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진짜입니다. 우리도 이제 큰 브랜드에서 일할 기회가 온 거예요. 선택은 개인 몫입니다. 그리고 디자이너분들은 따로 미팅 날짜를 잡기로 했고 도매상인 여러분들은 곧 오픈 예정인 아리raM 매장에 매니저로 스카우트하기로 했습니다.”

그의 말에 모두 놀라움 반 신기한 마음이 반이었다.

나름 차가웠던 공기에 온풍이 불기 시작했다.

상인들 모두 아리raM에서 자신들을 스카우트한다는 말에 놀라워했다.

“스카우트라니….”

“이제 이 매장 넘겨도 여한이 없것다. 목숨줄 잡았어.”

모두 김경진의 말이 진실이라는 생각에 표정이 밝아졌다.

이때까지의 고생을 보상이라도 받은 듯이 말이다.

현재 한국에서 아리raM이라는 브랜드의 인지도를 생각하면 이런 반응이 당연하다.

한국 무형문화재 장인들과의 콜라보레이션으로 탄생한 전통을 만들어가는 명품브랜드.

아리raM 대표가 직접 모두를 스카우트한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그리고 차 대표님이 부서진 그대로 놓아두고 합의를 최대한 늦게 해주라고 했습니다. 최대한 버티다가 합의하라고요.”

“응?! 설마 우리도 아리raM에 투자해야 하는 거냐?”

“아닙니다. 그냥 그렇게 하라고 당부하시더라고요. 그래야 복수하는 거라고.”

“아 그래. 그래 높은 분이 그러라고 하면 그래야지 최대한 버텨보자!”

진혁은 구시가지 동대문시장에 누가 이런 패션몰 사업을 일으켰는지 알게 되었다.

“영감탱이 맛 좀 봐라.”

뭐 이런 이유가 아니라도 강압적인 방법으로 상인들을 쫓아내는 놈들을 가만둘 생각이 없었다.

* * *

김 회장이 동대문 상인회 사무실로 쳐들어왔다.

“지금 몇 달째야 왜! 합의서를 한 명도 못 받아 오냐고 왜!”

“그게….”

“그놈의 변명. 너희를 믿은 내가 병신이지. 네놈들 돈 쓴 거 다 뱉어내!”

“회장님 저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멍청한 새끼들 최선만 다하고 제대로 하는 일은 하나도 없는 버러지들.”

김 회장은 뒷목을 주물럭거리며 그들에게 인격 모독적인 말을 스스럼없이 뱉어냈다.

조직의 두목과 부두목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억울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한 달이 다 지나가는 시점에 가게를 부수고 겁을 줘도 상인 놈들은 더 기고만장해졌고 먹고살기 바쁜 놈들이 부서진 가게를 보며 웃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체로 실성한 줄 알았지만, 최근에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리raM이라는 곳에서 이놈들을 모두 고용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는데 저희라고 방법이 있습니까.”

“아리raM….”

“네, 분명 아리raM이라고 했습니다. 이번에 아시아 패션 어워드 한국 대표로 나가게 된 아리raM이요.”

“차진혁! 이 개자식이!”

김 회장은 들고 있던 지팡이를 바닥에 있는 힘껏 내리쳤다.

하지만 단단한 오동나무 지팡이는 부서지지도 않고 모든 충격을 회장의 손으로 전달했다.

“악!”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나같이 마음에 드는 놈이 없어!”

김 회장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피웠다.

그때 부두목인 뽀글머리가 말을 이었다.

“회장님 상인회 대표라는 놈이 보상금 한 명당 1억 정도 더 얹어주면 합의하겠답니다. 그러면 다른 놈들 합의서도 받아준답니다.”

“뭐 1억! 상가가 15개나 되는데 1억씩이면 15억인데… 네놈들이 쓴 돈만 해도… 아이고 머리야.”

두목과 부두목 둘 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회장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그까짓 15억 더 쓰고 말지. 더 딜레이시키지 말고 줘버려!”

“네.”

회장의 결정적인 대답을 듣고는 뽀글머리가 신속하게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차진혁 두고 보자…….”

* * *

“대표님 말대로 해서 큰돈 벌었습니다. 모두 감사하다고 난리입니다. 그리고 이거.”

김경진이 아침 일찍부터 아리raM 본사를 찾아와 선물을 건넸다.

“뭘 이런 걸.”

“별거 아닙니다. 소고기랑 지역 술 몇 개 준비했습니다. 상인 형님들이랑 누님들 거의 지방에서 올라오신 분들이라 사장님 드리려고 주문했답니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아. 아니다. 다음 주에 회식 한번 하는 걸로 하죠.”

“그래도 되겠습니까? 저희야 좋지만.”

그때 신 디렉터가 슬쩍 내 옆으로 오더니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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