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아이즈를 빠져나왔다.
선택에 따라 물음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나로서 그에게 많은 기회를 제시했다.
생각과 선택은 그의 몫이다.
‘조금 더 지켜봐야겠네.’
가게를 빠져나오는 나를 바라보는 김경진의 눈빛.
그의 눈빛은 아직도 반짝이고 있었다.
* * *
사람들의 눈을 피해.
동대문 상인회 뒤편으로 승합차가 멈추어 섰다.
멈춰진 차에서 조직원들이 하나둘 내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듬성듬성 흰머리가 가득한 뽀글머리에 키가 185 이상에 120kg은 넘어 보이는 일반인의 범주를 넘어선 인물이 내렸다.
“아이고 되다. 나이를 먹기는 먹은 갑서.”
그는 김경진을 두들겨 팼던 사내였다.
“형님. 애들 밥 먹이고 다시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아그들 밥 먹이고 저녁에 한 번 더 휘저어 블자. 이것들 다 조져버려야지. 그래야 무서워서라도 이 근처 발도 못 붙이지.”
그는 동생들을 뒤로하고 큰 형님이 머무는 사무실로 향했다.
“형님. 저 왔수!”
그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낯익은 인물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천 형사님 아니요.”
“오랜만이다. 요새도 여전히 나쁜 짓들 하고 돌아다니네.”
“무슨 말이요. 우리 요새 손 씻고 착하게 살고 있는디.”
“하하하. 미친 새끼.”
천 형사는 어이가 없다며 웃고는 앞에 앉아 있는 조직의 보스에게 말을 이었다.
“사람 다치게 하지 마라. 그럼 우리도 힘 못써준다. 이것만 지키면 크게 관여하지 않기로 반장님이랑도 이야기 끝냈다.”
“감사합니다. 천 형사님.”
“감사는 무슨. 악연도 인연인데 이 정도는 도와줘야지. 공짜로 해주는 것도 아니고.”
천 형사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부두목인 뽀글머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착하게 살자. 형태야. 또 나쁜 짓 하면, 이 동생이 잡아간다.”
“예, 천 형사님….”
천 형사가 사무실을 빠져나가자.
뽀글머리가 소리를 지르며 말을 이었다.
“저 X새끼 내가 담가 불든지 해야지.”
“요새가 옛날 같은 줄 아냐. 조용히 지내라. 이 정도로 도움받는 것도 나쁘지 않아.”
“형님, 근데 저놈은 왜 부른 거요. 저런 놈들 안 끼어도 조용히 끝낼 수 있는디.”
“안전고리 하나 정도는 준비해야지. 애들 잡혀들어가도 우리랑 관계없게 만들어야 할 거 아니냐. 이 정도 푼돈으로 해결할 일이면 아깝지도 않다.”
“고맙수. 형님.”
“고맙긴 우리 사이에. 그래 나갔던 일은 어찌 되었어?”
“가게 부시고 김경진 놈 몇 대 쥐어박기는 했는데. 갑자기 경찰이 출동해서 겨우 도망쳐 나왔수다. 더 조졌으면 합의서 받아낼 수 있었는디.”
“경찰?!”
“야. 경찰 사이렌이 겁나 울리잖소.”
조직의 보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천 형사가 오늘은 그쪽으로 출동 없게 막아둔다고 했는데. 무슨 경찰?”
“네?! 분명 사이렌 소리 들렸는디.”
“그래…. 이상하다.”
* * *
“사장님!”
“어?! 회사로 들어간 거 아니었어요?”
“사장님 두고 제가 어디 가겠어요.”
나한테 화가 나서 회사로 돌아간 줄 알았는데.
웃는 얼굴로 아이즈 가게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보며 의심의 눈초리로 대하자.
제 발 저렸는지 말을 이었다.
“답답해서 동대문 시장 조사 좀 하려고 가는 길이었는데. 조폭들이 우르르 모여서 아이즈를 부수니 마니 하길래 다시 와봤어요.”
“아…….”
“그런데 가게 부수고 난리더라고요, 경찰들도 안 나타나고 해서 제가 해결했습니다.”
“해결?”
“이거요.”
그녀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들어 올려 사이렌 소리가 나는 앱을 켜며 실실 웃고 있었다.
“설마?!”
“그 설마죠. 상황종료!”
그녀의 임기응변 덕분에 큰 사고를 피한 듯했다.
“덕분에 살았네요. 그런데 어떻게 하신 거예요. 소리가 엄청 멀리서 들려오던데.”
“주변 매장에 대형 스피커가 있더라고요. 들어가서 사람 죽는다고 부탁 좀 했죠. 반응 바로 오던데요. 완전 대박.”
그녀는 자신이 히어로가 된 듯 들떠서 말을 이었다.
자신이 그 많은 조폭을 몰아냈다는 생각에 뿌듯해하고 있달까?
“그래서 아이즈 사장은 잘 설득하셨어요?”
“그게….”
“왜요?! 잘 안됐어요. 그럼 협회로 가는 방법뿐이겠네요.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괜히 미련 갖지 마세요.”
“사실 하루 정도 시간을 주기로 했습니다.”
“하루 정도면 뭐.”
“이해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일단 저희는 회사로 들어가죠. 밀린 일부터 처리해야겠습니다….”
“네, 회사로 들어가시죠. 만일이지만 내일까지 결과 안 나오면 저 혼자라도 협회 갈 거예요.”
“네.”
하루의 시간 동안 많은 것이 변할 거다.
나는 신 디렉터와 함께 회사로 돌아갔다.
아시아 패션 어워드 1.
* * *
하루가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와 신 디렉터가 사무실로 들어가자.
MD팀 부팀장인 장희영 과장이 자료 뭉치를 들고 나타났다.
“겨울 시장 의류 매출이랑 가방 매출, 최근 수출 물량, 나라별 소비 정보랑 수입처 조사한 자료입니다. 확인해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겨울 시장 상품은 국내를 뛰어넘어 해외 직구 물량이 상당히 늘어났다.
S/S 서울 패션위크를 지켜본 해외 바이어들의 입김이 작용한 것인지.
해외 프리미엄 샵이나 개인 부티크 매장의 수입리스트가 늘어난 것인지 알고 있어야 했기에.
내가 개인적으로 부탁한 자료들이다.
‘뉴튜브도 상당히 공헌한 듯한데.’
샵으로 들어가는 물량과 맞먹을 정도로 해외 직구량이 상당히 늘어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미국이랑 유럽 쪽에서 수입이 되고 있다라… 좋은 징조인데.”
해외 출하 물량이 늘어나며 매출 상승이 크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입된 나라가 패션시장이 거대한 곳이라는 것은 환호할만한 성과였다.
“해외 매출 상승이 상당하네요.”
“계속 성장할 거라 생각합니다. 지금은 몇몇 샵이랑 개인 고객들이 주를 이루는 정도지만 해외 오프라인매장 오픈, 백화점 입점, 인터넷 판매점 입점까지 새로운 루트만 확보한다면 현재의 10배 이상의 매출 상승이 있을 거라 예상합니다.”
“인터넷 판매점이라… 소호 패션그룹이 필요하긴 하다는 건데.”
“소호 패션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긴 하죠.”
탐나는 시장이기는 하나.
신지혜 일이 해결되지 않는 한은 불가능에 가깝다.
켈링 회장이 막아설 게 분명하기에.
“흠… 보자. 해외 부서랑 인력 좀 늘려야겠는데. 회계팀이랑 MD팀 다 불러주세요. 신 디렉터한테도 전달 부탁드리고 회의 준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나는 복잡한 생각을 정리했다.
아시아 패션 어워드가 머릿속에 가득 차 버린 후.
바로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성하자. 차진혁.”
이제 아리raM이 가야 하는 방향을 결정하고 달려가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몇몇 자료를 확인하고 회의실로 이동했다.
내가 회의실에 들어서자.
모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네요.”
“저희도 방금 왔습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일정에 없는 회의지만 중요한 사항이라서 모두 불렀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과장급 이상 회사를 이끌어 나가는 주요인물들이 모두 모인 회의인 만큼 한마디 한마디 말의 무게가 달라진다.
아리raM은 성장했고 성숙해지고 있다.
이제는 세계시장에 뛰어들어 뛰어난 디자인과 한국의 전통을 인정받을 차례다.
우리는 안정적인 생산라인을 구축했고 명품에 어울리는 품질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다.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일 거다.
더 이상 미룰 이유가 없다.
“김상진 팀장님 현재 사업 진행 비용으로 해외매장 몇 개 정도 오픈 가능한가요?”
“시세에 따라 다르겠지만 조사결과로 봤을 때 파리, 뉴욕, 상하이 메인 상권에 오픈 가능할 정도는 됩니다.”
“국내 매장도 늘리도록 최대한 예산 조절해주세요.”
“네.”
오늘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전달할 차례다.
“MD팀 인원들을 조절해서 해외파견을 했으면 하는데요.”
MD팀은 시장조사에 특화된 팀이다.
그중에 뛰어난 인재를 지부장으로 보내야 한다는 게 내 판단이다.
인테리어와 디스플레이, 광고 등 전담해야 할 분야가 광범위하고 많은 지식이 필요한 파트다.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큰 투자에 더 커다란 리스크를 안고 가야 한다.
“신 디렉터님이 내부적으로 조사한 이후에 저한테 알려주세요.”
“능력이 문제라… 일단 알아보겠습니다.”
“디렉터님이 생각해보고 스카우트할만한 인재가 있으면 알아봐주세요.”
“네, 그것도 고려해 보겠습니다.”
현재 MD팀은 권진호 과장의 퇴사로 큰 공백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을 마크하기 위해 가장 과장급에 가까운 대리급 사원 두 명을 과장 진급시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다.
‘MD팀 인력 공백이 문제가 되네….’
내가 고민하는 순간.
신 디렉터가 큰 결심을 한 듯 손을 들고 나에게 말을 이었다.
“사장님. 제가 파리로 가겠습니다. 제가 가면 확실히 자리 잡을 수 있어요.”
“디렉터님이요?”
“네.”
쉽게 내릴 수 없는 결정이다.
사실 파리에 매장을 오픈해 매출을 기대한다는 건 핑계에 가깝다.
나는 다른 이유에서 파리 진출을 추진하려 했다.
그녀의 본사 부재를 생각한다면 실일까? 득일까?
‘머리 아프네.’
“솔직히 사장님이 한국 본사를 맡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일정 부분은 MD팀 부팀장인 희영이가 제 대신 일을 이어받고 중요한 결정은 사장님이 해주시면 되지 않을까요? 패션위크나 큰일이 있으면 제가 수시로 한국에 들어오면 되니까요.”
“그렇기는 하지만… 하, 신 디렉터님 생각이 정 그러시다면.”
나는 잠시 동안 생각을 정리하고 그녀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MD팀 인원 중에 한 명 더 과장으로 승진시키고 상해로 보내주세요. 정희영 과장님은 한국 팀장으로 승진시켜주시고. 해외지부 발령자분들은 지부장으로 승진시켜주세요.”
“네, 제 의견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 믿고 맡길 수 있어서 좋은데. 파리 쪽은 매장보다는 고급의상점 생디카(syndicat) 가입조건을 맞추는 데 초점을 맞춰주세요. 사실 그 이유에서 밑에 직원 보내는 걸로 생각했으니까요.”
사실 과장급 밑에 사원을 보내.
생디카 가입조건만 충족시키려고 했다.
솔직히 매출을 기대하기도 어렵기에 우리가 성장한 후.
편안하게 생디카에 입성할 수 있는 초석을 다지고 싶었다.
하지만 신지혜가 파리로 간다면 말이 달라진다.
“디렉터님이 간다면 생디카 조건 말고 다른 일들도 해주셔야 해요.”
“저도 알고 있어요. 생각한 바도 있고요. 그래서 밑에 직원들보다 제가 훨씬 나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조금 더 속도를 낼 필요가 있을 거 같아서요.”
“그럼 그렇게 정하죠. 잘 부탁드립니다.”
분명 그녀가 자신감이 가득 찬 눈빛으로 자신을 피력했다.
그렇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작게는 생디카 가입조건과 인맥 관리일 거고 크게는 백화점 입점이나 유명 부티크 판매루트 개척이 될 것이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면 좋겠지만 시간적, 금전적 상황이 도와줄지 의문이다.
‘파리에도 상당한 인맥이 있다면 가능하겠지.’
문득 파리를 떠올리니 그놈이 생각났다.
‘그놈이면 생디카 가입은 바로 가능할지도 모르는데.’
생디카의 떠오르는 신인 디자이너.
바쟐.
현재는 자신의 브랜드 오픈화이트를 운영하며 루이바통의 총괄디자이너까지 겸임하고 있는 놈이다.
상당한 입김을 발휘할 수 있는 놈인데.
‘친구라는 놈이 인생에 도움이 안 돼요. 잘 지내려나.’
* * *
“에취! 누가 내 이야기 하나. 귀도 간질간질하네.”
“갑자기 왜 그래? 감기 걸린 거야.”
“아니. 갑자기 이러네. 근데 이 먼 곳까지는 왜 온 거야? 바쁜 시기일 텐데.”
현재 바쟐과 대화를 하고 있는 인물은 생디카에 가입된 브랜드와 생디카 전체를 관리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서른 후반의 나이에 생디카와 유럽 패션협회에서 상당한 위치에 오른 인물이다.
“로버트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나 바뻐!”
“성격하고는 김서진 디자이너가 없어지니까. 네가 그 성격 물려받았냐.”
“너 말실수인 거 알지. 내 앞에서 서진 이야기는 금물이야.”
바쟐의 눈동자에서 아련한 슬픔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앗. 쏘리쏘리 내가 실수했어.”
“그래서 할 말이 뭔데? 이태리에 있어야 할 인간이 왜 파리에 와서 이 난리냐고.”
“그게 부탁 좀 하려고 이번에 아시아에서 패션어워드 개최하는 데 심사위원이 필요하거든.”
“아시아 패션 어워드라. 노관심이야 귀찮은 거 딱 질색이라고 그리고 현재 스케줄에도 헐떡이는데 아시아 일정까지 어떻게 소화하라는 거야.”
“그건 문제없어. 내가 LVMH 회장님께 잘 말해 뒀으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내 브랜드 일도 많다니까!”
로버트는 곤란하다는 얼굴로 바쟐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내 입장도 생각 좀 해줘. 다올이랑 샤네르 디자이너들은 눈치채고 전화도 안 받지. 다들 책임감이라고는 전혀 없어!”
“켈링 그룹 있잖아. 거기에 부탁해.”
“켈링 그룹에서는 발렌시 총괄디자이너가 참여하기로 했어.”
“그러니까. LVMH 그룹에서는 네가 가야 할 거 같애. 노땅들은 다들 안 간다고 선을 그었거든.”
“아 젠장!”
바쟐은 몇 명 인물들이 떠올랐다.
모두 유명한 디자이너들뿐이고 그나마 자신이 나이도 나이지만 시간적 여유가 있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