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200)

‘분명 부녀라고 했다. 그럼…. 설마….’

신지혜가 파비앙의 딸이라는 이야기인데.

어떻게?

내가 놀란 표정으로 신지혜와 파비앙을 차례대로 바라보자.

파비앙이 격앙된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이었다.

“네놈이구먼 내 딸을 꼬드긴 게.”

“딸? 내가 왜 당신 딸이지. 나는 당신 같은 부모 둔 적 없어!”

“아직도 어리광이냐 언제까지 참아줘야 해!”

“난 당신한테 어리광부린 적도 없었고 만나고 싶은 적도 없었어.”

“그만! 인제 그만 방황하고 켈링 그룹으로 돌아와라. 총괄 디렉터 자리 비워뒀다. 이런 작은 브랜드가 아닌 구짜와 생로, 부테가, 발렌시를 위해 일해.”

“내가 왜 당신들 로열패밀리를 위해 일해야 하지?”

“흠…… 당신이라.”

나는 차가운 분위기에 끼어들 타이밍도 잡지 못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신 디렉터가 왜 해외 진출에 목을 매는지. 이해가 가네.’

이제야 궁금했던 신지혜의 비밀이 풀린 거 같아.

그녀가 강박적으로 유럽과 미국에 브랜드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이유.

꼭 성공해야 한다는 마음마저 파비앙에 대한 복수심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서로 경계하고 있는 파비앙과 신 디렉터를 남겨둔 채.

잔 마르크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자료를 잘 보았습니다. 충분히 런칭이 가능한 조건이더군요. 많은 장인이 참여하고 그걸 현대화해서 명품 브랜드화 했다는 것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좋은 평가 감사합니다. 그럼 소호 패션에 런칭이 가능하다는 거죠?”

“가능합니다. 근데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니….”

그때 나를 죽일 듯이 바라보고 있던 파비앙이 말을 이었다.

“내 딸을 놓아주는 조건이야. 아리raM 같은 작은 브랜드에 있을 그릇이 아니야. 그리고 아리raM은 지혜보다 소호 패션의 힘이 더 필요한 시기 아닌가?”

“…….”

신지혜는 잔 마르크의 조건과 파비앙의 무례한 질문에 화가 치밀어 오른 듯 보였다.

하지만 이 자리는 엄연히 비즈니스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모인 자리이기에 억지로 억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리raM에는 소호 패션이 필요하긴 하지 하지만….’

“거절합니다. 아리raM에 있어서 신지혜라는 사람의 공로가 크기도 하고 그녀가 떠나지 않는다면 저는 그녀와 평생 함께 일하고 싶거든요. 이번 계약은 없던 거로 하시죠.”

“사장님 죄송합… 니다. 일이 이렇게 되어서.”

“죄송할 거 없습니다. 저는 소호 패션보다 디렉터님이 더 중요하니까요.”

그리고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파비앙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방법이 잘못되었어. 돈과 권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는 게 아니야. 진심으로 이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야 했어!”

“…….”

“그리고 하나 더 말하는데. 다시는 신 디렉터 근처에 나타나지 마.”

내 거침없는 충고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파비앙은 순간 고개를 떨구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

파비앙은 신지혜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부… 탁한다. 나를 좀 도와다오.”

“무슨?!”

파비앙의 뻔뻔한 모습이 어느덧 사라지고 정말 간절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간절하게 부탁을 이어갔다.

“정말…. 당신이라는 사람 이기적이야. 내가 당신한테 엄마가 죽어가니 제발! 제발! 잠시라도 와달라고 할 때 당신이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나 해!?”

“…면목 없다. 그때는 그래야만 했다. 회사가 성장기에 있었고 명품들을 흡수하는 시기였어. 큰돈이 필요했고 네 엄마에게 갔다면 나는 이 자리에 없었을 거다.”

“당신은 늘 핑계만 댈 뿐이야. 엄마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았어. 죽을 때까지 당신만을 기다린 엄마를 위해서 당신은 전화라도 해야 했어! 그리고 그 여자 때문에 엄마가 죽은 거나 마찬가진데 그런 여자의 집안 돈으로 성장한 켈링 그룹에서 일하라니. 아버지라고 하는 사람이 어떻게….”

“미안하구나….”

신지혜는 더는 말을 잇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잔 마르크가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 사무실을 나가면 소호 패션에는 평생 런칭할 수 없을 겁니다.”

이딴 소호 패션 런칭 안 하면 그만이다.

플랫폼이 넘쳐나는 세상이고 다른 방향으로 시장을 개척하면 될 일이다.

쉬운 방안이기는 하나.

신지혜의 의견이 더 중요하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내 의견을 기다렸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때 파비앙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말을 이었다.

“지혜야 부탁한다.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아리raM을 무너트릴 수밖에 없을 거다.”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 잠시 당신의 말에 흔들린 내가 바보지.”

“아리raM이 사라지고 다른 브랜드에 간다고 해도 그 브랜드도 무너트릴 거다. 내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파비앙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아까와는 다르게 무게가 실린 이 목소리.

내 가슴마저 두근거리게 할 정도의 무게가 실린 발언이었다.

‘젠장! 완전 개자식이네.’

분위기가 한층 더 무거워지는 가운데.

잔 마르크가 크게 손뼉을 치며 말을 이었다.

“생각났습니다. 곧 있으면 아시아 패션어워드 대회가 열린다고 그러더군요. 아리raM이 거기서 우승하는 조건은 어떻습니까. 아리raM이 우승하면 파비앙은 따님분을 포기하시고 저는 아리raM을 메인 브랜드로 소호 패션에 런칭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우리도 무얼 내놓아야 하겠네요.”

“당연하죠. 내기니까요.”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이다.

자신들의 선에서 해줄 수 있는 건 뭐든지 상품으로 내놓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그런 능력이 뒷받침되어 있지 않다.

내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신 디렉터가 말을 이었다.

“우승하지 못하면 아리raM을 그만두고 켈링 그룹에 들어가겠습니다!”

“오호!”

신지혜의 대답에 파비앙의 표정이 밝아졌다.

마치 벌써 신 디렉터를 얻은 듯한 저 태도.

‘마음에 안 들어.’

그녀는 나를 믿어주고 있다.

그럼 나도 그녀에 기대에 부응해주어야 한다.

“우승이면 되겠습니까? 그럼 깔끔하게 포기하실 겁니까?”

내 질문에 파비앙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걸음 물러섰다.

어차피 이런 조건이 아니라면 신지혜를 얻을 수 없다는 걸 알 것이다.

“좋아. 그렇게 하지.”

우리는 파비앙의 대답을 듣고 소호 패션의 본사 건물을 빠져나왔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아니요. 지켜보니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일인 거 같은데 잘되었습니다.”

“소호 패션이 아니라도 괜찮았을 텐데 괜히 저 때문에 피해가 가는 거 같네요.”

“아니요. 더 큰 시장을 노리려면 소호 패션이 꼭 필요해요.”

동대문 상인 1.

* * *

한국에 도착한 지 한 달이 지난 시점.

아리raM의 겨울 시장 진출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새롭게 만들어진 로고를 맨투맨과 스웨터, 니트에 접목해 좋은 반응을 보이었다.

“뉴튜브 조회 수 200만 넘었습니다. 광고효과가 엄청나요. 그리고 하나 씨 인스타그램도 한몫해주고 있고요.”

“다행이네요. 공식 인스타그램이랑 홈페이지도 잘 관리해주세요.”

“당연하죠.”

런웨이를 따로 열 수 없는 관계로 우리는 SNS를 최대한 활용했다.

화려하지 않지만, 스타일리시한 사람 되기! 라는 콘셉트로 영상이 제작되었다.

도심 속 수많은 인파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아리raM의 겨울 의상을 입고 활보하는 평범한 모습이 담겨 영상이다.

처음과 마지막 영상에는 마치 월리를 찾아서와 비슷한 공중 샷이 길게 나온다.

그곳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월리는 바로 아리raM의 의상을 입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

자극적이지 않지만, 재미와 흥미를 불러일으키며 요 며칠 새 인기몰이를 지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조바심이 나는 건 왜일까?

“이걸로는 부족할 수 있으니까. 마케팅 회사도 알아봐 주세요. 여러 플랫폼에도 광고를 올리도록 하죠. 아시아 어워드 한국 대표 심사 전에 최대한 매출 끌어 올려야 합니다.”

“지금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가방매출이 어마어마합니다. 도형 백 세트가 벌써 3만 개 예약이에요. 출하도 벌써 5천 세트 했고요. 가방 개수로 따지면 12만 개가 나갈 예정입니다. 그리고 온리 원 백과 시크릿 백도 판매량까지 계산하면 엄청나요.”

“아직 부족합니다. 안전하게 가길 원해요. S/S 시즌 의상 판매가 현재 더딜 테니 겨울 시장에서 최대한 끌어 올려야 합니다.”

“설마 저 때문에…….”

“아니에요. 제가 원해서 한 일인데요. 부담가지지 마세요. 이번 일은 다른 분의 부탁도 받은 터라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네….”

“그럼 가서 일 보세요.”

* * *

11월 말이 되자.

아시아 패션 어워드에 관한 정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역시 브랜드 이브의 나나세 디자이너가.

중국에서는 차세대 브랜드인 타이거의 총괄디자이너인 장료이가 나온다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현재 한국에서는 어떤 브랜드의 디자이너가 나올지가 화두다.

언론은 누가 한국 대표로 나갈 건지에 대한 찌라시를 모으는 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오늘 드디어 심사 결과 날이네요.”

“할머니 말에 따르면 경쟁이 장난 아니래요. 신인 디자이너랑 신생브랜드만 참여했는데도 100군데가 넘는다네요. 아 그리고 제너락이랑 이안섭 하우스도 서류 제출했어요. 양심 없는 것들. 사장님은 긴장 안 되세요?”

“긴장되죠.”

나는 무미건조하게 내 마음을 표현했다.

긴장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지만 자신이 있었다.

‘설마….’

문명진과의 약속 그리고 프랑수아즈 파비앙의 거래가 이번 결과에 따라 시작이 될지 결정되는 사항이다.

그런 이유에 판매량을 올리기 위해 한 달 동안 광고와 홍보에 쏟아부은 돈만 해도 수십억 단위가 넘어선다.

데이터를 봤을 때.

아리raM 보다 한해 성과가 좋은 신생브랜드는 없다.

가장 강한 경쟁상대인 제너락이 오트 쿠튀르와 S/S 컬렉션을 망쳤다.

그리고 YK어패럴 소속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안섭 하우스도 크게 성과를 내지 못한 상태.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가 가장 좋은 성과를 낸 브랜드일 거다.

* * *

한국 패션협회.

박주선의 요청으로 공개적으로 아시아 패션 어워드 한국 대표 심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트 쿠튀르 대회 비리 사건으로 인해 실추된 패션협회의 이미지를 회복하자는 취지인 듯했다.

‘이번에 패션협회의 청결함을 보여야 해.’

심사 방법은 지원한 서류를 한 공간에서 오픈해 여러 명의 전문가가 개별심사를 한 후.

합한 점수가 가장 높은 브랜드가 1등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역시 한 해의 매출.

가장 자료화되어 있고 소비자가 원하는 디자인이 바로 매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아…. 피곤하네. 지금 몇 시지?”

“오전 10시입니다. 회장님 들어가서 좀 쉬시죠. 밤을 꼴딱 새우셨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체력이 말이 아니고만.”

그녀가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 서류를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모두 그녀의 행동에 군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70세가 넘은 그녀가 밤을 새워가며 일을 하는데 누가 군소리를 낼 수 있겠는가.

그때.

누군가의 배에서 알람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밥은 먹이고 일을 시켜야 하는데 미안하네.”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다들 아침 먹고 점심때까지 좀 쉬다가 다시 일하자고.”

“네.”

모두가 시끌벅적하게 심사장을 빠져나갔고 박주선도 비서진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때.

바닥에 떨어져 있는 서류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뭐지?”

그녀는 허리를 굽혀 서류 한 장을 들어 올리는데 스치듯 본 내용이지만 그녀의 눈에 정확하게 무언가가 들어왔다.

“왜 그러세요?”

“아니야. 먼저 식당에 가 있어.”

박선주는 모두를 사무실에서 내보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흠 이걸 어쩐담….”

옆에 있던 김 비서가 내린 현재까지의 점수를 통합한 브랜드별 자료.

아직 전체적인 자료가 정리된 게 아니지만, 순위에 자신이 생각했던 브랜드가 아닌 다른 브랜드가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머리 아프게 됐네.”

대통령 문명진이 패션협회 회장에게 은밀히 전달한 내용도 있었기에.

근심은 커져만 갔다.

“동대문 브랜드가 이만큼의 성과를 내다니 또 다른 면에서 대단하다 해야 하나. 차 사장도 머리 아프겠는데.”

* * *

동대문 청년 상인연합회.

연합회의 주축이 되는 3명의 디자이너와 2명의 상인이 한자리에 모였다.

현재 공모 중인 아시아 패션대회 한국 대표를 선출하는 신청서를 내기 위해서.

“매출을 한군데에 몰아서 대회 신청자료로 제출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러면 웬만한 중소기업 정도의 매출이 나올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에 몰아주는 거지. 나쁘지 않은 방법이긴 하네.”

“이런 편법으로 정말 괜찮겠어?”

“형님 걱정하지 마세요. 한국 대표로만 뽑히면 그놈들도 우리 못 건드리고 유명세 치러서 장사도 더 잘될 겁니다.”

“맞는 말이기는 한데 찝찝해. 이게 정말 안 걸리겠어?! 괜히 이미지만 나빠질까 봐 무섭네.”

“절대 안 걸릴 겁니다. 그 많은 브랜드를 뭐 찾아다니면서 평가하는 것도 아니고 현금 결제가 많은 도매업이라 한쪽에만 잘 몰아주면 절대 걸릴 거 없습니다.”

김경진이라는 이 청년의 말에 4명의 젊은 상인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이 주축이 되어 이 상황을 이끌어갔다.

김경진이라는 디자이너는 왠지 모르게 욕심과 야망이 있어 보였다.

당연히 욕심이 날 수밖에 없는 대회다.

한국의 대표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인지도와 브랜드의 이미지가 바뀔 수 있기에.

“정말 살길은 이거뿐이에요. 저희가 무슨 힘이 있어서 가게를 지켜요. 경기도 엉망인데.”

“하…….”

동대문 한국패션의 심장이라고 하는 이곳.

가장 중심이 되는 센터를 조금만 벗어나도 주위에 엄청난 수의 개인 디자이너 매장과 보세 상인들의 매장이 존재한다.

이들 대부분 자신의 디자인을 싼값에 도매로 넘기며 생계와 꿈을 이어간다.

* * *

― 아시아 패션 어워드 한국 대표 아이즈!

― 동대문의 청년 디자이너 김경진의 반란.

― 또 다른 신성 디자이너.

― 대기업과 명품의 매출을 뛰어넘는다?

― 한국 대표 아이즈 대표는 누구?

아침 일찍부터 수많은 언론에서 자극적인 뉴스를 내보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신지혜가 버럭 화를 내며 모니터 화면을 꺼버렸다.

그 모습에 미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때 류미리가 일어나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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