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가격은 어떻게 할 거지? 자네 브랜드는 상당히 고가의 의상과 가방을 판매하지 않나. 우리는 남녀노소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영 캐쥬얼 브랜드야 자네 브랜드의 소비가에 맞춘다면 매장에 전시 자체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어?”
가장 큰 문제가 이제부터다.
다올과 나이크의 협업은 다올에 중점을 두고 고가로 측정이 되었다.
그리고 오픈 화이트와 나이크의 협업은 나이크에 중점을 두고 저가 가격이 측정되었다.
어떤 면이 더 많은 이득을 줄지는 모르나.
브랜드의 이미지와 상황에 가장 적합한 가격 측정법을 적용했다고 볼 수 있다.
“저는 토미 브랜드의 가격에 맞출 생각입니다.”
“네?!”
그때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지혜가 화들짝 놀라며 말을 이었다.
“사장님 그건…. 원가 차원에서 맞지 않습니다. 손해예요 손해! 아리raM에 들어가는 장식만 생각해도 모두 수공예품이 많습니다. 만일이지만 대량 생산에 들어간다면 수량도 수량이지만 가격이 비싸질 수밖에 없는데.”
신지혜 말이 맞는다.
하지만 현재의 아리raM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우리 브랜드의 미국에서의 입지를 생각한다면 제로에 가깝다.
그런 이유에 한정판이 아닌 대량으로 전 세계 토미 브랜드에 뿌려진다면 엄청난 홍보 효과를 볼 수 있다.
아리raM이라는 브랜드를 알릴 좋은 기회.
그리고 또 다른 이점이 존재한다.
“손해는 아니에요. 수백 수천억이 드는 홍보비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고 생산설비를 함께 공유한다면 생산까지도 도움받을 수 있어요. 나쁜 방향은 아닙니다. 그리고 디자인에서 원가를 절감하면 됩니다.”
“생산설비를 공유한다는 게…. 분명 퀄리티에서 차이가 날 것입니다. 대량생산설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시잖아요.”
“우리 공장에서 만드는 제품과 토미의 공장에서 만드는 상품을 나누면 됩니다. 그리고 토미의 브랜드의 상품 질도 나쁘지 않으니 걱정할 거 없습니다.”
신지혜는 내 이야기를 듣고는 한 발 물러섰다.
그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게 얼마나 큰 기회인지.
나는 잠시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신 디렉터의 말도 일리가 있어. 우리가 추구해오던 고퀄리티의 프리미엄 상품의 이미지와는 맞지 않아.’
잠시 토미 힐피거라는 거대한 인물.
그 그림자에 현혹이 된 듯.
내 생각의 폭이 좁아져 있었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모든 이익을 토미가 가져도 좋습니다. 그 대신 다른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봐. 내가 납득이 간다면 허락하지.”
“브랜드가 아닌 토미 힐피거 당신과 협업을 하고 싶습니다.”
순간 사무실 전체에 적막이 깔리며 놀란 신지혜와 톰 브레드가 나를 소리 없이 바라봤다.
‘최선이야! 밀어붙여야 해.’
대량이 아닌 소량의 한정판 협업. 고가의 정책으로 나간다면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조건이 완성된다.
“아리raM과 토미 힐피거의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고 싶습니다. 콜라보레이션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내 말에 모두가 놀라고 말았다.
어떤 누구도 토미에게 이런 조건을 제시한 적이 없을 것이다.
그때!
“하하하!”
순간 토미 힐피거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인제야 내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는구먼. 만약에 내가 가진 브랜드의 인지도를 욕심냈다면 나는 거부했을 거야. 하지만 이제 나와 함께 설 생각이 들었나 보군. 자네 정말 마음에 드는구먼.”
그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거 같았다.
현재의 브랜드를 발전시키기보다는 새로운 브랜드를 만드는 거 같았다.
그것도 명품이라는 프리미엄 브랜드를.
‘그러고 보니 토미 그룹의 브랜드는 대부분 영 캐쥬얼과 spa 브랜드가 주류이긴 하지.’
어쩌면 그의 꿈도 마지막은 명품 브랜드를 가진 디자이너로 기억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번 기회에 나도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되었구먼.”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우리는 오랜 시간을 들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브랜드를 만들기 위한 과정은 토미가 알아서 하기로 했다.
토미의 의견으로 나는 공동창업자이자 총괄디자이너 직을 수행하기로 결정 났다.
능력 있는 젊은 디자이너의 힘이 필요하다는 그의 간곡한 부탁에서 이루어진 결정이었다.
나는 그의 의견을 존중했다.
‘손해는 절대 아니야.’
이건 참여만으로도 아리raM에 대한 홍보와 시장 확장성을 키울 수 있었다.
그리고 공동창업으로 만들어진 브랜드가 큰 성장을 이룬다면 분명 더 큰 이득을 가지고 올 것이다.
‘어떤 디자이너가 미국의 데님 황제와 공동브랜드를 운영하겠어.’
* * *
잔 마르크는 뉴욕을 떠나 파리에 도착했다.
그와 비서는 파리에 도착하는 동시에 켈링 그룹의 본사로 향했다.
“안 만나 줄려고 해서 들은 이야기 전달하니까 버럭 화를 내면서 바로 만나자고 하더라고요.”
“영감탱이 성격 여전한가 보군.”
“들리는 소문으로 켈링 그룹 내에서 경영권 다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파비앙의 입장이 곤란한가 봐요. 몇 개 브랜드 매각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랑 계약을 미루는 건가?”
“그건 가봐야 알 거 같습니다.”
“정확한 내막을 알아야 할 거 같은데. 다른 정보는 없어?”
“그게…. 가족 간의 경영권 다툼이라는 소문도 있어서.”
“가족 간? 설마…. 그 망나니 놈들이 이제는 파비앙의 심장에 비수를 겨눈 건가? 그런 능력이 없는 놈들인데 어떻게?”
“현재 켈링 그룹과 LVMH 그룹에 엄청난 자본금이 흘러 들어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거랑 연관이 있을 거 같습니다.”
“오호 그래…. 잘못하다가는 우리에게도 영향이 있을지 모르니까. 깊숙이 알아봐.”
“네.”
“우리는 우리 일을 해야지.”
잔 마르크는 차에서 내려 켈링 그룹 건물 최상층의 마천루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엘리베이터를 내려 파비앙이 머무는 사무실로 이동하려는 그때.
파비앙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식식거리며 사무실을 박차고 나타났다.
“무슨 일이야?!”
잔 마르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스쳐 지나가는 둘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왠지 상황이 안 좋을 때 찾아온 거 같군.”
잔 마르크는 활짝 열린 문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똑똑!
그 소리에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파비앙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쁘시면 다음에 오겠습니다.”
“하…. 아니야 앉아.”
파비앙은 지친 모습으로 잔 마르크를 맞이했다.
“지쳐 보이시네요.”
“별거 아니야. 그래 지혜를 봤다며 어떻게 된 거야?”
“아 비행기에서 잠시 마주쳤습니다. 젊은 남자 디자이너와 함께 있더군요.”
“하…….”
“현재 파비앙의 딸이 일하고 있는 브랜드도 계약 추진할까 생각 중입니다.”
잔 마르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파비앙이 손을 올리며 그의 말을 저지했다.
“잠시만! 뭐라고?”
“아리raM이라는 브랜드를 소호 패션에 입점시킬 생각입니다.”
“그놈의 브랜드가 거기에 들어갈 수준이 된다는 말이야?”
“뭐 차후겠지만 보고서를 받아보니 나쁘지 않더군요.”
“만약 그놈 브랜드가 소호 패션에 입점한다면 우리 그룹 브랜드는 모두 철수시키겠어!”
“그건 안 되죠. 저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잔 마르크는 여유로운 태도로 격앙된 파비앙을 대하고 있었다.
“넌 어릴 때나 지금이나 마음에 안 들어.”
“저는 마음에 드는지 아세요.”
“그래서 만나자는 이유가 뭐야?”
“당연한 걸 구짜랑 부테가, 발렌시 계약연장 해주시죠. 계속 미루면 서로 피해입니다. 데이터를 보니 소호 패션의 매출이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데 왜 계속 미루시는 겁니까!”
파비앙은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번 기회에 자신이 원하는 일을 진행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거 알아 소호 패션에서 20%의 매출을 차지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소호 패션의 매출 절반은 켈링이 차지하고 있지.”
“그래서요.”
“조건이 있어. 들어주면 계약 연장해주지.”
“조건? 하…. 뭔데요? 들어나 봅시다.”
“하나는 내 딸이 그 회사에서 그만두게 하는 거고 둘째는 내 딸을 빼돌린 원흉 같은 놈! 그놈을 봐야겠어.”
“원흉? 설마 아리raM 대표?”
“그래!”
현재로서 세 브랜드의 계약연장과 아리raM의 새로운 계약을 놓고 저울질한다면 당연히 켈링의 세 개의 브랜드다.
잔 마르크는 계산이 끝나자.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뭐 저한테 손해 볼 거 없다면 언제든지요.”
“재수 없는 새끼. 꺼져!”
“네, 네. 갑니다.”
소호 패션 2.
* * *
미국 일정을 모두 소화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토미 힐피거와 새로운 브랜드 런칭은 내년으로 일정을 조정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커졌다.
기존의 오프라인 매장 리뉴얼과 온라인 시장까지 한 번에 진행하려는 듯 보였다.
‘역시 자본이 뒷받침되니까. 순식간에 거대해지네.’
토미와의 일은 순조롭게 흘러가는 와중 다른 곳에서 일이 터지고 말았다.
소호 패션의 문제점이 나와 신지혜의 앞을 가로막았다.
엄청난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도박에 뛰어들고 만 것이다.
“괜찮을까요? 아빠가 저렇게까지 나올지는 몰랐네요.”
“해보는 데까지는 해봐야죠. 국제대회이니 방해는 없을 거니까요.”
“그럼 다행인데.”
나는 걱정하는 신 디렉터의 어깨를 두드리며 잠시 긴장을 내려놓으라며 위로했다.
“미국 시장 조사한 건 어때요?”
“한인타운 쪽에 도움을 요청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요. 스티븐 홍이라는 사람이 동대문시장처럼 의류타운을 운영하고 있는데 자리가 워낙 좋아서 명품 브랜드도 입점을 시도한다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미팅을 잡아보려고는 했는데 일정이 맞지 않는다며 거부당했어요.”
“미국지사부터 만드는 게 좋을 거 같네요. 미국으로 첫 표적을 정했으면 지사를 두고 정보를 얻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네,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좀 쉬세요. 미국에서 너무 일만 했네요.”
“네. 저는 좀 잘게요.”
내 옆에서 잠든 그녀를 바라보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잘못하다가는 가장 믿고 내 옆에 두고 싶은 사람을 잃을지도 모른다.
‘신 디렉터가 파비앙의 딸일 줄이야….’
* * *
나는 잔 마르크의 미팅 제안으로 뉴욕지사의 소호 패션으로 향했다.
“여기인 거 같네요.”
“생각보다는 허름하네요. 이런 곳에서 매년 십억 달러 가까이가 왔다 갔다 한다니 새삼 놀라워요.”
“온라인 매장의 힘이죠. 물류창고에서 모든 물품이 입고와 출하가 되는 원리이니.”
우리가 마침 사무실에 들어서니.
잔 마르크의 비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 오셨어요. 환영합니다.”
그녀는 매혹적인 눈을 가지고 있었고 찰랑거리는 단발이 관능미를 더해주었다.
“감사합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네.”
우리는 그녀의 안내를 받으며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
“인원이 상당하네요.”
“뉴욕지사가 메인이라서 더 그런 느낌이 강할 겁니다. 여기는 작은 일에서 큰일까지 모두 처리합니다. 그리고 층으로 나누어서 2개의 사이트를 더 운영하고 있죠.”
우리가 한중간을 가로질러 가는데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만큼 바쁘다는 이야기.
수십 개의 명품 브랜드와 유명브랜드를 모두 관리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외관이랑은 완전 딴판이기는 하네요.”
“그러게요.”
“오래된 건물이긴 해요. 처음에는 한 층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이 건물을 매입했고요. 현재는 전체를 다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내부의 크기가 내가 생각했던 크기보다 훨씬 넓었다.
“여기입니다. 들어가 보시죠.”
“네.”
나와 신지혜가 사무실로 들어가자.
낯익은 인물이 내 눈에 들어왔다.
“프랑수아즈….”
작은 목소리로 말했기에 그 장소에 있는 누구도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저 인간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내 기억 속의 프랑수아즈 파비앙은 LVMH 영감만큼이나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다.
오래전 투자 건으로 만난 적이 있는 인물이다.
그는 어린 시절 나에게 모진 말과 내 가치관을 흔드는 발언을 아끼지 않은 인물로 내 기억 속에는 아주 나쁜 놈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런 인물이 잔 마르크와 함께 앉아 있다니 의아한 상황이다.
“…….”
“디렉터님?”
신지혜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마치 분노에 가득 차 있는 표정으로 파비앙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잔 마르크가 분위기를 바꾸어 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맞이했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신지혜는 고개를 돌려 잔 마르크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당신 짓이지!”
“부녀 상봉에 기여는 했지만 저는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 부른 겁니다. 공과 사는 구분하시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그녀는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바라보곤 한숨을 내쉬며 소파로 이동했다.
잔 마르크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고 나는 아직도 멍한 상태에서 등이 떠밀리듯 그녀 옆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