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103/200)

“저는 그런 남자 별로던데. 그럼 아까 옆에 있던 여자가 설마!?”

“무슨! 그녀는 20년 전에 병으로 죽었어. 어쩌면 이번 일이 재미있게 흘러갈지도 모르겠네.”

순간 잔 마르크 로셰트는 코를 계속 문지르며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내 코가 얼마나 정확한지 알지. 그 디자이너의 디자인과 그 여자한테서 돈 냄새가 풀풀 풍겨 왔단 말이야. 그 찐하고 울렁거리는 돈 냄새의 향기가 나를 흥분시키고 있어.”

비서는 흥분해 차 있는 잔 마르크의 눈을 바라보며 설레기 시작했다.

그녀는 잔 마르크의 이런 표정을 볼 때마다 오르가즘이 느껴졌다.

“정신 차려야지!”

“뭐?”

“아니에요! 얼른 가요. 본사 업무 금방 해결하고 파리로 이동해야 하니까요.”

“그래, 그래 가자고. 일복이 터졌지 내가!”

그녀는 당차게 걸어가는 잔 마르크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자신에게 돈을 안겨줄 거 같은 사람과 돈을 잃게 만드는 사람을 가리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능력으로 지금의 사업을 이렇게 크게 넓힐 수 있었다.

또 잔 마르크는 중간이 없는 사람이다.

돈을 안겨줄 부류에는 간이고 쓸개고 내줄 듯 정성을 다한다.

하지만 자신에게 불이익이 될 거 같으면 어떠한 높은 위치의 사람도 매몰차게 버리는 사람이다.

‘그 젊은 디자이너는 어느 쪽일까?’

비서의 궁금증이 깊어갈 때쯤.

멀리서 잔 마르크가 질문을 해왔다.

그녀는 얼른 그에게 달려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뭐 해?”

“잠시 생각 좀 한다고요. 왜요?”

“별건 아니고 파리 가는 김에 파비앙에게 연락해둬, 이번 주 안에 파리에서 보자고 거부할 때는 지금 있었던 일 상세하게 전달해.”

“네.”

“슬그머니 나를 피하는 거 같은데. 이번에 만나면 저번에 못 했던 브랜드 계약연장도 말해보자고 잘 들어줄 거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잔 마르크는 흥미롭다는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공항을 빠져나갔다.

그때 조용히 속에 있던 마음을 입 밖으로 뱉어냈다.

“빨리 자료를 보내줬으면 좋겠는데. 궁금해 죽겠네.”

* * *

우리는 호텔에 도착한 이후부터 분주하게 토미 힐피거를 만날 준비를 했다.

준비한 자료를 정리하고 신상 의상과 히트 가방을 커다란 여행용 가방에서 꺼내 정리했다.

“내일 분명 비즈니스적인 방안을 제시할 겁니다. 마냥 초대로만 끝날 거 같지 않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의 초대로 뉴욕을 방문했지만, 막연하게 우리를 불렀을 거로 생각하지 않는다.

사업가의 시점에서 우리를 초대했다면 분명 또 다른 제시안을 보여줄 거라 믿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준비된 브랜드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서로가 윈-윈 할 수 있는 정보와 방향 그리고 목표를 보여주어야 한다.

.

.

.

뉴욕의 첫 번째 밤이 분주하게 지나갔다.

다음 날이 되어 조식을 먹고 있는 내게 신지혜가 뾰로통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최악이에요!”

“무슨?”

“잠을 한숨도 못 잤어요. 이러면 화장도 잘 안 먹는데…….”

“아…. 난 또 뭐라고.”

“사장님! 이게 얼마나 중요한데요. 첫 느낌이 좋아야 사업적으로도 성공할 확률이 올라간단 말이에요.”

“네, 네. 그럼 호텔에서 쉬고 계세요. 사업은 제가 하도록 할게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상대가 토미 힐피거예요. 한 번은 꼭 보고 싶단 말이에요.”

나는 어깨를 들어 올리며 어떻게 해줄 게 없다는 표현을 간접적으로 했다.

그리고 신지혜의 투정을 더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여러 가지 일들이 겹치는 바람에 머리가 복잡한 상태다.

‘얼른 피해야지.’

나는 먹다 만 그릇을 남겨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식사 마저 하시고 2시에 로비에서 만나요.”

“네…….”

사실 나도 긴장하지 않은 건 아니다.

상대는 미국을 대표하는 영 캐쥬얼의 토미 힐피거다.

말이 영 캐쥬얼이지 모든 연령을 아우르는 브랜드다.

명품이라는 수식어는 붙어 있지 않았지만, 이태리의 켈링그룹의 파비앙이나 프랑스의 LVMH그룹의 회장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사람이다.

“그 영감들이랑은 달라야 할 텐데….”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방으로 향했다.

* * *

노랑머리와 흰머리가 뒤섞인 노신사가 가죽 소파에 앉아.

누군가와 즐거운 대화를 이어갔다.

“어때?”

“네? 뭐가.”

“어제 본 녀석 말이야. 어떠냐고.”

“아…. 차진혁 디자이너요? 보스가 불렀으니 더 잘 아실 건데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그런 자료 말고 사람 대 사람의 느낌 말이야.”

“흠…. 뭐랄까.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때까지 본 디자이너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특별한 건 없었습니다.”

“다른 느낌이라 구체적으로 말해봐.”

토미는 양손을 깍지 끼며 궁금하다는 듯.

얼굴을 책상 쪽으로 내밀기 시작했다.

“동양 사람이라 그런지 건방지지도 않았고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지도 않더군요. 그리고 화려한 의상을 입고 나타나지도 않았어요. 정말 그게 가장 마음에 들더군요. 보통 보스가 초대하는 디자이너들은 겉멋만 가득 들어서는 늘 건방져 보였는데 말이죠.”

“그런가. 너무 겸손해도 못쓰지 나를 보러오는데 자신이 디자인한 의상을 걸치고 온다는 건 그만큼 디자인에 자신 있다는 걸 표현하는 거니까.”

“그건 그렇지만….”

“깐깐한 자네의 평가가 박하지 않다는 게 신기하기는 하네. 그럼 오늘 기대할 만하겠는데.”

“설마 이번에 또……. 그냥 초대로 끝내시죠.”

“무슨!”

“또 실망하셔서 한두 달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실 거면 하지 마세요.”

“…….”

톰 브레드는 자신의 보스를 바라보며 걱정에 휩싸였다.

능력이 있는 디자이너를 초대한 게 벌써 50번째가 넘어간다.

그리고 토미는 자신의 인지도를 이용해. 무명에 가까운 디자이너들에게 세계 정상의 자리를 맛보여 주었다.

왜 이런 귀찮은 일을 매번 하는지 그 이유를 20년이 넘게 일한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이제 가보겠습니다.”

“그래. 조심히 갔다 와.”

톰 브레드가 무거운 엉덩이를 소파에서 떼 내자.

토미도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톰이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걸 본 후.

천천히 자신의 책상 맨 마지막 서랍을 슬쩍 열어 보았다.

“이걸 물려받을 놈이 이렇게도 없단 말이야!”

* * *

2시가 살짝 넘어갈 때쯤.

호텔 앞에 고급 세단 한 대가 우리 앞에 멈춰 섰다.

그때 차 문이 열리고 톰 브레드가 나타났다.

“나와 계셨군요. 일단 차에 타시죠.”

“네.”

그는 어제와 같이 밝은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Ms 신은 잠을 못 잤나 봐요? 많이 피곤해 보이네요.”

“네, 조금. 토미를 만날 생각에 너무 긴장했나 봐요.”

“하하하.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토미는 어려운 사람이 아니에요. 친구 같은 사람이죠. 그리고 숙녀들에게 항상 배려와 미소가 끊이지 않는 신사랍니다.”

“그래요. 그럼 다행인데. 그래도 상대가 토미 힐피거인데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잖아요.”

“그런가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잠시라도 눈 좀 붙이세요. 뉴욕의 거리는 늘 막히니까 가는 데 최소 40분 이상 걸릴 겁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앞자리에 있는 담요를 신지혜에게 전달하며 짧은 미소를 내비쳤다.

톰의 말에 나도 두근거리는 마음을 어느 정도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에게 살짝 무거운 질문을 던져 보았다.

“톰 근데 토미가 우리를 초대한 이유가 있을 거 같은데 혹시 아시는 거 있습니까?”

“흠…. 그건 토미를 만나서 듣는 게 좋을 거 같네요.”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별말씀을. 근데 한 가지는 말해드리죠. 손해 보실 일은 없을 겁니다. 토미는 미래를 중시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능력이 있는 디자이너를 좋아하죠. 이렇게 초대된 것만으로도 차 디자이너는 그에게 인정받은 겁니다.”

톰 브레드는 막혀있는 도로를 응시하며 이때까지 이곳에 초대된 디자이너들을 떠올렸다.

켄조, 갈리아오, 미켈레, 시나문 등.

그들 모두 현재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의 수석디자이너가 되었거나.

자신의 이름을 건 준명품 브랜드를 운영 중이다.

그만큼 토미 힐피거의 눈썰미와 인재를 보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렇게 우리는 꽉 막힌 뉴욕의 시내를 지나가고 있었다.

.

.

.

“다 왔습니다.”

45분가량을 달려 겨우 토미 힐피거의 본사 건물 앞에 차량이 멈추어 섰다.

“고생하셨습니다.”

“별말씀을요. 제가 할 일인데요. 같이 올라가시죠.”

“네,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토미 힐피거의 웅장한 본사 건물에 살짝 주눅이 들면서도 대단함을 느끼고 있었다.

“와 우리 사옥보다 10배는 큰 거 같은데요.”

“10배요? 20배는 더 클 거 같은데요.”

토미 힐피거의 본사 1층과 2층은 토미 그룹의 여러 브랜드 오프라인 매장이 운영 중이다.

정말 어마어마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규모의 오프라인 매장들.

“런던의 바바리 매장보다 더 큰 거 같네.”

“그러게요. 진짜 대단하긴 하네요.”

우리는 톰의 안내를 받으며 토미가 머무는 건물의 상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며 문이 열리자.

우리 앞에 미국의 거장 디자이너인 토미 힐피거가 마중 나와 있었다.

“어서 와. 환영하네.”

“네. 안녕하세요.”

내가 잠시 멈칫하며 당황스러워하자.

토미는 환한 미소로 내 어깨를 감싸 안고 나를 끌어당기며 사무실로 향했다.

“이렇게 잘생긴 디자이너는 또 처음이네. 모델인지 알았어.”

“과찬이십니다.”

“긴장 좀 풀어. 나는 자네 같은 디자이너를 좋아해 긴장할 필요 없어. 그리고 자네가 만든 데님디자인에 반해버렸어! 팬이 된 거 같단 말이지!”

그의 극찬에 내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는 이 두근거림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김서진의 삶을 살 때 만나본 LVMH그룹의 회장이나 켈링그룹의 회장을 만났을 때도 이러지 않았는데 왜 이러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근데 너무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네, 말씀하세요.”

“이번 메인 의상 중에 데님과 실크를 함께 사용해서 만든 의상 말이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낸 거야?”

“아…. 그게. 의미를 부여한 겁니다.”

“의미라?”

“실크는 귀족, 부유층의 상징이라면 데님은 노동자와 서민, 자유, 억압의 상징이기에 둘을 섞은 겁니다. 모두가 아울러 사는 세상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와우! 내가 생각했던 부분과 비슷하군. 아주 좋아.”

나와 신지혜가 토미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고풍스러운 모습의 사무실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고가구의 냄새가 사무실 가득 퍼져 있었고 낡은 소파와 오래된 집기들이 가득했다.

모두 최소 몇십 년은 되어 보일 정도로 낡고 허름해 보였지만, 그 속에서 세월이라는 아름다움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앉아. 이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보자고.”

“네?!”

“설마 내가 오라고 해서 나랑 몇 마디 대화나 얼굴만 보고 갈 생각은 아니겠지? 디자이너이지만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CEO라면 시간을 들여 이곳까지 온 이유가 있을 거 아닌가. 내가 기회를 주었으니 나를 잘 구워삶아 봐.”

역시 내 생각이 적중했다.

“물론이죠.”

“좋아. 이제야 긴장이 좀 풀리나 보고만 나는 젊은 디자이너의 그런 눈이 좋아.”

소호 패션 1.

* * *

기회.

공교롭고도 가장 알맞으며, 보람 있는 고비. 적당한 때.

가장 적절한 시기.

만약 토미 힐피거의 힘이 보태진다면 세계적인 광고 효과와 레전드의 인지도를 등에 업고 브랜드를 세계시장에 알릴 수 있다.

“제가 생각한 건 협업입니다.”

“협업이라…. 요즘 들어 명품과 유명브랜드 간에 많이 하는 그거 말하는 건가?”

“맞습니다. 바쟐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오픈 화이트와 나이크의 신발 콜라보레이션, 루이바통, 사까이 등 여러 브랜드가 나이크의 전통 있는 스니커즈의 감성을 집어넣어 엄청난 성과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다올도 마찬가지로 한정판 조던 시리즈를 출시해 엄청난 붐을 일으켰죠.”

“흠….”

“이런 협업의 시너지로 오픈 화이트는 나이크의 인지도 덕분에 더욱 성장했고 나이크도 오픈 화이트의 시너지로 큰 매출을 얻었습니다.”

“협업이라는 게 잘만 한다면 서로에게 득이 되겠지만 잘못하다가는 한쪽만 이득이 되는 일이 많단 말이야. 자네 브랜드가 오픈 화이트만큼의 브랜드 파워가 있지는 않은 거 같은데.”

맞는 말이다.

바쟐의 브랜드 오픈 화이트는 현재 엄청난 인지도를 가진 브랜드로 성장했다.

‘내가 반은 도와준 거였는데….’

토미는 생각 외로 브랜드 간 콜라보레이션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렇다면 그를 설득해야 한다.

내가 생각한 최선의 방법이기에.

“새로운 도전이라…. 선뜻 받아들이기는 힘들구먼.”

현재 자신에 손에 들고 있는 무기와 방패가 더 강하고 단단하다는 걸 알고 있기에 나를 더 몰아세우는 것일까?

“분명 그럴 겁니다. 하지만 현재 데님과 토미의 브랜드는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그의 아픔을 건드리며 파고들었다.

단단한 방패일지라도 오랜 세월에 무뎌지고 녹슨 부분을 날카로운 송곳니로 파고든 것이다.

현재 토미 자신과 함께 성장한 데님 브랜드는 녹슬고 무뎌져 있다.

변화 없는 디자인과 오랜 세월에 찌들어 있는 아이템들뿐이다.

이곳에 변화만 준다면 브랜드를 떠나간 고객과 새로운 변화를 바라는 고객들이 다시 토미의 브랜드를 찾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하. 오랜만이네! 이런 쓴소리 말이야.”

“죄송합니다. 하지만 진실입니다.”

“아냐 아냐. 근데 말이지 자신감으로 해결될 사항은 아닌 거 같은데 가능하겠나?”

“그게 무슨?”

“세월이 오래된 만큼 기존의 디자인을 선호하는 고객들도 존재하지. 우리가 왜 디자인을 바꾸지 않았냐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은 없나?”

“…….”

나는 순간 둔기에 머리를 맞은 양 머릿속이 백지장으로 변해버렸다.

간과한 사실.

토미의 브랜드는 최소 40년 이상이 된 브랜드다.

그리고 여러 나라의 체인만 합쳐도 몇천 개가 넘어갈 것이다.

그 말인즉 새로운 디자인으로 고객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기존의 디자인으로 기존 고객을 지키고 조금이나마 새로운 고객을 끌어모으는 게 더 낫다는 말이다.

‘변화를 주어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냐인가. 그렇다면!’

“뭘 걱정하는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한계가 있습니다. 시대가 변화되어 가고 새로운 디자인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토미 브랜드도 새로운 변화가 필요합니다.”

“좋아! 그 부분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어차피 전체 의상을 건들 것도 아닐 테니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 생각하네. 하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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