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200)

“기본 맨투맨과 코트 디자인 수정부터 하자.”

스케치를 이어가는 와중.

반대편에 앉아 있던 백발의 남성과 노랑머리의 젊은 여성이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에게 무언가는 물어보고 싶지만, 비즈니스석의 특성상 쉽게 말을 걸 수가 없는 듯했다.

나는 긴 여행시간의 여독을 조금이나마 날려 보내기 위해 먼저 나서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한국 여행은 재미있었나요?”

“오 미안해요. 저희가 계속 바라봐서 신경 쓰였나 보네요.”

“괜찮아요. 저도 심심하던 차였으니까.”

“그렇군요. 의상 스케치를 하는 거 같은데 의상 디자이너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백발의 남성은 중후한 목소리로 나에게 쉼 없이 질문을 해왔다.

그리고는 내 스케치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스케치 한번 볼 수 있을까요?”

“…….”

잠시 고민했다.

쉽다면 쉬울 수 있는 일이지만 조만간 출시될 의상의 디자인이기에 누구에게 보여준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는 머뭇거리는 나를 바라보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걸 본다면 의심이 풀리실 거예요.”

그가 내민 한 장의 투명한 명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소호 패션

세계 최대 패션 인터넷 편집숍 소호 패션.

명품 패션몰 샤인, 미스터 패션, 로즈&블랙을 계열사로 운영하는 패션 쇼핑몰 기업이다.

“소호 패션?!”

“네, 소호 패션 대표 잔 마르크 로셰트입니다. 반가워요. 이제는 디자인을 볼 수 있을까요?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어서 말이죠.”

나는 그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의상이 그려진 스케치를 전달했다.

“흠…….”

그는 유심히 내가 그려낸 겨울 의상 스케치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 순간!

잔 마르크가 들고 있는 스케치에서 밝은 빛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데님의 황제 2.

* * *

뉴욕행 비행기가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는 분주하게 수화물을 챙겨 출국장으로 향했다.

“토미 힐피거 쪽에서 마중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요. 호의적이네요.”

“뭐 초대 형식이니까요.”

토미 힐피거는 우리가 머물 호텔까지 잡아주었다.

단순한 비즈니스 관계가 아닌 우리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마침 출국장을 빠져나오는 순간.

우리를 가리키는 푯말이 눈에 들어왔다.

― 아리raM 환영합니다.

엉성하게 쓰인 한글이 묘하게 기분이 좋게 느껴졌다.

푯말을 들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자.

그가 눈치를 채고 빠르게 우리에게 달려왔다.

“혹시? Mr. 차?”

“네, 맞습니다.”

“반가워요. 저는 토미의 비서 톰 브레드입니다.”

“반갑습니다. 아리raM 대표 차진혁입니다. 이쪽은 총괄 디렉터 신지혜 양이고요.”

우리는 짧게 인사를 나눈 후.

톰이 준비한 차량에 올라탔다.

그는 서글서글한 성격에 상대를 편안하게 만드는 언변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극진하게 대접했다.

“오시는 데 불편한 점은 없었나요? 보스가 최선을 다해서 에스코트하라고 당부를 해서요.”

“덕분에 편하게 왔습니다. 뭐 좋은 만남도 있었고요.”

“좋은 만남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네요.”

“뭐.”

잔 마르크에 디자인스케치를 넘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케치북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또 시작이네.”

잔 마르크의 움직임이 느린 동작으로 더디어지더니 주위의 모든 것이 일시적으로 멈추었다.

“비행기는 안 떨어지나 몰라….”

괜한 걱정이 될 때쯤.

내 눈에 뉴욕의 소호 거리와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가 평행이 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좁은 2차선 차도에 편집숍이 즐비한 거리인 뉴욕의 소호 거리.

그리고 6차선이 넘어가는 샹젤리제 거리가 평행이 되어 보였다.

시작과 끝이 점점 넓어지는 느낌이 몽환적으로 다가왔다.

그때 무수히 많은 사람이 나타났다.

모두 걸치고 있는 옷들은 명품과 디자이너들이 특별하게 제작한 의상이다.

뉴욕과 파리를 대표하는 패셔니스트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만든 의상이 아닌 다른 브랜드의 의상이라….”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밝은 빛이 일어날 때는 늘 내가 만든 디자인이나 아리raM에 국한되어 나타나기 마련인데.

이번만큼은 여러 브랜드의 의상이 나타났다.

나는 그 넓은 거리의 중앙에서 그들을 관찰했다.

19FW, 20SS 의상 그리고 오래되어 보이는 아이템, 의상이 서로 조화되어 멋들어지게 표현되고 있다.

“개개인의 감각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네.”

그들은 나를 의식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거리를 종횡무진 돌아다니며 자신의 의상을 뽐내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시점에서 드디어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의상을 입은 패셔니스트가 나타났다.

그런데….

“어…. 설마….”

그녀다.

이 현상이 가장 처음 일어날 때 보았던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매혹적인 얼굴을 가진 그녀.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는 의문의 여인이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났다.

내가 만든 울과 캐시미어 혼합으로 만든 캐러멜 색상의 코드와 새끼손가락 굵기의 울로 만든 아리raM의 로고가 덕지덕지 프린트된 목폴라스웨터.

광택을 입힌 롱 가죽 치마를 입고 말이다.

그 순간 주위에 떠들썩하게 모여있던 패셔니스트들이 모세의 기적을 일으키듯 갈라지며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녀는 그 시선을 즐기며 더욱 당당하게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그녀가 걸어가는 그 거리가 런웨이였고 그녀를 주시하는 모든 이가 관객 같았다.

그녀가 어느덧 평행으로 이루어진 뉴욕의 소호 거리를 벗어나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로 넘어가는 순간.

“나를 보고 있어….”

나를 보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니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분명 나를 보고 있어!”

그녀는 밝은 미소로 나에게 고맙다는 듯 손을 흔들며 차원을 넘어가듯 샹젤리제 거리를 걸어 나가며 영상은 끝이 났다.

“누구일까?”

모든 형상에는 내가 아는 인물이거나 역사 속에 숨은 인물들이 나타난다.

하지만 이 의문의 여인은 어떠한 매치도 되지 않는 비밀에 싸여 있는 사람이다.

그런 비밀에 싸여 있는 여인에게서 나는 늘 친근함과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이유에 나는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영상이 사라지고 잔 마르크가 들고 있는 의상디자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내 디자인을 유심히 보고 있던 잔 마르크가 말을 이었다.

“이 브랜드 대표를 만나고 싶군요. 혹시 메일 주소나 연락처를 받을 수 있을까요?”

“제가 대표입니다.”

“왓?! 당신이?”

“네.”

그는 너무 젊은 내 모습을 보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러다 자신이 실례했다는 듯 고개를 흔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CEO이자 디자이너라면 이 디자인 최종본인가요? 설마 초안은 아니겠죠?”

“뭐 엄밀히 따지면 중간수정본 정도 되겠네요. 몇 가지 요소를 더 추가할 겁니다.”

“지금도 충분히 상품 가치성이 높아 보이는데….”

사업가란 말이지 디자인을 보고 바로 상품 가치를 매길 수 있어야 한다고 바쟐이 자주 말했었다.

나는 그의 말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한국에도 이런 디자이너가 있었다니…. 실로 놀랍네요. 혹시 유럽이나 미국에서 패션 공부를 한 건가요?”

“파슨…. 아니지. 한국대 출신입니다.”

“와 그렇군요. 나름 한국에서는 유명한 대학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렇단 말이지.”

그는 다시 한번 내 스케치를 수차례 확인했다.

그리고는 나에게 비즈니스를 제안했다.

“우리 온라인 편집숍에 입점하는 건 어때요? 뭐 당신의 브랜드의 인지도를 확인해봐야겠지만 이 디자인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 같은데. 기성복 라인이나 개인 브랜드 상품을 취급하는 플랫폼도 있으니까.”

그가 말하는 계열사는 미스터 패션일 거다.

신성부터 중견 개인 디자이너의 브랜드와 준명품 브랜드를 다루는 온라인 편집숍.

하지만 우리는 명품이다.

나는 이에 대해 확실히 내 의사를 전달해야 했다.

“제가 운영하는 브랜드는 명품입니다. 소호 패션 입점이 아니라면 힘들 거 같은데요.”

내 말에 그의 눈이 순간 확장되는 걸.

알 수 있었다.

“한국에서 명품이라니? 처음 듣는 소리네요. 패션 역사가 짧은 한국에서?”

“역사가 없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조선 시대부터 그러니까 근현대 전부터 상의원이라는 전통의상을 만들던 기관이 있던 나라입니다. 그 전통의상을 만들던 장인들이 전수를 통해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현재 제가 운영하는 아리raM은 그분들을 대거 참여시켜 만든 브랜드입니다. 그들의 공예와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있는 브랜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흠……. 뭐 좋습니다. 자료를 받아볼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계열사가 아닌 소호 패션에 입점만 가능하다면 미국이 아닌 전 세계에서 아리raM이 명품이라는 걸 인증받는 거나 마찬가지다.

어쩌면 파리 상인연합에 가입하는 것보다 현실성이 더 높은 방법이다.

그리고 가장 큰 혜택이라면 시장을 넓힐 수 있다.

소호 패션에는 특정 브랜드를 제외한 모든 명품 브랜드가 입점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니 그만큼 고객층도 두껍다.

하지만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할인행사랑 이벤트가 문제긴 한데.’

할인행사나 특정한 날 이루어지는 이벤트가 브랜드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유로 루이바통이나 샤네르, 메르맥스 같은 특정 브랜드는 소호 패션에서 판매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나는 잔 마르크에 양해를 구하고 신지혜와 대화를 이어갔다.

“어떻게 생각해요?”

“소호 패션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긴 하죠. 하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이미지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요.”

“저도 그 부분이 걸리기는 하네요. 하지만 이 기회가 더 빠르게 위로 올라갈 기회가 될 수 있어요. 흠…. 고민되네요.”

“제 입장은 시장을 넓히는 게 좋다고 판단되네요.”

신지혜는 빠르고 성공적인 시장 확장을 생각한 듯하다.

나 또한 이 부분에 가장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잔 마르크에 내 의사를 전달했다.

“우리 브랜드는 이벤트나 세일에 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인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원한다면 조정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재고에 따라서 우리의 판단도 상이하긴 합니다. 일단 자료를 본 후에 미팅을 잡아 보는 건 어떨까 하는데 저는 데이터로 이야기하는 게 편하거든요.”

“그럼 우리로서는 좋습니다.”

현재 아리raM의 판매 데이터는 국내에 국한되어 있기는 하나.

출고량과 판매량으로만 본다면 충분히 좋은 조건에 계약이 이루어질 거다.

가방과 의류 모두 대부분 주문이 들어오는 수만큼만 생산하고 있어 재고량이 많지가 않다.

“디렉터님 비행기 내리면 MD팀에 전달해서 필요자료 다 보내 달라고 하세요. 토미랑 미팅 이후 정리해서 전달하죠.”

“네, 알겠습니다.”

우리가 대화를 마무리할 때쯤.

비행기의 착륙 방송이 들려왔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네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만진 후 자리를 떠나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걸어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고개를 돌려 나에게 말을 이었다.

“나는 느린 사람은 싫어합니다. 이태리 사람이기는 하지만 미국식 마인드를 가진 인간이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는 나에게 손을 흔들며 비행기를 빠져나갔다.

“정말 사장님은 운이 절로 따라서 오는 거 같아요. 잔 마르크라니…. 저 사람 정말 보기 힘든 사람인데.”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요? 아무리 온라인 편집숍이 커졌다 해도 오프라인의 매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무슨 말이세요. 시대가 변했어요. 요즘은 웬만한 백화점 기업매출보다 인터넷 편집숍이 더 큰 매출을 차지해요. 그중에서 소호 패션이 최고고요.”

그녀의 말이 맞는다.

시대가 변해가고 있고 점점 인터넷의 보급률이 늘어날수록 이 시장은 장래가 밝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손해를 보더라도 잔 마르크의 눈에 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 섰다.

.

.

.

나는 다시 토미의 비서 톰에게 질문을 이어갔다.

“일정을 물어봐도 될까요?”

“네, 오늘은 푹 쉬시고 내일 오후에 3시쯤 제가 호텔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 전에 준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이죠.”

* * *

“보스 표정이 좋으시네요. 아까 만난 사람의 디자인이 그렇게나 맘에 드셨어요?”

“그래 보였나. 뭐 뜻밖이긴 했어. 늘 이런 순간에는 최악의 디자인을 보곤 했는데 이번에는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좋더군. 그리고 또 다른 큰 수확이 있었거든.”

“무슨?!”

“알고 싶어? 그럼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보내는 건 어때?”

“또 이런 장난치시네요. 저한테 마음도 없으시면서 매번 이런 장난을 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네요!”

“아아 미안. 그렇다고 인상 쓰지는 말아.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면 마음이 약해져서 심장 떨린단 말이야.”

그녀는 잔 마르크에 옅은 미소를 내보이며 봐줄 테니 얼른 대답하라는 눈치를 쏟아냈다.

순간 고민하던 잔 마르크는 그녀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데님의 황제 3.

* * *

곤란하다던 잔 마르크는 무겁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짜증과 애교가 섞인 그녀의 표정에 넘어갔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이거 참 곤란하네.”

“얼른 말해보세요.”

“그게 말이야. 젊은 디자이너 옆에 있던 여자 말이야. 그 여자 누구랑 참 많이 닮았더라고.”

“누구 말이에요?”

“프랑수아즈 파비앙의 둘째 부인.”

“프랑수아즈 파비앙이라면 켈링 그룹 회장?! 그 사람 부인은 살아 있잖아요?”

“맞아. 내연녀라고 보면 되겠지? 하지만 정말 사랑한 사람은 두 번째일 거야.”

“그게 무슨?”

“첫째 부인은 파리의 명문 가문의 여자야 파비앙이 사업에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자금줄이었지 뭐 그런 거 있잖아. 사랑하지 않아도 미래를 위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