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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뒤에는 할머니들이 평생을 고이 간직해온 사진들이 슬라이드 형식으로 천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사진들에는 자신들이 사랑했던 가족들과 함께 추억을 나눈 할머니들 그리고 잊고 싶었던 아픈 기억이 담긴 사진도 함께 있었다.
나는 흘러나오는 사진을 보며 마이크를 꺼내 들었다.
“우리가 이 모두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감싸 안아야 합니다. 행복을 나누면 배가 되듯이 이 아픈 추억을 가진 할머니들의 슬픔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어느 누가 이들을 사지로 내몰았나요. 전쟁이, 아니면 전범국의 범죄자들이. 분명 이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일지 모릅니다. 그녀들은 아름답고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리raM은 잠시나마 할머니들의 어린 시절의 아름다움을 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긴 이야기가 끝이 나고 내가 마이크를 내려놓자.
할머니들은 쓰고 계시던 너울[얼굴 가리개]을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는 한 명 한 명 그녀들의 이름을 부르며 모두에게 소개해 주었다.
“전여사 할머니, 전미숙 할머니, 한용복 할머니, 김복진……. 우리가 가슴으로 기억해야 하는 16명의 할머니. 그녀들의 이름입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관객들은 하나같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눈물을 보이었고 어떤 이는 무대 가까이 다가와 할머니들의 손을 부여잡아 주었다.
어떤 이는 고개를 숙이며 할머니들의 아픔을 이해하려 했었다.
그리고 그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메인 스트레이트 정면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가족들이 일제히 다가왔다.
“진아야….”
“가엾은 우리 엄마….”
할머니 한 분이 무대를 벗어나.
오랜 세월 보지 못한 딸을 감싸 안았다.
둘은 오랜 세월을 벗어나 딸과 어머니의 모습으로 현재 서로의 마음을 감싸주고 있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사진작가들은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뒤를 이어.
전여사 할머니의 아들이 무대 아래로 다가와.
할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어…. 머니. 죄송합니다. 제가 죽일 놈이에요. 제가….”
본인도 어머니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주위의 시선과 사람들의 인식이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 버렸다는 거에 부끄러움과 자책감을 가지고 살아왔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일어나. 네가 뭘 잘못했다고 이래. 엄마가 다 미안하다. 이 엄마가 못나서…….”
“어머님…. 처음 봬요. 이제야 인사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내가 미안해요.”
“진석아 인사해야지. 할머니야.”
진석이라는 초등학생 정도의 작은 체구를 가진 꼬마 아이가 환한 웃음으로 할머니에게 다가가.
폭삭 안겼다.
이 작은 민들레 씨앗 같은 꼬맹이가 할머니에게 안기는 순간.
추운 겨울이 저 멀리 지나가고 새싹이 자라나는 봄이 할머니의 마음에 다가왔다.
“흑흑…. 내가 죽기 전에 우리 손주를 안아보다니.”
“어머님. 이제 제가 오래오래 모실게요. 이이가 그동안 못 한 효도 제가 하겠습니다. 어머니.”
“아니에요. 다 늙어서 무슨 짐이 되려고.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은데.”
전여사 할머니는 큰 욕심 없이 현재 이 순간의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렇게 손주의 손을 잡고 자기 아들에게 다가갔다.
“안아보자. 우리 아들.”
작은 체구의 아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
지긋한 중년이 되었지만, 할머니의 눈에는 그저 큰 아픔을 가진 자신의 어린 아들로 보였다.
“흑흑 죄송합니다….”
“엄마가 미안하다.”
현재까지 생존해 계시는 할머니의 가족들 말고도 우리는 돌아가신 위안부 할머니의 가족들과 지인들을 모두 초대했다.
모두 이 광경을 보며 눈물을 보였고 늦어버린 자신을 탓하는 이도 있었다.
“총각 고마워요.”
“고마워.”
“고마우이.”
할머니들은 주위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는 나에게 다가와.
내 차디찬 손을 따뜻한 손으로 부여잡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 안 울려고 했는데.”
“우리를 이런 멋진 곳에 데리고 와서 고마워요.”
나는 전여사 할머니의 말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곳이 멋져서가 아니라 할머니들이 아름다워서였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나와 아리raM의 직원들은 무대 뒤편 대기실에 그들이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주고 패션쇼를 이어갔다.
S/S 서울 패션위크 5.
* * *
나는 관객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패션위크를 이어갔다.
이제는 정말 오랜 시간을 준비한 아리raM의 의상을 보여 줄 시간이다.
“레디 큐!”
일렉트로닉 음악이 우퍼스피커를 타고 심장을 자극했다.
메인으로 소개한 데님 소재의 의상과는 상반된 형광 톤의 화려한 의상을 입은 모델들이 하나둘 워킹을 시작했다.
메탈 소재의 원피스를 입은 모델이 걸어 나가는 순간.
조명이 움직이며 메탈 소재의 원단을 비춰주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의상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시각에 따라 여러 가지 아름다움을 연출할 수 있는 의상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의상에 모형 백을 함께 소개했다.
콘셉트인 로맨티시즘을 한층 더 큐티하게 바꿔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내 생각이 반영되었다.
첫 번째 모델이 메인 스트레이트에서 자세를 취하는 순간.
박수 소리가 다시 한번 모든 객석에서 터져 나왔다.
“원피스도 원피스지만 저 가방 너무 깜찍하고 아름답지 않아?”
“나는 사전구매 부스 가서 바로 구매하려고.”
“가방디자인 미쳤네. 올해 히트작이겠어.”
작가들의 사진 촬영으로 플래시 샤워가 이어졌고 셀럽들과 편집자들은 휴대전화를 이용해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메탈 소재의 원단에 대한 호평도 끊이지 않았다.
뒤를 이어 두 번째 모델이 런웨이를 시작했다.
블루 계열의 가죽 재킷을 걸친 모델이 무대로 걸어 나가자.
백 그라운드에서는 같은 디자인의 다른 컬러 열 가지를 같이 선보였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보여 주어 구매자와 업계 관계자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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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드레스를 제외한 30가지 의상.
신제품인 가방, 스니커즈, 구두까지 모든 걸 홀에 모여있는 관객들에게 보여 주었다.
나는 마지막 모델이 들어오는 걸 확인하고 디자인팀 전원을 불러들였다.
“수석 디자이너, 김형준, 안정원 다 내 옆에 서요.”
“저희도 같이 올라갑니까?”
“네, 아리raM의 디자이너는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요.”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고생해서 만든 디자인이기에.
총괄과 CEO라는 명함을 내려놓고 함께 축하를 받고 싶었다.
한은샘이 막내 디자이너였던 나에게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러고 보면 나도 많이 변했네.’
피식 웃음이 나오는 걸 겨우 참고서 가장 앞으로 걸어 나갔다.
“다들 긴장하지 말고 따라와요.”
“네!”
디자인팀 모두가 기합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디자이너라는 명함이 붙는 순간.
누구나 꿈꾸는 일이지 않겠는가.
내가 선두로 무대를 걸어 나가자.
류미리와 김형준, 안정원이 내 뒤를 이었다.
위안부 할머니들 그리고 프로모델 40명이 함께 자리를 빛내 주었다.
나는 맨 앞에서 아리raM의 첫 번째 패션위크를 축하해준 관객들에게 고개 숙였다.
“이렇게 아리raM의 S/S 시즌 컬렉션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인사에 모두가 기립박수를 쳐주며 환호성이 들려왔다.
이 순간만큼은 내가 세계에서 최고의 디자이너가 된 기분이다.
내가 인사를 마무리하고 살짝 자리를 비켜서자.
뒤에 서 있던 디자인팀 전체가 관객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디자인팀이 인사를 마무리하고 내가 마이크를 받아드는 순간.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기자로 보이는 사람이 큰소리로 나에게 질문을 요청했다.
“대표님 질문 있습니다!”
나는 그의 의중이 무엇인지 모르나.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네, 말씀하세요.”
“왜 메인 의상이 변경되었나요. 데님 라인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소문으로는 형광 계열의 드레스라고 알고 있었는데요. 관객 모두 그 의상을 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기자의 질문에 관객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할 수 있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마이크를 내려놓고 고민에 빠져들었다.
어려운 질문이다.
하지만 결단을 내려야 한다.
내 옆에서 있던 류미리도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노력과 결실을 증명해달라는 눈빛이다.
‘어렵네.’
홀 전체에 침묵만이 맴도는 순간.
나는 결단을 내리고 마이크를 들어 올려 답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내 부탁에 모두가 침묵으로 긍정의 답을 전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더 큰 기대에 부풀어 있는 느낌이다.
마이크를 류미리에게 전달한 후.
나는 장하나와 여성 모델 5명을 더 데리고 대기실로 빠져나갔다.
내가 무대 뒤로 빠져나가자.
신 디렉터가 헐레벌떡 뛰어오며 내 옷깃을 잡아챘다.
“대표님! 어찌하시려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진실을 알려야겠어요.”
“하지만…….”
“박무식 씨한테 지금 전화하세요.”
“네?”
“저를 믿는다면 사과문 준비하라고요.”
“…….”
나는 굳은 의지로 모델들을 데리고 선보이지 못한 의상을 전달했다.
“부탁합니다.”
내 부탁이 무엇인지 알아들은 장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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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렉트로닉 음악이 갑자기 우퍼를 타고 강렬하게 흘러나왔다.
무대 위에 있던 아리raM의 식구들과 모델들이 장막을 거치듯 갈라졌다.
나는 마이크를 들고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궁금해한 메인 의상입니다.”
무게가 담긴 내 한마디가 마이크를 타고 모두에게 전달되는 순간.
장하나와 5명의 모델의 런웨이가 시작되었다.
무대 아래의 조명이 메인 드레스를 비추며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자.
관객들은 마치 드레스에 빠져든 듯 이 상황을 침묵으로 일관했다.
다시 보아도 화려하고 아름다운 드레스다.
나는 런웨이를 감상하며 류미리 디자이너의 어깨에 손을 올려 위로 아닌 위로를 전달했다.
“잘될 겁니다.”
“믿고 있습니다. 사장님.”
장하나와 5명의 모델이 런웨이를 마치고 돌아오려는 그때.
나는 손을 앞으로 내밀며 무대에서 내려오는 걸 저지했다.
“앞으로 봐주세요.”
“네?!”
그녀들은 오던 발걸음을 멈추고 관객 모두가 볼 수 있게 자리를 선점해 자세를 취했다.
역시 프로 모델다운 대처 능력이었다.
“여러분, 이 드레스가 아리raM S/S 시즌 메인 드레스입니다. 제 안일한 생각에 관객들 모두를 속였습니다.”
내 말에 질문했던 기자가 다시 손을 들고 말을 이었다.
“VOKE에 실린 김경희 디자이너의 드레스와 너무 흡사한데 설명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리raM의 대표이자 총괄디자이너로서 전혀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더 당당하게 우리가 만든 디자인을 여러분에게 소개하지 못한 거뿐입니다.”
나는 이 상황을 행동으로 보여 주기로 했다.
“신 디렉터님 같이 가주실래요?”
내 마이크 소리가 홀을 울리는 순간.
지휘실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관객석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발걸음을 맞추어 무대에서 뛰어 내렸다.
그렇게 신 디렉터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걸어 나갔다.
“그년한테 가는 거죠?”
“네 복수는 복수로 갚아야지 않겠어요. 안 그래요?”
“당연하죠!”
우리는 어느 때보다 악동다운 모습으로 아리raM 컬렉션 홀의 정문을 활짝 열었다.
나와 신 디렉터가 정문을 향해 걸어 나가자.
기자와 많은 사람이 우리 뒤를 따라 움직였다.
* * *
― 아리raM 대 제너락 디자인 공방!
― 김경희 디자이너의 은밀한 취미생활.
― VOKE 사과문 공지.
― YK어패럴 주가 폭락!
― 또다시 불거진 카피디자인 디자인 산업의 실태.
― 위안부 문제 정부에서 나서겠다.
― 위안부 재조명에 일본 외무성 대국민 발표. 사과는 없다! 우리는 해줄 만큼 해줬다.
나는 사무실에서 인터넷으로 올라오는 순위권 뉴스를 확인했다.
“정말 쉬지도 않고 뿌려져 나오는구먼.”
내가 옅은 미소로 기사를 읽어가는 그때.
신 디렉터가 나에게 다가와 말을 이었다.
“뭘 그리 재미있게 보고 계세요?”
“아 뉴스요. 아직도 기사가 계속 올라오네요.”
“일주일이 지나도 아직도 뜨겁긴 하죠. 시사프로 주제로도 올라오고 있으니까.”
“김경희 아니 제너락은 지금 어때요?”
“뭐 초상집인 거 같아요. 그날 저희가 컬렉션 완전히 엎었잖아요.”
“아 속이 시원하긴 했죠.”
“그 대신 저희도 이미지가 좀….”
나는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며 또 다른 기사 한 줄을 바라봤다.
― 들끓는 피 아리raM 대표 차진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