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200)

옷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픈 기억을 모두 숨길 수는 없겠지만, 현재 아름답게 피어난 마음을 지켜주고 싶다.

또 다르게 그녀들을 외면한 사회와 가족들에게 그녀들도 아름다운 여성이었고 아픔을 가진 청춘이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내가 의상이 있는 탈의실로 이동을 하니 류미리가 의상 전체를 살피고 있었다.

“류미리 디자이너. 전개도는 제가 한 번 더 확인할 테니까. 그분들한테 다시 한번 연락 넣어주세요.”

“네.”

“꼭 와야 합니다. 런웨이 시작 전에 설득해주세요.”

“노력해 볼게요.”

내가 생각해 낸 또 다른 하나의 선물.

할머니들의 런웨이가 결정된 이후.

마을을 떠나기 전 나는 전미숙을 통해 할머니들 가족과 친척들의 연락처를 취득했다.

그들을 DDP에 초청해 할머니들의 무대를 지켜보게 하기위해서.

하지만 아직 40% 이상이 참석을 꺼렸다.

숨겨온 과거가 밝혀지는 게 두렵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나는 이런 사회의 시선에 더욱 가슴이 메왔다.

“가족이 이 아픔을 감싸 안지 않으면 누가 할머니들을 사랑하고 감싸줄 수 있겠어. 무조건 참석시켜야 해!”

할머니들은 몇십 년을 견뎌온 아픔과 고통.

그 속에서 살아왔을 나날을 감싸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할머니들이 입는 의상은 맨 마지막 순서니까 일단 메인 의상을 전면에 두고.”

전개도 일부를 변경할 생각이다.

아리raM의 색이 가득 밴 메인 의상들과 할머니들이 입을 의상을 나누어야 더욱 그녀들이 부담 없이 런웨이를 즐길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

“조명도 일부 조정하고 메인이 너무 밝으니까 할머니들의 의상에 스포트라이트를 더 강하게 설정해야겠어.”

나는 모든 의상의 상황을 점검하고 대기실로 이동했다.

그리고 커튼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가자.

신 디렉터가 분주하게 할머니 한 분 한 분을 챙기고 있었다.

“디렉터님. 이제 제가 맡을게요. 무대 리허설 준비해주세요. 이거 전개도고 조명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도 적어 놓았습니다.”

“네, 바로 확인하고 조명 감독한테 전달할게요. 배경도 할머니들 런웨이 시작과 동시에 영상이 흘러나올 겁니다.”

“고생하셨어요. 바쁘실 텐데 어서 가보세요.”

런웨이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을 가진 그녀였다.

많은 시간을 빼앗을 수 없었고 나로 인해 벌어진 변칙을 그녀에게 떠넘길 수도 없었다.

나는 신 디렉터와의 대화를 마치고 화장을 하고 계시는 전여사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할머니는 굳은 얼굴로 맞은편 거울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계셨다.

나를 그런 할머니의 설레하는 모습에 귀여움을 느꼈다.

아직도 그녀의 마음에는 꽃다운 시절의 마음이 자라나 있다는 증거였다.

“할머니 오늘 엄청 이쁘신데요. 40대 같으세요.”

“농담도. 아 참! 총각 고마워요. 내 평생 이런 날이 다 올 줄 몰랐는데 고마워요. 신경 써줘서.”

“뭘요. 제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하죠. 오늘은 할머니들이 주인공이시니까. 당당하게 무대를 즐기세요.”

내 말에 옆에 우리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할머니 한 분이 큰 소리로 말을 이으셨다.

“그래! 런웨이인지 뭐 별거 있겠어! 우리도 연습 많이 했다니까. 마을 회관에서 할망구들 걷기연습을 얼마나 했는지.”

“그 자신감으로 하시면 됩니다. 당당하고 자신 있게요. 부담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동네 산책한다는 마음으로 걸으시면 됩니다. 오랜 세월에 묻어난 그 걸음걸이도 아름다워요.”

“나는 잘생긴 총각 처음 볼 때부터 마음에 들었어. 얼마나 말을 이쁘게 하는지. 내 손주 삼고 싶다니까.”

“그럼 제가 손주 하죠. 뭐. 여기 있는 할머니들 모두 편하게 대해주세요.”

“그래그래.”

그 뒤로 나는 메이크업과 헤어를 하는 할머니들 모두를 찾아뵈며 긴장감을 조금은 누그러트리려 말을 걸어드리고 간식을 챙겨드렸다.

‘넘어지지만 마세요. 조심히만 다녀오세요. 그게 제 바람입니다.’

그녀들이 실수할지라도 괜찮다.

이 자리에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도전이었고 아름다움이다.

할머니들 모두 메이크업이 끝나가려는 무렵.

헤드셋에서 신 디렉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허설 준비해주세요. 30분 후에 들어가겠습니다. 조명 세팅 완료, 디스플레이 완료, 음향 완료입니다.”

신 디렉터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아리raM의 직원들은 할머니들이 입을 의상을 하나하나 가지고 대기실로 들어왔다.

“아이고 이거 젊은 사람들이나 입는 거 아녀?”

“오늘은 할머니들이 청춘이세요. 그러니 입어보세요.”

내가 만든 할머니들의 의류는 바로 데님을 소재로 한 원피스와 코트, 치마, 재킷 등 데님으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내가 왜 데님을 선택했냐 하면 데님의 상징적인 의미 때문이다.

자유, 청춘, 저항!

나는 데님의 상징적인 의미를 할머니들의 고된 시간과 매칭시켜 컬렉션에 스토리를 집어넣어 드라마틱한 감동을 선사할 생각이다.

관객의 마음을 동요시켜 위안부라는 꺼려지는 이미지를 친숙하게 만들고 싶다 생각했다.

“할머니들 모두 입고 나오시면 스타일 살펴주세요. 액세서리랑 가방은 본무대에 들어가기 전에 해주시고요. 할머니들 불편함 없이 맨투맨으로 보살펴드리세요.”

“네, 사장님.”

“그리고 류미리 디자이너는 할머니들 안 헷갈리게 순서대로 잘 내보내세요. 전개도에서 한 치도 벗어나면 안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모두에게 지시를 내리고 리허설이시작되기 전 상황을 살피기 위해 객석으로 이동하려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내가 문 앞에 나서는 그때.

헤드셋으로 다니엘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장! 빨리 출입문 쪽으로 와봐!”

“무슨 일인데. 지금 바쁜데.”

“빨리!”

다니엘의 목소리가 상당히 격앙되어 있었다.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목소리.

그런데 이상한 것은 목소리에 분노도 함께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나는 다니엘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입구 쪽으로 뛰어갔다.

“무슨 일이야?”

“이거 봐봐. 제너락 이 미친 새끼들이 진짜.”

“뭔데?”

다니엘이 내민 잡지는 VOKE의 10월 특별 호.

“이게 왜?”

내가 잡지를 펼치는 순간.

검붉은 빛이 피어오르며 내 주위의 모든 걸 일시적으로 멈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붉은 빛은 내 두 눈을 집어삼켰다.

“권진호 과장?! 당신이 왜….”

내 눈앞에서 다시는 보기 싫은 한 여성과 아리raM MD팀 과장인 권진호가 나란히 나타났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오랜만이지. 진호 씨는 얼굴이 전보다 안 좋아졌어.”

“별말씀을요. 근데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어요?”

“일단 앉아. 급한 일 있어?”

“그건 아니지만.”

“밥은 먹고 왔어?”

“아직이요.”

“그럼 식사도 같이 시켜 여기 파스타 끝내주니까.”

“네……. 근데 진짜 왜 연락하신 거예요?”

“내가 뭐 못 할 데 연락했어?”

“그건 아니지만 만약에 총괄 디렉터님이 보시면 저 큰일 날 겁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사람 만나지도 못해?!”

“하…. 그건 아니죠.”

“진호 씨 말을 똑바로 하자. 그때 내가 카피디자인으로 쫓겨난 거야. 우리 아빠가 회사 경영 손대려고 하니까. 한은샘이랑 신지혜가 차진혁 시켜서 나한테 혐의 뒤집어씌운 거였지 않아. 다 조작된 거라니까!”

“그 일은 저도 자세하게는 몰라서.”

“그러니 편안하게 대화 좀 하자고 이번에 나 YK어패럴 대표로 취임한 거 들었지?”

“아직이요. YK어패럴 대표면 상당한 위치네요.”

“그쪽에서 내 능력을 알아본 거지 뭐.”

“자랑하시려고 저 보자고 한 건 아닌 거 같고 진짜 무슨 일이세요?”

“YK어패럴 명품 브랜드 제너락 MD팀 진호 씨가 이끌어 가보는 건 어때?”

“네?!”

제너락이라니 아직도 나쁘지 않은 성과를 내는 브랜드다.

듣고 있는 나도 그녀의 조건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내가 이 정도인데 권진호라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설마 그래서 사직서를 낸 거야!?”

나는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이 검붉은 빛이 한 명의 이탈자로 인해 일어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저한테 제너락 총괄 MD 자리라도 내주시려고요?”

“그래. 총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좋지 않아? 연봉은 명품 브랜드 준하는 정도로 챙겨줄게. 성과는 플러스알파로 줄 거고.”

“제가 그런 그릇이 될지….”

“진호 씨 정도면 충분하지. 패션 시장에서 10년은 굴러먹었는데. 아리raM 같은 브랜드에 있기는 시간이 아깝지 않아. 언제 성장할지도 모르는 기업에 어린 사장 놈에 거기서 일하기 안 불편해?”

“…불편한 거야 없지만.”

“잘 생각해 이런 기회 흔치 않아.”

“네, 감사합니다.”

권진호의 웃음기 가득한 얼굴을 뒤로하고 영상이 끝이 났다.

“…….”

추측이지만 조건을 받아들인 권진호는 분명 제너락의 총괄 자리를 얻었을 것이다.

근데 이 영상에는 아무 맥락이 없다.

분명 큰 거래가 오갔을 게 분명한데 말이다.

권진호가 그녀에게 내어줄 수 있는 큰 게 뭐가 있을까?

“사장! 뭐 해? 넋 놓지 말고 맨 뒷장 봐봐.”

“맨 뒷장…….”

다니엘은 내 얼굴을 바라보며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불안한 거다.

“이런 미친….”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는다.

김경희 YK어패럴 사장의 고상한 취미라는 제목.

그녀의 짧은 인터뷰 내용.

그리고 그곳에 나와 있는 의상디자인.

“우리 메인 드레스가 왜?!”

한 치도 틀리지 않은 우리 아리raM의 메인 드레스였다.

원단 일부가 바뀌기는 했지만, 주머니 하나 로고 하나의 위치까지 같다.

나는 너무 화가 나 잡지를 바닥에 있는 힘껏 집어 던졌다.

“이 미친 X이! 제너락 오늘 런웨이지?”

“그럴 거야.”

나는 분을 삼키지 못하고 입구 문을 열고 제너락의 대기실로 향하려고 했다.

그 순간.

다니엘이 온 힘을 다해 내 몸을 감싸 안았다.

“간다고 달라질 거 없어. 정신 차려!”

“저번에도 카피 이번에도 카피 도대체 내가 언제까지 참아야 해!”

“차진혁! 그걸 몰라서 그래. 우리 곧 런웨이야. 몇 달을 준비한 런웨이라고. 이 몇 장의 잡지 때문에 한 분기의 큰 성장을 멈추고 싶어.”

“아 씨!”

나는 머리를 헝클이며 바닥에 떨어진 잡지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헤드셋으로 아리raM 팀장급 모두를 불러들였다.

턱!

“이게 뭐예요?”

“VOKE 10월호 특별호요.”

“이게 왜요?”

“한번 보세요. 누가 실렸는지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저는 차마 제 입으로 말 못 하겠네요.”

신 디렉터는 내 굳은 표정을 보며 불안하다는 듯 잡지를 들어 내부를 확인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류미리와 김상진 그리고 디자인팀 막내 둘까지.

곧 신 디렉터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기 시작했다.

S/S 서울 패션위크 3.

* * *

끝내 화를 참지 못한 신 디렉터가 있는 힘을 다해 욕지거리를 뱉어냈다.

모두 그 모습에 흠칫 놀랄 정도였다.

“김경희 이 미친년이 진짜! 우리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남아서….”

“신 디렉터님…….”

“진혁아! 내가 이 미친 X을 죽이고 오늘 패션업계를 떠나련다.”

그녀가 오랜만에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브랜드 Han의 그 시절의 그 모습으로 돌아갔다는 말이다.

앞뒤 없이 정주행하는 그때로.

‘말려야 해.’

그녀가 제너락에 가는 순간.

다니엘의 말처럼 모든 게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화제를 전환해야 한다.

“우리 특허 신청 어떻게 되었죠?”

“특허가 중…. 아…. 하 아직 승인 안 났어. 아직 심사 중이야. 나 너무 흥분했다. 잠시만.”

모두는 그녀에게 잠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휴식시간을 주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메인 드레스를 준비한 류미리도 상황이 같았지만 신 디렉터가 날뛰는 걸 보고 자신까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느낀듯했다.

잠시 각자 짧은 시간을 가진 후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아직 심사 중이라네요.”

“문제는 고객이나 사람들 인식이에요. 시간이 지나서 디자인 특허가 우리 손에 들어온다고 해도 벌써 제너락의 디자이너인 김경희의 메인 드레스라는 인식이 박힌 사람들은 우리가 카피했다고 생각할 거예요. 소송을 진행해도 애매한 상황이네요.”

“하…. 이년이 진짜 짜증 나게 하네. 이거 그때 일 복수하는 거 맞죠?!”

“뭐…. 뻔하죠. 김경희 성격에 이런 짓 한 거 보면.”

“열불이 터져서 못 참겠어요. 얼굴이라도 보고 물을 끼얹든 욕지거리를 뱉어내든 하고 올래요.”

“참아야 합니다.”

“못 참겠어요!”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괜히 구설에 오르고 싶지 않다.

“그런다고 달라질 거 없습니다. 무대부터 점검하죠. 우리 멘탈을 무너트려서 무대를 망치게 하는 게 김경희가 바라는 걸 겁니다. 김경희는 디자인에는 전혀 관심도 없어 보여요.”

“그게 무슨?”

상업적으로 사용하려 했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컬렉션에 올렸을 거다.

근데 딸랑 특별 호에 실린 정당화시킬 수 없는 몇 장의 드레스.

우리에게 보이기 위한 목적이 다분하다.

만약 안 본다고 할지라도 컬렉션에 올라가는 순간 브랜드 이미지가 망가질 테니.

이러나저러나 김경희한테는 이득이다.

내 말에 어두운 침묵만이 우리 주위를 감싸 안았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요. 사장님 의견이 가장 중요합니다.”

“생각 좀 할게요. 이렇게 된 거 메인 드레스는 무대에 못 올라갑니다.”

그때 류미리의 실망 가득한 표정이 내 눈에 스쳐 지나갔다.

“미리 씨 고생했는데. 미안하게 됐네요.”

“아니에요. 사장님 잘못이 아닌데요.”

“이러나저러나 저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 사과드리는 거예요.”

나는 전개도를 머리에 그리며 컬렉션을 이미지화하기 시작했다.

전체적인 흐름과 매치를 읽은 후.

전개도와 메인 컬렉션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모두가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기다려 주고 있는 그때.

“총각.”

나를 애틋하게 부르는 휠체어를 타고 계시는 할머니.

“네 뭘 도와드릴까요.”

“그게 아니라. 이 휠체어를 타고 나가도 되나 싶어서 괜히 피해 끼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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