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7/200)

우리는 할머니 집에서 맛있는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마을 회관으로 돌아왔다.

모두가 즐겁게 게임을 하고 일로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며 하루를 마무리하려는 그때.

할머니가 다시 마을 회관을 찾아오셨다.

“가을이 다가오니까. 해가 짧아져서 벌써 어둡네. 이것 좀 먹으라고 내가 심은 옥수수인데. 참 맛있어요.”

“감사합니다.”

모두 할머니에게 감사함을 표현하며 옥수수를 하나씩 들고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할머니도 기분이 좋아지셨는지 환한 미소로 몸을 돌리려 했다.

“할머니 제가 바래다 드릴게요. 날이 어둡네요.”

“아이고 노는데 방해되게 집 바로 앞인데 뭘.”

“그래도요.”

나는 신발을 신고 할머니와 함께 마을 회관을 빠져나왔다.

모두의 마음을 달래줄 수는 없지만, 할머니만큼은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날이 점점 차지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우리 아들놈이 참 감기가 잘 걸리는데 걱정이에요.”

할머니의 한마디에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

그녀의 아픔도 슬픔도 감싸주지 않는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할머니는 아드님 안 미우세요?”

“미워할 게 있나. 부모는 늘 미안하기만 한 거지.”

“부모님은 그런 건가요?”

“그럴 거예요. 총각 부모님도 총각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던데 그게 부모 마음이지.”

“그렇군요.”

“그냥 바라는 게 있다면 나를 미워하지도 말고 미안해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냥 한 번쯤은 자랑스러운 부모가 되고 싶기도 하고요. 자식에게 자랑스럽다는 게 참 행복할 거 같거든.”

할머니의 한마디에 내 뒤통수를 강한 해머로 내리치는 거 같았다.

그때 나는 순간 엄청난 생각을 해내었다.

“할머니 만약에 자랑스러운 어머니가 되시면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

“흠…. 그거까지는 생각 안 해봤는데. 그냥 손주랑 며느리한테 맛있는 밥 한 상 차려주고 싶은데.”

작은 소원이지만 그녀에게만큼은 커다란 소원일 것이다.

“제가 그렇게 해드릴 수 있는데 해보실래요?”

“응?! 총각이.”

“네. 내일 마을 회관에 할머니들 모두 모아주실 수 있을까요?”

“알겠어요.”

나는 순간 할머니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저 따뜻한 눈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S/S 서울 패션위크 1.

* * *

VOKE 9월호.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YK어패럴의 제너락!

“와 잘 나왔는데요. 고마워요. 편집장님.”

“별말씀을요. 이번 광고 건 크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VOKE 한국지부 대표님도 감사를 표한다고 전해 드리랍니다. 그리고 다음에 기회 되면 식사 한번 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별말씀을요. 세계적인 잡지사에 투자하게 되어 영광이죠. 이렇게 고정광고 얻을 기회도 주시고.”

“금액대가 크다 보니 선뜻 달려드는 기업들이 없었는데 저희도 한시름 놓았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디자인한 드레스 이번 호에 실을 수 있을까요?”

투자사가 되자마자.

조건이라.

“이번 출간 호에요?”

“아직 최종 인쇄까지 안 들어간 거로 아는데.”

“그건 그렇지만 편집부도 회의를 거쳐야 하는데.”

“그럼 보고 결정해 주세요.”

“네, 그럼.”

김경희는 핸드백에서 작은 USB 하나를 꺼내 태블릿에 연결했다.

그리고 화보 촬영까지 끝마친 드레스를 내밀었다.

“어때요?”

“좋은데요…. 이걸 직접 만드셨다고요?”

“그럼 누가 해요.”

박무식은 김경희에 관한 이야기를 신지혜에게 얼핏 들은 것이 생각났다.

디자이너로서 감각과 능력이 부족하고 욕심이 하늘을 찌른다고 했다.

하지만 현재 보여준 드레스 디자인은 전혀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드레스다.

한 시즌을 앞서가는 감각과 퀄리티를 뽐내고 있었고 올해의 베스트 드레스가 될 수도 있을 거 같다.

“너무 좋은데요. 저도 최근에 명품드레스 샘플 몇 개 받았는데. 그중 최고인 거 같네요.”

“그래요. 고마워요. 그럼 이번 호에 올려주는 거로 하는 거예요.”

“당연하죠. 근데 서울 패션위크 전에 드레스 공개해도 되겠습니까?”

“컬렉션용 아니에요. 그냥 제가 여유가 되어서 만들었는데 호응만 좋다면 출시할까 생각 중이에요.”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편집부에 연락해서 말해두겠습니다.”

“고마워요.”

김경희는 희미한 웃음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무식은 그녀의 뒤를 따라 함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저는 가볼게요. 잘 부탁드려요.”

“네, 조심히 가세요.”

문을 열고 나가려는 김경희가 다시 고개를 돌려 박무식을 바라보았다.

“편집장님 신 디렉터랑 친하다고 했죠?”

“네.”

“친하다고 디자인 함부로 보여주고 하면 안 되는 거 아시죠.”

“당연한 소리를……. 저는 일에서만큼은 철저합니다.”

“그럼 믿고 갈게요.”

“네.”

박무식은 김경희가 빠져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눈칫밥만 몇 년째인가.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가식 덩어리였다.

“젠장 괜히 기분 나쁘네. 광고주 구하기가 이렇게 어렵나.”

박무식은 편집부로 이동해.

김경희가 가져온 USB를 팀원에게 건넸다.

“이거 이번 출간 호에 집어넣어 제너락 분량 뒤에 바로 집어넣어서 김경희 디자이너의 취미 생활이라는 키워드로 2페이지 안으로 편집해.”

“네.”

* * *

무대 설비와 음향, 연출에 대한 최종회의가 진행되었다.

나와 류미리 수석디자이너, 신 디렉터, MD팀 전원이 회의에 참석했다.

준비를 마친 신 디렉터가 브리핑을 시작했다.

“이번 컬렉션 컨셉트와 화려한 의상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고 무대 백그라운드 전면을 올 블랙으로 마감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형광색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할로겐 등을 무대 하부에 설치해 의상 자체의 밝은 톤을 끌어 올릴 생각입니다.”

“양방향으로 쏘아 올리면 채도가 너무 상승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메인 드레스가 나올 때는 하이라이트 조명을 최소화할 생각입니다. 강한 조명과 조명 연출이 크게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의상이 돋보이는 만큼 조명의 과함을 줄이는 게 옳다는 판단입니다.”

“그럼 리허설 때 두 가지 경우 모두 확인하도록 하죠. 처음 열리는 브랜드의 패션위크이니만큼 많이 신경 써주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의견 충분히 반영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저번에 보완해야 한다는 부분은 어떻게 되었죠?”

“그 부분은 동영상을 참조해 주십시오.”

그녀가 리모컨 단추 하나를 누르자.

영상이 스크린에 나타났다.

“런웨이를 시뮬레이션했습니다.”

“의상 디스플레이를 뒤로 옮겼네요.”

“네, 런웨이 중 시선을 분산시킨다는 의견들을 수렴해. 무대 뒤로 디스플레이 8k 영상으로 대체할 생각입니다. 의상의 런웨이가 시작되면 다른 색상의 의상도 영상으로 나타날 겁니다. 하지만 보이는 건 실제 디스플레이 전시처럼 보일 겁니다.”

“좋네요. 이대로 진행하죠.”

회의가 마무리되어갔다.

드디어 오랜 시간을 공들인 결과물을 발표할 시간이다.

“근데 권진호 과장은 안 보이네요.”

“…….”

“무슨 일 있습니까?”

“그게…. 오늘 갑자기 사직서 제출하고 잠적했습니다. 보고드리려 했는데 바로 회의에 들어오는 바람에 늦었네요.”

“갑자기요?! 무슨 일 있었습니까?”

“아니요. 아무런 낌새도 없어서 저도 좀 당황스러웠어요. 절대 그럴 놈이 아닌데.”

“신 디렉터님이랑 친하지 않았어요?”

“친하다기보다. 욕심도 있고 이직도 생각 중이라길래 제가 스카우트한 거죠. 성격은 꿍해도 능력만큼은 대단하거든요. 한국대 경영 출신에 패션디자인도 부전공한 수재인데 하…. 조금 더 키워서 해외지부 개설하면 그쪽으로 보내려고 했는데 조금 아쉽네요.”

“뭐 어쩔 수 없죠. 일단 마무리합시다.”

“네.”

떠나가는 사람 잡을 정도의 여유가 아직은 없다.

우리 아리raM은 함께 달려나가며 높은 정상을 향해 가고 있다.

만약 도태되고 지쳐있다면 나는 충분히 그들을 이끌어나갈 거다.

하지만 포기한다면 함께할 수 없다.

그런 연유에 한 명 한 명에게 마음을 쓰지 않기로 했다.

* * *

기다리고 기다렸던 S/S 서울 패션위크가 개막했다.

총 5일에 걸쳐 한국의 유명 브랜드의 신상품을 알리는 컬렉션이 열릴 예정이다.

DDP 주위에는 패션을 좋아하는 시민들과 개인방송을 하는 뉴튜버가 한데 섞여 진풍경을 자아냈다.

날로 서울 패션위크의 인지도가 상승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나와 신 디렉터는 설치된 무대를 점검하고 무대 뒤로 이동했다.

우리가 대기실에 들어서자.

나를 향해 누군가가 크게 소리쳤다.

“총각!”

“할머님들 오셨어요.”

“그래 우리 여기까지 오는데 혼쭐날 뻔했어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죄송해요. 사람들이 올해에 유독 많이 몰렸다고 하더라고요.”

“뭐 총각이 그것까지 미안하면 어째. 버스도 전세해주고 우리 모셔 온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걸요.”

아침 일찍부터 이곳에 오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화사한 화장과 휴가 때는 보지 못한 이쁘고 깔끔한 옷들을 입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 설레하는 표정을 마주하니 나까지 힘이 샘솟는 거 같았다.

“근데 진짜 우리가 이렇게 큰 패션쇼에 올라가도 되나요. 걱정되는데.”

“정말 부담 없이 무대에 올라가셔도 됩니다.”

“그래도…….”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뜻깊은 무대가 될 겁니다.”

나는 그곳에 있는 16명의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고개 숙였다.

“우리가 고맙지 이런 멋진 일도 하게 해주고 말이여.”

고맙다라.

할머니 한 분의 말에 나는 다시 한번 가슴이 뭉클해졌다.

* * *

그날 나는 할머니들을 마을 회관에 모아놓고 내 의사를 전달했다.

“무슨 일이여. 동네 사람들 다 왔구먼.”

“아…. 잘생긴 총각이 우리한테 할 말이 있다네요. 그래서 제가 이장한테 부탁했어요.”

“그랴. 먼 일이데?”

“저도 몰라요. 들어보면 알겠죠.”

나는 웅성거리는 할머니들 앞에 섰다.

“번거로운데 모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할머니들 제가 뭐 하는 사람 같으세요?”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아!”

“맞아.”

“하하하. 제 질문이 잘못되었네요. 저는 옷을 디자인하고 만드는 사람이에요. 들어보셨을 거예요. 패션디자이너라고.”

“아…. 그 앙드레 김 같은 사람인가.”

“네, 맞아요. 앙드레 김 선생님 같은 패션디자이너입니다.”

나는 내 직업을 상세하게 할머니들에게 말해드렸다.

어떠한 과정을 거쳐 의류와 가방이 만들어지는지 상품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진행한다는 것까지.

모든 걸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아.

가장 중요한 건 이제 말할 거니까.

“그래서 우리는 왜 부른 거야.”

“곧 있으면 패션쇼를 할 겁니다. 패션쇼를 열어 제가 운영하는 브랜드를 알리는 겁니다. 멋진 옷과 가방, 구두, 신발을 소개하는 자리죠. 그 무대에 할머니들이 제가 만든 옷을 입고 올라가 주셨으면 합니다. 분명 뜻깊고 아름다운 날이 될 겁니다.”

“…….”

하지만 내 의견에 모두 바닥만 바라볼 뿐 선뜻 나서는 이 하나 없었다.

그때 마을 이장인 전미숙이 나에게 슬며시 다가왔다.

“진혁 총각 잠시 나 좀 볼까요.”

“네.”

나는 문 하나를 넘어 텅 빈 거실에서 그녀와 단둘이 대화를 이어갔다.

“할머니들은 세상에 나가는 걸 무서워하세요. 괜히 얼굴이 알려져 자식들한테 피해가 가지 않을까 하고 총각 마음은 알겠지만 없던 일로 하는 게 좋을 거 같네요.”

“저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를 믿고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하…. 할머니들의 아픔을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그녀의 말에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영상에서 본 그 사건만이 그녀들의 아픔의 다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평생 자신의 마음을 감옥으로 만들고 피해만 다녔다면 한 번쯤은 그것들과 부딪혀보길 바랐다.

나는 이장님을 뒤로하고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해요. 근데 과거의 일은 할머님들이 잘못한 게 아니잖아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저는 할머니들이 피해자고 더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 말고도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라도 세상에 할머니들의 아름다웠던 청춘을 다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마지막 내 의견을 전달하고 다시 한번 고개 숙였다.

복잡한 생각에 머리가 무거워져서 다시 들 수가 없었다.

그때.

전여사 할머니가 나에게 다가와 내 머리를 감싸 안으며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으셨다.

“나 같은 늙은이도 그런 무대에 올라갈 수 있나요?”

“네, 어느 때보다 아름답게. 오랜 예전의 아름다운 시절로 되돌려 드리겠습니다.”

“그럼 나는 하고 싶어요. 손주들한테 할머니가 멋진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부탁해요. 잘생긴 총각.”

“물론이죠.”

전여사 할머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 앉아있던 할머니들 모두가 말을 이었다.

“나도 해도 될까?”

“그럼요. 할머니에게 가장 어울리는 의상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럼. 나도 한번 해보려네.”

“감사합니다.”

“그럼 나도!”

“나도.”

나는 할머니들의 당당하고 자신감을 가진 표정을 보며 안도했다.

내 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전미숙의 표정도 아까와는 다르게 한결 밝아 보였다.

“제 생각이 짧았나 봅니다. 진혁 총각 말이 맞았네요. 잘 부탁해요.”

“이장님도 함께 올라가 주세요.”

“그럴게요. 그 말 안 했으면 섭섭할 뻔했어요.”

“그리고 모든 지원은 제가 하겠습니다. 할머니 한 분 한 분 치수는 저희가 가기 전에 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전문모델도 파견해 드리겠습니다.”

“네, 그래요.”

.

.

.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맞은편에 있는 신 디렉터에게 말을 건넸다.

S/S 서울 패션위크 2.

* * *

다른 직원들을 뒤로하고 신 디렉터에게 부탁했다.

그나마 넉살 좋은 신 디렉터를 이뻐하는 할머님들이 많았고 그녀도 살갑게 할머니들을 챙겼다.

“신 디렉터님이 할머님들 대기실로 안내해 주세요. 다른 사람들은 불편해하실 거 같아서요.”

“저도 그러려고 했답니다.”

“그리고 메이크업 아티스트들한테 신경 좀 많이 써 달라고 부탁해주세요. 저는 일단 의상 전개도 한 번 더 확인하고 할머니들 의상 대기실로 이동할게요.”

“네, 걱정하지 마시고 갔다 오세요.”

나는 패션디자이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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