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200)

“사장님! 여기요.”

“빨리 오셨네요.”

“저희도 방금 도착했어요.”

아버지와 어머니, 다니엘이 내 뒤를 따라 차에서 내리자.

모두가 우리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그때 사전에 온다는 말도 없이 나타난 두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 씨랑 현수 씨는 어찌한 일로?”

“섭섭하게 이러시기예요. 놀러 가면 당연히 우리도 같이 데리고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대표님 실망이에요.”

“아니. 이건 공식적인 게 아니라서요. 근데 진짜 어떻게 아신 거예요?”

내 물음에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신지혜가 나를 보며 답했다.

“아 제가 하율이 언니도 일에 찌들어 사는 거 같아서 같이 가자고 말했거든요. 근데 언니는 일정이 있어서 못 오고 대신 하나 씨가 온 거예요.”

“아, 그래요.”

그때 옆에 있던 안현수가 나에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차에 실린 짐을 빼기 시작했다.

“제가 뺄게요.”

“아니요. 이게 편해서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대표님.”

“감사합니다.”

그는 버릇처럼 짐들을 꺼내.

마을 회관 앞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다들 들어가서 인사드리죠.”

“그래요.”

“네.”

우리가 마을 회관 안으로 들어가자.

낯익은 분이 환한 미소를 머금고 문 앞에서 나를 반겨주셨다.

“아이고 총각 왔어요.”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을 내가 그날 얼마나 큰 신세를 졌는데요.”

할머니는 나와 모두를 반기며 마을 회관 안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가 마을 회관 안으로 들어서자.

16명 남짓의 할머니들이 우리가 온 걸 환영해 주셨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하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검붉은 빛….’

공간 가득 메울 듯이 검붉은 빛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나는 처음으로 두려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무서워….’

김현석 때보다 몇 배는 더 강렬하고 어둡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공기가 무거워졌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검붉은 빛은 공간을 메워왔다.

잠시 후 칠흑 같은 어둠이 내 두 눈을 집어삼켰다.

할머니들의 마을 2.

* * *

칠흑 같은 장막이 걷히자.

흙먼지가 가득한 평야에 여러 채의 천막이 쳐진 모습이 드리웠다.

“여기는….”

전쟁터인지 알 수 없지만, 무수히 많은 일본군이 총과 칼을 차며 희희낙락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이동을 하던 그들은 차례대로 어느 천막을 들락날락하는 모습을 포착했다.

그런데 천막을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구토가 나올 정도의 어두운 감정이 느껴졌다.

“웩!”

괴로울 정도로 헛구역질이 일어났다.

마치 손으로 내장을 끌어내고 싶은 심정이 들었고 고통과 불쾌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점점 다리에 힘이 풀렸고 눈꺼풀도 힘을 버티지 못하고 떨어졌다.

“하…….”

그 순간!

천막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수도 없는 어린 여자아이들의 목소리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그곳으로 달려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몸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움직이지 않는다.

내 귓가에 들려오는 어린 소녀들의 목소리는 한없이 슬펐으며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받는 듯했다.

“제발! 움직이라고.”

나의 간곡한 부탁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비명이 점점 줄어들었고 천막에서 군인 한 명이웃는 얼굴로 빠져나왔다.

“조센징은 반항하는 맛이 있다니까.”

그때!

군인 뒤로 키가 140cm도 되어 보이지 않는 어린 여자아이가 헐벗은 몸으로 달려들었다.

“죽어!”

그 소녀는 있는 힘을 다해 일본 군인의 등에 날카로운 쇠붙이를 심어 넣었다.

하지만 손아귀에 힘이 없던 그녀의 쇠붙이는 군인의 옷도 뚫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으악! 빠가야로! 탕! 탕!”

정말 한순간이었다.

어떠한 죄책감도 없이 어린 소녀의 몸에 총알을 심어 넣었다.

“어째서! 왜…….”

그들은 쓰러진 여자아이를 보며 크게 웃으며 다시 윤간을 저지르고 있었다.

너무 비인륜적이다.

인간이라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그런 짓이다.

“조선년들은 이래서 좋다니까. 쉬운 적이 없어.”

“몸을 주는 부역자 년들! 퉤!”

그들이 어린 소녀들에게 행한 짓과 저 만행.

마치 자신들을 위해 몸을 바치는 사람이라 생각하는 저 더럽고 역겨운 놈들을 보며 참을 수가 없었다.

“으악!”

억지로 몸을 움직이려 할수록 무언가가 나를 잡아끌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듯이 말이다.

나는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아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왜 나한테 이런 것들을 보여주냔 말이야. X발!”

너무 원통했다.

너무 생생해서 화가 억눌러지지 않는다.

내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때.

어두운 장막이 다시 눈앞을 어둡게 만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흘러나오는 영상에 집중했다.

단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들의 아픈 마음을 내가 기억하고 감싸 안으며 모두에게 알리고 싶었다.

“석환아. 얼른 들어와서 밥 먹어.”

서른 초반으로 보이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얼굴이 낯설지 않다.

“전여사 할머니….”

그녀는 나타나지 않는 아들을 찾아.

집을 빠져나가는 그때.

흙먼지를 가득 덮어쓰고 나타난 자기 아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얼굴은 또 왜 그래?”

“…….”

“석환아.”

“왜 엄마는 나를 낳은 거야. 동네에서 몸 판 여자의 아들이라는 말을 내가 왜 들어야 해!”

“미안하다. 아들 미안해….”

“왜 낳았냐고!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냐고 말을 해봐. 나도 엄마가 부끄러워 그리고 싫어!”

“…….”

그녀는 아들의 말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말을 하고 싶지만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도 몰랐고 그저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멍하니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자.

아들은 그녀를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는 눈물을 훔치고 아들의 방 앞 마루에서 조용히 말을 이었다.

“석환아. 밥 먹어 엄마가 미안해. 응…. 아들….”

“…….”

하지만 그 방에서는 어떠한 대답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옆집에 사는 할머니가 다급하게 달려와 그녀에게 말을 이었다.

“석환이 어멈 큰일 났어. 석환이 아비가.”

“석환이 아버지가 왜요?”

“그게…. 약초 캐러 가다 산에서 굴러떨어졌다네. 어서 동문 앞으로 가봐.”

그녀는 순간 머리가 하얘졌는지 동공이 흐려졌다.

“어서 가봐.”

“네.”

할머니는 머리에 쓰고 있던 보자기를 마루에 던지고는 동문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뛰어가니 동네 사람들이 한가득 모여있었다.

“석환이 아버지.”

“형수 미안하오.”

“뭐가요. 석환이 아버지가 어떻게 됐는데요.”

그 물음에 남자는 몸을 슬쩍 비켜 세웠다.

그러자 남자의 뒤에는 남편이 덩그러니 두 눈을 감고 차디찬 바닥에 누워있었다.

“석환이 아버지!”

그녀는 온기 하나 없어 보이는 자신의 남편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제발 깨어나라고 흔들어 보고 축 처진 몸을 일으켜 세워도 봤지만, 그는 이미 세상과 작별을 한 상태였다.

그녀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만을 흘릴 뿐이었다.

“저 봐. 남편 잡아먹을 여자라니까.”

“몸 판 년이 어련하겠어. 남편도 잡아먹고 아들도 잡아먹을 것이네.”

“문덕이 아니었으면 지가 여기 어떻게 발붙이고 살아. 이제 문덕이도 이리되었으니 마을을 떠나야지.”

주위에 모여있던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향해 들으라는 듯이 서슴없이 말을 이었다.

그녀는 억누르고 있던 감정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악을 쓰듯 말을 이었다.

“그래요…. 제가 내 몸 하나 못 지켜서 일본놈들한테 그런 몹쓸 짓을 당했어요. 근데 제가 잘못한 거예요. 못 먹고 못 배워서 공부시켜주고 배 안 굶게 해준다고 해서 따라갔을 뿐인데 왜 다들 왜!”

그녀는 말을 끝내! 잇지 못하고 주저앉아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함께 산에 올라갔던 마을 청년은 그녀의 남편을 지게에 들쳐메고 그녀를 챙겨 집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그들의 뒷모습으로 영상이 끝이 났다.

“하…….”

내가 눈을 뜨니.

검붉은 빛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들의 미소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슬픔으로 가득 차올랐다.

할머니들이 얼마나 힘들고 고단한 인생을 살아왔을지 생각해 보니 왈칵 눈물이 쏟아질 거 같았기에.

“아이고 전여사 할망구 말대로 진짜 잘생긴 총각이네.”

“그러게 말이오. 형님.”

“잘 오셨어요. 저는 마을의 이장을 맡고 있는 전미숙이라는 사람이에요. 내가 여기서 제일 젊어.”

“그러시군요.”

나는 고개를 숙여 이장님에게 인사드렸다.

“이틀만 신세 지겠습니다.”

“신세는 무슨 우리 할머니가 신세 졌더구먼.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 먼 길 가신다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또 이런 멋진 총각이 도와주고 복이 있나 봐요.”

“아니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요.”

우리는 이장님의 안내를 받고 짐을 풀었다.

그때 전여사 할머니가 나에게 다가와 말을 이었다.

“점심도 못 먹었을 텐데 우리 집으로 가요. 내가 밥해주고 싶어서 준비 다 해뒀으니까.”

“힘드셨을 텐데…. 저희 때문에 죄송합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했는데 뭘.”

나는 한 분 한 분 할머니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마을 회관을 빠져나왔다.

그때 할머니들과 수다를 한창 떨고 있던 다니엘이 마을 회관을 빠져나왔다.

“배고파 죽겠네.”

“할머니랑 할아버지는?”

“아 점심 먹고 오셨다고 마을 회관에서 쉬신대. 할머니들이 두 분 잘 챙겨 주시네.”

“좋은 분들이시더라.”

“맞아 진짜 좋은 분들이신 거 같아. 근데 사장 궁금한 게 있는데 왜 여기는 할아버지들이 한 명도 없데?”

“흠…. 그러고 보니.”

나도 궁금했던 점이기는 하나.

쉽게 물어볼 수 없었다.

내가 고민을 하는 그때.

할머니가 마을 회관을 빠져나와 말을 이었다.

“다 왔으면 따라와요.”

우리는 할머니의 느린 걸음을 따라 마을을 구경하며 걸어갔다.

작은 마을이었지만 이쁜 벽화와 중간중간 심어진 화원들이 아름답게 펼쳐졌다.

어머니는 할머니 옆에 바짝 붙어 살갑게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고 장하나와 류미리는 수다 삼매경이었다.

나는 주변 풍경을 보고 있는 신지혜 근처로 가 조용히 그녀에게 말을 이었다.

“디렉터님.”

“네?!”

“혹시 이 동네에 왜 할아버지들이 없는지 아세요?”

“사장님 그것도 모르고 여기 오신 거예요?”

“네….”

“저는 다 알고 여기 오자고 하신 줄 알았어요.”

“저는 그냥 할머니랑 연이 닿아서 온 거뿐이라서요.”

“아…. 여기는 위안부 마을이라는 곳이에요. 아픈 상처가 있는 분들 한 명 한 명 모여서 마을이 되었다고 알고 있어요.”

“위안부 마을이라….”

“네. 여러 사연이 있겠죠. 위안부 사건으로 결혼을 아예 못하신 분도 많다고 알고 있어요.”

“그래요…. 흠.”

“그러니까 말조심하셔야 해요.”

“네.”

드디어 의문이 풀렸다.

그녀들은 내가 생각하는 아픔보다 더 큰 아픔을 가지고 서로서로 보듬으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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