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혜의 말처럼 그에게도 숨겨진 재능이 잠들어 있다.
그걸 깨워주는 역할을 하는 게 나와 유진태가 해야 할 일이다.
김형준의 뒤를 이어 구두 디자이너인 안정원의 차례가 다가왔다.
“다음은 구두 담당 안정원 디자이너입니다.”
그는 아침부터 우황청심환을 두 알이나 먹은 상태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차례가 다가올수록 손과 발을 끊임없이 떨고 있었다.
‘말하다 기절하는 거 아니야?’
사람이 너무 긴장하거나 경직되면 정신을 잃을 때도 있기에.
매우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아니지. 또 브리핑할 때는 딴사람처럼 행동할 거야.’
잠시 까먹고 있었다.
중간 점검 때.
그가 보여준 브리핑 실력과 디자인에 대한 자신감.
왠지 오늘도 그가 나를 포함해 모두를 놀라게 해줄 거 같았다.
“안…. 녕 하십니까! 슈…. 즈 디자이너 안정원입니다.”
“이놈아 뭘 그리 떨어! 아리raM의 슈즈 디자이너면 어깨 딱 펴고 자신감 있는 눈빛으로 발표해야지!”
“네….”
안정원이 안절부절못하며 앞도 보지 않고 자신을 소개하자.
그 모습이 답답했는지 신영길 선생님이 자신감을 가지라며 소리쳤다.
그 순간.
큰 숨을 들이쉬던 안정원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해갔다.
‘어?! 변했다.’
안정원이 프로젝트 컨트롤러를 들며 디자인 첨부화면을 스크린에 띄우는 순간.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징크스 같은 건가?’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나.
내 가슴은 이상하리만큼 설레기 시작했다.
아니 믿음이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정한 디자인의 콘셉트는 전통 디자인의 혁명입니다. 컬러는 의상디자인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소재는 스웨이드로 부드럽고 고급스러움을 내는 원단과 소가죽입니다.”
“한국 전통 디자인의 혁명이라.”
안정원의 말을 듣고 황의선 선생님이 조용하게 읊조렸다.
자신이 만들고 있는 신발의 혁신을 디자인했더라.
흥미가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첫 번째 디자인은 꽃신을 변형시켜 보았습니다. 중간 점검 때 부족했던 액세서리 부분과 소재 부분에 변형을 주어 더욱 트렌디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거기에 아리raM 로고, 캐릭터를 만들어 넣어볼 생각입니다. 스니커즈에 주로 사용되는 방법이지만 구두에 접목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와….”
“좋네요.”
“진짜 아이디어 좋다.”
한 명 한 명이 그의 디자인을 보며 감탄했고 설명이 곁들여지자.
더욱 뚜렷하게 와닿았다.
“다른 디자인도 한번 봅시다.”
“네.”
스크린이 넘어가고 광채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순간 주위는 일시적으로 멈추었고 내 눈에는 스크린의 빔에 반사되듯 밝은 빛이 내 눈을 파고들었다.
“윽!”
내가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자.
매트릭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수천, 수만 켤레의 구두가 미끄러지듯 전시되었다.
그 형태를 표현하자면 마치 계단형태의 선반이 몇십, 몇백 킬로로 만들어진 듯 끝도 없이 이어졌다.
“아름답다.”
이 구두들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구두들이다.
나는 이 모든 걸 누가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 다시 한번 신발 전시대가 미끄러지듯 지나가더니.
내 눈앞에 안정원과 흡사하게 생긴 늙은 사내가 모습을 드리웠다.
그는 빛보다 밝은 정장을 입고 있었고 머리는 빛에 바랬는지 금빛보다 더 밝은 느낌을 띠고 있었다.
“모두 아름답구나. 오늘은 네가 세상을 나갈 차례다. 이제 밖의 세상에 나가자꾸나.”
그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구두 하나를 들고 어둠으로 향해갔다.
“이번 시즌에 만든 구두?”
안정원과 닮은 사람이 들고 있는 구두의 디자인 형태를 보아.
조금 전에 본 스웨이드 형태의 구두와 흡사하다.
하지만 다르다.
두꺼운 무광택의 소가죽으로 단아하고 깔끔함을 살린 디자인이었다.
“이곳이구나. 어서 가거라.”
그는 어둠이 물결치는 강에 신발을 흘려보냈다.
그리고는 뒤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설마…. 날 보고 있는 거야?”
그는 나를 보며 손짓하지도 부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온 전신에 소름이 끼쳐 왔다.
“불길하다.”
그가 나를 향해 씩 웃어 보이더니.
영상이 끝이 났다.
‘젠장! 뭐였지….’
이때까지와 또 다른 형태다.
모든 영상이 의미하는 걸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느낄 수 있었다.
이번만큼은 미래도 과거도 아니며 성공의 지표가 되어주는 상징적인 영상도 아니라는 걸.
‘뭐였을까.’
그때 내가 처음 본 구두 몇 개가 떠올랐다.
근데 신기하게도 형태만 떠오르지 전체적인 디자인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분명 베스트가 될 수 있는 구두였는데…. 왜 기억이 안 나는 거야!’
내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자.
옆에 있던 류미리가 내 귀에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어디 아프세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네. 무슨 일 있으면 말해주세요. 제가 대신 가방 디자인 설명해도 되니까.”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안정원의 회의에 집중했다.
내가 스크린에 눈을 돌리는 순간.
그 남성이 흘려보낸 신발이 안정원이 만든 디자인과 같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진짜 미치겠네.’
1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 동안 이 능력의 비밀을 아직도 파헤치지 못했다.
너무 변칙적이고 능력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 무렵 안정원이 발표를 마무리했다.
“이상입니다. 디자인에 이상이 없다면 이대로 생산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상 없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생산가치가 있고 상품의 디자인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모두가 안정원의 구두에 대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유진태가 날카로운 눈매로 안정원을 바라보며 손을 들고 말을 이었다.
“자네 구두 디자인을 어디서 배웠나? 신입이 할 수 있는 수준의 디자인이 아닌데. 차 대표 자네가 가르친 거야?”
“저는 아닙니다.”
“그럼. 혼자서 저 정도 기술을 익히고 디자인을 만들었다는 말이야?”
그는 매서운 눈으로 다시 안정원을 응시했다.
“말해봐. 설마 어디서 카피해온 건 아니겠지?”
“카피는 아닙니다.”
“카피는 아니라 그럼?”
“제가 한 게 맞기는 하는데….”
“똑바로 말 안 해! 이 사항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 말을 흐려?!”
나는 안정원의 좋은 점만 바라보았다.
그런 이유에 단 한 번도 그의 디자인을 의심하지 않았다.
‘설마…….’
유진태는 그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다.
나는 안정원의 능력이 너무 뛰어나서 발생한 일이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유진태의 경력이라면 디자인 수준을 판가름하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것이다.
“당장 말 안 해!”
유진태는 화가 가득 섞인 말투로 안정원을 몰아세웠다.
최종 디자인 회의 3.
* * *
안정원은 안절부절못하며 주위의 시선을 피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몽유병(Sleepwalking)이 있습니다.”
“몽유병?!”
“네. 제가 몽유병이 있는데. 엉성한 디자인 초안을 그려놓고 자는 날이면…….”
“하 답답하네. 말 좀 빨리하게.”
“자면 구체화한 구두 디자인이 책상 위에 스케치 돼서 올려져 있습니다. 그걸 제가 다시 옷을 입히듯 색채나 소재를 정합니다. 처음에는 낯설기도 하고 정말 내가 한 게 맞나 의심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근데 정말 제가 한 게 맞았습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믿어주세요.”
“…….”
그의 발언에 회의장에 있던 모두가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경우를 들어 본 적이 있다.
나는 안정원을 대신해 부가설명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몸이 앞서나갔다.
“잠시만요.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래 차 대표가 말해보게. 우리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니.”
“몽유병 예술(Sleepwalking art)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그건 뭐야?”
나는 노트북을 프로젝터에 연결해.
내가 알고 있는 사건을 찾아 스크린 화면에 띄워 설명을 이어갔다.
“이 사람은 영국의 리 해드윈 화가로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오래 배웠는데도 실력이 형편없어 상점판매원으로 살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책상 위에 훌륭한 그림이 그려져 있어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줄 착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이런 일이 반복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자기 자신의 자는 모습을 촬영했는데.”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자신이 잠을 자는 도중 일어나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가 잠든 사이 그림을 그리는 영상을 저도 본 적이 있습니다. 안정원 디자이너의 말이 정말이라면 이 증상과 흡사합니다.”
“참 세상에 별일이 다 있구먼.”
‘그럼요. 저한테는 더한 일도 벌어지고 있는데요. 이 정도는 웃긴 거죠.’
모두가 의아한 표정으로 안정원을 바라보고는 있지만 내 말과 정보에 신빙성을 확증 받으니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스크린 앞에 나아가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이 또한 안정원 디자이너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쁘게 봐주십시오. 유진태 선생님.”
“나야 카피디자인만 아니면 저런 천재를 어찌 안 이뻐할 수 있단 말이야. 내가 왜 의심을 했는지 아나?”
“왜 그런 생각을?”
“저 신발이 만들어지고 신는 사람들의 발의 상태가 예측되었단 말이지. 근데 아주 편안하고 아름다운 신발이야. 저 정도 디자인을 하려면 최소 10년 이상 제작과 디자인을 함께 배워야 가능한데…. 하. 진짜 허망하네. 하하하.”
“그 정도입니까.”
“저번에 보니 자네도 신발에 무지하지 않더구먼. 자세히 봐봐.”
제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신발을 10년 해도 그런 건 모르거든요.
“내가 미안하게 됐어. 안정원 디자이너. 이제부터 내가 저 디자인대로 이쁘게 신경 써서 만들어 줄 테니까. 내 사과를 받아주게.”
“아닙니다. 제가 미리 말씀 못 드린 점 죄송합니다. 그리고 구두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내가 한 가지 권유를 하지! 아니다 강요야.”
“네…. 강요요?”
“자네도 형준이랑 함께 안산으로 내려와서 나한테서 신발에 대해 배워. 언제까지 그런 방법에 기댈 생각이야?!”
“그건….”
“나는 함부로 내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아 그러니 내 말 따라.”
“네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토즈 시절의 안 좋은 기억 때문에 자신의 기술을 잘 알려주지 않는 그였다.
하지만 김형준과 안정원은 예외로 둔듯했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이지. 유진태 장인도 궁금한 거야. 저 둘이 얼마나 성장할지.’
이로써 의류, 스니커즈, 슈즈까지 최종 디자인 회의가 끝이 났고 내 가방 디자인을 발표할 시간이 다가왔다.
“다음은 총괄디자이너 차진혁 대표가 가방 디자인을 발표하겠습니다.”
나는 준비한 자료를 들고 스크린 앞으로 나가.
모두에게 고개를 숙였다.
“모두 바쁘신데 모여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S/S 시즌을 빛내고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는 가방 디자인을 생각하며 만들었습니다. 이번 디자인은 재미있게 봐주십시오.”
“대표는 대표네 말도 잘하고.”
“감사합니다.”
신영길 선생님의 농담에 모두가 크게 웃었다.
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디자인을 발표했다.
“제가 이번에 선보일 디자인은 도형 백 시리즈입니다. 열 가지 도형 모양을 주제로 삼아 모양에 가장 적합한 용도로 내·외부를 디자인했습니다. 가방마다 설명을 이어붙여 판매할 생각입니다. 가장 처음으로 보여드릴 디자인은 가방 보관함 디자인입니다.”
“보관함?”
“네. 마케팅 부분도 신경 써서 만든 가방으로 4개의 가방을 구매할 시 1개의 가방 보관함을 지급할 겁니다.”
그때 유진태 장인이 감탄하며 말을 내뱉었다.
“아이디어 좋은데.”
“감사합니다. 보관함 디자인은 중심에 나전으로 작게 아리raM의 로고가 새겨지고 외면 전체를 유기 칠을 할 겁니다. 한국의 고급스러움과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가방을 간직하기에 더없이 좋은 디자인이라 생각합니다.”
“나전장이 고생 좀 하겠구먼.”
나는 며칠 전 나전장 신영길 선생님 공방과 부부 장인이 운영하는 공방을 찾아.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모두 내 의견을 흔쾌히 수락해주었고 다행히 물량을 소화할 수 있다는 확답까지 받은 상태였다.
“나전은 걱정하지 말고 가방이나 빨리 보여줘 봐 궁금해 죽겠네.”
“이 영감아 좀 기다려. 어련히 보여주려고.”
“오늘 싸우자는 거야? 황의선이 많이 컸다.”
“너보다 원래 컸어! 땅딸막한 게.”
“그만들 좀 하세요. 선생님들.”
“이것 봐라. 안윤호 너는 누구 편이야.”
황의선과 신영길의 말싸움에 안윤호 선생님이 등이 터질 위기였다.
나는 그들의 상황을 종료시키기 위해 큰소리로 회의를 이어갔다.
“궁금해하시는 가방 디자인 이어서 발표하겠습니다.”
“좋지!”
나는 스크린을 넘겨 내가 만든 백인 하트와 육각 그리고 스타 모양을 먼저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