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습니다.”
나는 종이에 적힌 주소로 그녀의 발걸음에 맞춰 이동했다.
“총각은 몇 살이에요?”
“올해 28살입니다.”
“그래요. 젊은 나이네.”
“할머니는 어디서 오셨어요?”
“나는 경북 경산에서 왔어.”
“멀리서 오셨네요. 어디 가시는데요?”
“아…. 그냥…. 아는 사람 만나러.”
할머니는 내 질문에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아는 사람이라는 두리뭉실한 말로 대처했다.
나는 개의치 않고 그녀는 종이에 적힌 곳으로 안내했다.
“할머니 여기네요.”
낡은 주택가 중간에 있는 녹색 대문이 눈에 들어왔다.
같은 강남이지만 동네 하나를 거쳐오니 낡은 주택가가 즐비했다.
“고마워요. 총각.”
“별말씀을요.”
“이제 가봐요. 바쁠 텐데.”
“네. 그럼 볼일 보고 조심히 내려가세요.”
우리가 대문 앞에서 대화를 이어갈 때쯤.
중년의 사내가 대문을 열고 나타났다.
“어…. 어머….”
그는 차마 그녀를 부르지 못하고 말을 흘려버렸다.
“아드님 되시나 봐요?”
“…….”
“하…….”
내 질문에 아무 말이 없는 둘을 차례대로 바라봤다.
그때 중년의 사내는 갑자기 화가 잔뜩 섞인 말투로 그녀에게 말을 이었다.
“여기는 왜 오셨어요. 애들이랑 애들 엄마 보면 어쩌려고!”
“그게. 하도 연락이 없어서 얼굴 한번 보러왔다. 미안하다.”
“이제 돌아가세요. 얼굴도 충분히 보셨으니까!”
쾅!
중년의 사내는 대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석환아!”
할머니의 간절한 부름에도 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굳건히 닫힌 대문만을 바라볼 뿐.
나는 이런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감이 서질 않았다.
그러던 와중 나를 더 마음 아프게 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할머니….”
할머니는 자신의 가방 속에 들어 있는 박하사탕 한 봉지를 꺼내 대문 앞에 놓아두고 몸을 돌렸다.
내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괜찮다는 듯 환하게 웃어 보이며 말이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내가 총각한테 못 볼 꼴을 보였네요. 미안해요. 아들놈 얼굴 봤으니 나는 다시 내려가야겠어.”
“네?!”
할머니는 아들이라는 사내에게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녀의 기구한 사연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할머니를 그냥 돌려보내면 안 될 거 같았다.
“혹시 할머니 저랑 밥 한 끼 드실래요?”
“에이 됐어요. 신세 지고 싶지 않아요. 터미널은 어떻게 또 가나…. 하.”
“그럼 식사는 다음에 하시고 제가 터미널까지 모셔다드릴게요.”
“…….”
할머니는 그래 줬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미안한 마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그런 모습을 이해하고 할머니의 손을 잡고 터미널로 향했다.
“이 근처에요. 멀지 않으니까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그럼 부탁 좀 할게요.”
나는 천천히 그녀와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실례되는 질문인지 아는데. 아드님이 많이 화가 나셨나 봐요.”
“내가 못난 엄마라서 그렇죠. 뭐.”
“못난 엄마가 어디 있나요. 낳아주시고 길러주셨는데.”
“…….”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할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제가 실수했네요. 할머니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 말이 참 듣기 좋아서. 우리 저기에 좀 앉았다가 갈까요? 다리가 아파서.”
“네 그러세요.”
우리는 잠시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았다.
잠시 후 한숨을 내쉬던 할머니가 나에게 말을 이으셨다.
“총각은 만약에 자신의 어머니가…….”
그녀는 다시 한번 무거운 이야기를 가슴에서 꺼내기 위해 애쓰는 듯했다.
“만약 자신의 어머니가 위안부라면 어떨 거 같아요?”
“위안부요?!”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 단어에 나는 가슴에 무거운 돌을 올린 듯 막막함을 느꼈다.
어려운 질문이었다.
만일이라는 가정이 있지만 분명 이 질문의 모순은 할머니가 그 당사자일 확률이 높다는 거다.
“만약 저희 어머니가 그랬다면 가슴 아팠을 거 같아요. 가족이라고 어찌 그 상처를 다 감싸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저라면 자랑스러워했을 거 같아요. 살아주셔서 저랑 아버지 옆에 있어 주셔서요.”
“좋은 사람이네요. 총각은…. 우리 아들도 그랬을까요?”
“그럼요. 그랬을 겁니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녀의 마음을 감싸 안았다.
“우리 아들은 나 때문에 아버지도 빨리 잃고 나 때문에 동네 사람들한테 욕도 많이 먹고 친구들이랑 맨날 싸우고 흑흑. 그래서 나는 늘 미안한 엄마예요.”
위안부로서의 아픔도 아물기 전에 주위에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상처 입은 할머니를 바라보며 가슴이 저며 왔다.
“할머니 분명 좋아지실거예요.”
“그랬으면 참 좋겠네요. 이만 일어날까요.”
네
우리는 다시 걸어 터미널에 도착했다.
“총각 만일인데. 시간 나면 우리 동네 놀러와요. 할머니들뿐이기는 한데 물도 맑고 놀 곳도 많으니까.”
“네, 할머니. 아 그리고 이거 제 명함인데 서울 올라오실 때 연락해주세요. 제가 아니라도 할머니 길 안내해줄 친구들 많으니까요.”
“그래요. 고마워요.”
나는 그녀가 버스를 타는 것까지 확인하고 터미널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들놈을 그냥…. 하.”
정말 마음 같아서는 다시 아들 집에 찾아가 따지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분명 그만의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Color&Fabric(색상과 원단 소재), Attachment(첨부하다)라는 뜻의 가방과 의상디자인을 돋보이게 하는 액세서리까지.
모든 디자인이 완성되었다.
오늘은 완성된 디자인을 점검하고 수정하는 최종 디자인 회의가 있는 날이다.
“오늘은 무형문화재 선생님들과 우리 회사를 대표하는 제작 장인분들도 모셨습니다. 그러니 디자이너들은 모두 신경 써서 브리핑 해주시길 바랍니다. 시작하겠습니다.”
신 디렉터가 전체 회의 진행을 맡았다.
그녀의 의미심장한 말에 직원 모두가 긴장하고 있었다.
“먼저 의상 담당 류미리 수석 디자이너가 발표하겠습니다. 궁금증과 문제점이 있다면 수시로 질문받도록 하겠습니다.”
류미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에 앉아 계시는 무형문화재 선생님들과 제작 장인들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자료를 들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S/S 시즌 의상디자인 콘셉트와 컬러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화면을 봐주십시오.”
그녀가 손짓하는 순간.
커다란 스크린에서 나와 그녀가 만든 메인 드레스 한 벌이 떠올랐다.
의상 한 벌에 여러 가지 소재와 색상, 부가설명이 잘 나타나 있는 PPT 형식의 파일이었다.
지켜보는 모두의 의상에 대한 이해도를 올려 줄 것이다.
“S/S 시즌 콘셉트는 로맨티시즘으로 아름다운 컬러로 의상을 부각해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싶은 여성 마음을 대변하고 싶었습니다. 현재 앞에 보이는 대로 밝은 네온색을 사용해 톡톡 튀는 아름다움을 표현해 보았습니다. 컬러로는 옅은 가지색과 아이보리, 주황색, 연두색, 형광색과 여러 가지 메탈 컬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디자인이 많이 바뀌었네요. 이유가 있습니까?”
“네. 수정을 거듭했고 고객의 수용 범위를 넓혀 부담되지 않으며 더 안전하고 편안하게 입을 수 있게 변경했습니다.”
신지혜의 질문에 그녀가 거침없이 답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수석 디자이너라는 직함이 전혀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자인 부분 설명 이어가시죠.”
“네.”
그녀는 다시 화면을 넘기며 설명을 이어갔다.
“포켓을 드레스 전면에 집어넣어 포인트를 만들었습니다. 포켓 일부에는 아리raM의 변형 로고를 프린팅해 넣었습니다. 독특하면서도 브랜드를 알릴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그녀의 브리핑이 아주 부드럽게 이어졌다.
그런데 그때.
“저기?”
“네, 말씀하세요.”
끝자리에 앉아있던 안산공장의 재봉틀 장인이 손을 들고 질문을 이었다.
최종 디자인 회의 2.
* * *
“하단에도 포켓이 많은데 저곳에도 포켓을 넣을 생각인가요? 그럼 제작이 복잡해질 거 같은데요.”
“보시는 것과는 달리 드레스 하단에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자세히 보시면 포켓이 아닌 포인트를 주기 위해 아리raM 로고가 들어간 천을 덧댄 겁니다. 힘든 작업은 아닐 겁니다.”
“그렇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그녀는 똑 부러지는 설명을 이어가며 모두를 집중시켰다.
그렇게 화면을 넘기며 설명을 이어갔다.
“드레스의 소매에 레이어드와 버터플라이를 채용해 아름다움을 더욱 강조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소매 소재는 레이스를 적절히 사용하여 팔 전체를 시스루로 연출했습니다.”
짝짝!
그녀의 메인 드레스 설명이 끝이 나고 박수 소리가 흘러나왔다.
“감사합니다. 이어서 회의 진행하겠습니다.”
류미리는 거침없이 브리핑을 이어갔다.
“자켓은 아리raM의 로고를 전체적으로 프린팅해 넣었습니다. 도발적이고 상품의 가치를 올려줄 거라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색상은 드레스와의 매치를 생각해 블랙과 블루, 핫핑크, 옐로우 색상으로 정했고 추후 색상을 추가할 생각입니다.”
그녀는 하의, 블라우스, 셔츠 디자인에 대한 설명을 간결하고 상세하게 모두에게 전달했다.
“여기까지입니다.”
“수고했어요.”
그녀가 모두에게 고개를 숙이는 순간.
아까와는 다른 큰 박수 소리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때까지의 노고를 보상받는 심정일 거다.
신 디렉터가 다시 마이크를 잡고 앞으로 나왔다.
“회의 진행을 빨리하겠습니다. 다음은 스니커즈 담당 김형준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소개하겠습니다.”
스니커즈는 디자이너 김형준과 장인 유진태의 합작품.
그가 만든 디자인이기는 하나.
구조학이 부족한 김형준에게 유진태의 끊임없는 충고가 합쳐져 만들어진 스니커즈였다.
김형준은 한동안 안산공장에 내려가.
유진태와 함께 디자인을 완성했다.
“스니커즈 디자인은 S/S 모델로 제가 만든 신발은 런닝화 보다 편안한 스니커즈입니다. 화면을 보면 알다시피 포인트를 준 직사각형 모양의 옆트임은 시원함을 주고 땀이 차지 않게 만듭니다. 그리고 포인트를 금속 액세서리로 주어 깔끔함과 댄디한 감성을 살려 보았습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못 신는 거 아닙니까? 그럼 문제가 커질 텐데요?”
“그 방법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찾아낸 게 이겁니다.”
그때 김형준이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이걸로 빗물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게 뭐죠?”
“고무 형태의 액세서리입니다. 고무 안에 아리raM 로고를 각인시켰습니다.”
김형준이 들고 있는 고무 형태의 액세서리는 아리raM의 로고가 장식되어있는 투명한 블루 계열의 액세서리였다.
나는 그걸 보는 순간.
그를 잠시 시험대에 올려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걸 그럼 날씨를 보고 들고 다녀야 합니까? 고객의 관점에서 너무 불편하지 않겠어요. 만약 분실하면 개별 판매를 할 건가요? 만약 고가의 스니커즈의 부속품을 유료로 판매한다면 안 좋은 이미지가 생길 텐데요.”
“흠….”
아직 생각하지 못했나 보군.
“답변 부탁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아직 그 이상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고안해보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제가 제시 하나 할게요.”
그에게 실망하지 않았다.
아직 어린 디자이너이기에 모를 수도 있는 법이었고 최종 디자인 회의란 수정을 통해 더 좋은 방향을 찾아 나가기 위해서 하는 거다.
“감사합니다. 좋은 아이디어라면 수용하겠습니다.”
“액세서리 상단에 구멍을 내고 고리를 걸도록 하죠. 신발에 달고 다니는 자체만으로 디자인이 될 수 있게. 액세서리에 어울릴만한 고리에 대한 디자인을 고안하세요. 그건 출하 일주일 전에 수정할 수 있으니까요.”
내 말에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조금의 아이디어가 그에게는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좋은 아이디어인 거 같습니다.”
“뭘요. 그 부분은 수정하고 따로 확인받으세요.”
“네.”
그는 남은 스니커즈의 설명을 모두 끝마치고 모두에게 고개 숙였다.
“디자인이 훨씬 좋아졌네요.”
“그러게요. 몇 주 동안 유진태 장인이랑 같이 있으니까 또 실력이 늘었어요. 이번 생산 일정 끝나면 또 보내야겠어요.”
“저도 그 생각했는데. 이런 속도로 성장하면 금방 월드클래스 스니커즈 디자이너 될 거 같아요.”
“그런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