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200)

나는 생각을 더듬으며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다.

트렌드의 변화와 고객이 추구하는 상품적 가치를 지니게 디자인해야 했다.

이번 시즌에는 3가지 가방을 출시할 생각이다.

“네트 백과 스카치 백 그리고 크로스백 세 개면 충분하겠어.”

네트 백은 농구대의 그물을 보고 영감을 얻은 만든 디자인이다.

그물처럼 마름모 모양이 보이지만 굶은 모와 울을 이용해.

아주 촘촘히 엮은 원단을 50㎝ 이상의 크기로 만든 일상에 편안하게 들고 다닐 수 있는 가방이었다.

나는 이 네트 백의 특정 포인트 부분에 비단을 겸비해.

아리raM의 특색을 집어넣을 생각이다.

“일단 하나 완성했고.”

내가 완성된 네트 백 스케치를 왼쪽 빈 곳에 내려놓고 다음 스케치를 이어가려는 그때.

검붉은 빛이 네트 백 스케치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 여기서 왜?”

분명 좋은 디자인이다.

그리고 나만이 아는 디자인인데 검붉은 빛이 왜?

나는 의문을 가지며 네트 백 시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무 이상 없는데…….”

나는 네트 백 스케치를 서랍 속에 집어넣었다.

검붉은 빛이 흐늘거리는 게 기분이 나빴다.

“아 씨 찝찝하게 하네.”

나는 새로운 종이에는 스카치 백을 그려나갔다.

“설마 또 그러겠어.”

스카치 백은 쉽게 뜯어 사용하는 테이프에서 영감을 얻었다.

가죽 소재의 가방으로 외부 장식 금형 안에 벨크로(찍찍이)를 집어넣어 열고 닫힘을 편하게 만든 디자인이다.

외형은 반원의 모습이지만 센시티브하고 젊은 느낌이 강하다.

전면에 나전을 심어 넣어 고급스러운 느낌을 추가할 생각이다.

“다 됐다. 역시 기존에 만든 거 쓰니까 시간 단축에 좋기는 하네.”

나는 휘파람을 불며 완성된 스카치 백의 스케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스카치 백에서도 스멀스멀 검붉은 빛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젠장!”

정말 의아할 따름이다.

검붉은 빛이 일어나는 경우는 카피, 좋지 않은 디자인, 경고나 위험, 비상식적인 일이 일어날 때만 나타났다.

근데 이 두 가지 디자인은 그 경우에 속하지 않는다.

“검붉은 빛이면 분명히 불길한 징조를 알리는 빛이잖아. 근데 왜…….”

내가 만든 디자인을 스케치했는데 불길한 일이 벌어질 게 뭐란 말인가.

“하….”

쉽게 넘길 수 없는 일이기에.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이대로 사용할 것인가 버리고 새롭게 만들 것인가.

하지만 답은 벌써 나와 있었다.

“아 진짜 짜증 나네.”

예전과 다르게 나는 빛에 유무에 굉장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지.”

왜 이렇게 검붉은 빛이 피어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 가방디자인은 쓸 수가 없었다.

작은 리스크라도 피해 가는 게 상책이기에 나는 결단을 내렸다.

“새로 해야겠네. 네트 백은 좀 아까운데. 스카치도….”

이 두 디자인을 생각하는데 그 시절 몇 달의 시간이 걸렸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고 원단과 가죽을 고르고 장식도 새로운 형식이기에 내가 디자인했다.

모든 정성이 배어있는 내 디자인이었다.

“S/S에 이만한 가방이 없는데.”

여름 시즌에 정말 어울리는 가방이다.

시원한 느낌과 편안함에서 이 두 가방을 따라올 가방이 없다.

그런 이유에 나는 아깝다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쉬었다가 하자. 바람이나 쐴까?”

나는 답답한 마음을 떨쳐 버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사무실 안쪽으로 문을 열자.

볼일을 보고 온 신 디렉터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근데 그녀를 보는 순간.

내 등줄기에 가시가 돋아나듯 소름이 쫙 끼쳐왔다.

‘이 불길한 느낌은 뭐야!’

* * *

신지혜는 회사를 빠져나와.

회사와 떨어진 카페로 향했다.

그곳에 파이널 인터내셔널 손성호 회장의 비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예요.”

“갑자기 왜 연락하신 거죠?”

신지혜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다짜고짜 따지기 시작했다.

매우 불쾌한 기분이 들어서다.

긴 생머리에 높은 힐을 신고 있는 전형적인 비서의 모습을 한 손성호의 비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신지혜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대신해서 전에 일은 사과드릴게요.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회장님께서 사과의 뜻으로 신지혜 님을 직접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저희 본사로 모시겠습니다.”

신지혜는 이것들이 왜 이러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전에는 전화 한 통을 해달라고 부탁을 해도 받아주지 않더니.

이제 와서 자신을 본사까지 모시겠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

“갑자기 왜 이러시지? 저번에는 전화 한 통 해달라는 것도 거부하시더니.”

“그때 일은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전달을 잘못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결례를 범했다고 하셨습니다.”

“아…. 그래요. 비서님이 잘못하셨구나.”

“네, 제 불찰입니다. 절 봐서라도 부탁드립니다.”

신지혜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회장의 잘못을 자신의 잘못으로 덮으려 한다는 걸.

“그리고 회장님이 사과의 뜻으로 좋은 선물을 준비하셨다고 꼭 오시라 했습니다.”

“선물? 그게 뭔데요?”

“그건 회장님에게 직접 듣는 게 어떠실까요.”

여비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사람이다.

회장이 시킨 일차원적인 방향보다 더 가볍게 신지혜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신지혜는 찝찝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번 만나봐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찰나.

‘아주 충실한 비서 두셨네.’

“그래서 지금 가면 손성호 회장 만날 수 있는 거예요?”

“네. 바로 이동하시죠.”

신지혜는 솔직히 손성호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박무식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부터 계속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조심하랬는데….’

하지만 아리raM의 미래를 위해 박무식이 말한 JB의 정체를 조금이라도 알아야 할 거 같았다.

‘아리raM을 위해서야. 아버지 때문이 아니야.’

신지혜는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켈링을 부정했다.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신 모든 이유가 켈링에 속한 인간들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한참을 이동한 후.

삼성동 인근의 파이널 인터내셔널에 도착했다.

신지혜는 여비서를 따라 건물 맨 꼭대기 층에 위치한 회장실로 향했다.

“회장님 신지혜 양 도착했습니다.”

“들어오시라 해.”

여비서가 회장실 문을 활짝 열자.

아방궁 같은 호화로운 사무실이 나타났다.

고가의 그림과 도자기가 전시되어 있었고 한편에는 양주 바가 마련돼 있었다.

“어서 오세요. 제가 전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근데 무슨 볼일이 남아서 다시 부르셨죠?”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시죠. 이야기가 길어질 거 같은데.”

손성호는 겸손한 태도로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

최대한 자신을 숨기면서 말이다.

신지혜는 떨떠름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에서 먼저 속내를 보이면 손해를 볼 뿐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다.

“차는 뭐로 드릴까요?”

“냉수나 한 잔 주세요. 속이 안 좋아서요.”

“…아 네. 들었지? 냉수 한 잔이랑 커피 한 잔 내와.”

손성호는 까칠한 신지혜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희가 실수한 부분은 김 팀장한테 들었습니다.”

“그러세요.”

“노여움 푸시고 제가 다르게 보상하겠습니다.”

“그래요. 들어나 보죠.”

“곧 있으면 패션 아시아 어워드가 일본에서 열릴 겁니다.”

“패션 아시아 어워드?”

“네. 처음 들어보시나 봅니다. 분명 아리raM 대표는 알고 있을 텐데. 이번 정상회담에서 프랑스 일본 중국 한국 대표들이 이걸로 내기를 한 모양인데.”

“내기라니….”

“깊은 내막은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 물류 지원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제가 사과의 의미로 대회의 물품 전체를 지원하겠습니다.”

“저희가 파이널을 어떻게 믿고 거래하나요. 그때 돼서 또 손 빼면 우리만 낙동강 오리 알 될 텐데.”

“흠……. 저희가 신지혜 양한테 신용을 많이 잃었나 봅니다.”

“당연한 소리를 하시네요.”

신지혜는 팔짱을 끼며 방어적으로 행동했다.

그리고 물품이야.

현재 아리raM의 힘으로도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

“뭘 원하는 게 있으신가 봅니다. 들어드릴 테니 사과만 받아주시오.”

손성호는 신지혜가 물질적인 부분보다 다른 부분에 궁금증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능구렁이네. 이래서 상사맨들 싫다니까.’

하지만 신지혜도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JB에 대해 알고 싶은데요.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

“일본 통이시라고 들었는데 JB가 일본에서 파생된 기업인가요? 이브라는 일본패션기업이 앞장서서 얼굴마담을 하고 있다는 걸. 듣기는 했는데.”

“하하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손성호의 이마에서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왜 이러세요. 저도 다 알고 왔는데. 하……. 말씀 안 해주면 저는 그냥 가겠습니다.”

신지혜는 손성호의 눈빛과 갑작스러운 행동 변화를 캐치 했다.

‘떠보는 수밖에.’

“말해 드리겠습니다. 그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

신지혜는 어이가 없었다.

선물을 준다고 왔더니 조건이라니.

하지만 이자가 아니면 알 방법이 없기에 신지혜는 깊이 생각했다.

S/S 가방디자인 2.

* * *

“들어나 보죠.”

“흠…. 그럼 제가 말하는 대가로 지혜 양이 막은 브랜드 원단유통 소문 거두어주시고 신지혜 양과의 관계개선 가능하겠습니까?”

“물론이죠.”

신지혜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자신에게는 잃을 게 없는 싸움이었다.

손성호는 오랜 침묵을 유지하며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 방을 나가는 순간부터는 지혜 양과 저만 아는 비밀이어야 할 겁니다. 피차 그게 서로의 안전에 좋습니다.”

“네, 약속드리죠.”

둘의 대화가 오랜 시간 이어졌고 신지혜의 표정이 그때그때 변해갔다.

한참 뒤에서야 이야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좋은 소식은…. 그냥 지인들에게 전화 몇 통이면 됩니다. 다음에 또 뵙죠.”

“저야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다음에는 제가 비싼 식사 한번 대접하지요. 아리raM 대표도 함께 오십시오.”

“네, 그러죠.”

그와의 관계를 어렵게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무역회사 중에서는 알아주는 곳이기에.

언젠가는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어봤다.

“그럼 전 이만.”

“조심히 가십시오. 정 비서, 신지혜 양 태워다 드려.”

“아니요. 혼자 가겠습니다.”

“그러시겠어요. 그럼 다음에 보죠.”

신지혜는 복잡한 마음으로 파이널 인터내셔널을 빠져나왔다.

“미치겠네!”

손성호 회장이 알려준 정보.

일본이라는 큰 배경과 복잡한 관계들이 얽혀있다.

만약 그가 알려준 정보가 JB의 모든 것이 아니라면 얼마나 거대한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신지혜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켈링….”

하지만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미래를 위해 현재의 일에 집중하는 게 우선이다.

“아시아 패션 어워드라. 이 대회에서 우승하는 게 우선이겠어.”

신지혜의 머리에 유럽과 미주진출이라는 야망을 지우고 아시아 패션 어워드라는 키워드가 가득 차올랐다.

그때 대형서점 앞에서 신지혜는 걸음을 멈추었다.

복잡한 일이 있을 때마다 책방이나 서점을 들러 이곳의 분위기를 만끽하면 좀 차분해지는 경향이 있기에 자주 애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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