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200)

“완강하시네요. 어쩌지….”

나는 유진태에게 꼭 신발 제작을 맡기고 싶었다.

그가 만든 신발이 곧 명품이다.

“따라가 보죠.”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 공장 옆에 마련되어 있는 작은 방 하나에 들어갔다.

“왜 자꾸 따라다녀!”

그곳에서 그가 만든 수십 개의 토즈의 오래전에 출시된 신발들이 보였다.

추측하건대 그가 근무하던 시절 만든 작품들일 것이다.

“선생님. 제 말 좀 들어보시죠.”

“안 한다고!”

“이유라도 알게 해주십시오. 그래야 저도 이해가 가지 않겠습니까.”

“이유? 너희 같은 기업쟁이들 비위 맞추기 싫어.”

그의 한마디에는 깊은 애환이 쌓여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근데 아리raM은 그런 기업이 아닙니다. 만일이지만 관심이 있으시면 본사로 찾아와 주십시오.”

나는 명함 한 장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공장을 빠져나왔다.

“사장님 이대로 가도 되겠습니까?”

“어쩔 수 있나요. 본인이 안 하겠다고 하시는데.”

토즈 장인들의 수명이 짧은 이유.

토즈는 비싼 인건비를 줘가며 늙은 장인들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그 퀄리티를 이어갈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후계양성.

그들은 끊임없이 젊은 청년들을 고용하고 장인들에게 일을 배우게 한다.

그리고 그들이 성장할 때쯤.

장인들은 회사에서 내보내는 거로 유명했다.

‘미친 토즈, 순도 높은 장인들도 가차 없이 잘라버렸다는 소리잖아.’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짓거리들을 하고 있었다.

그 돈 몇 푼 때문에 고급인력을 사지로 내몰다니.

하지만 그들 덕분에 나에게 좋은 기회가 생겼다.

“돌아가죠. 분명히 연락이 올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그 작은 방에 토즈 신발이 가득했으니까요.”

나는 연락이 올 거라 믿었다.

일감이 없는 공장에서 혼자 오래전에 근무한 토즈의 신발을 만들고 있다.

그에게는 욕심이 아직 남아있다.

‘하기 싫은 분이 공장까지 차려놓고 일을 기다리는데 연락이 안 올 리가 없지.’

.

.

.

“썩을 놈 사장까지 데려오고 난리야.”

유진태는 진혁이 내려놓고 간 명함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말을 이었다.

“내가 연락할까 보냐.”

그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그의 손에서 진혁의 명함이 떨어지지 않는다.

작은 동아줄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마지못해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명함을 집어넣었다.

지갑 한편에는 아내와 자신이 활짝 웃고 있는 사진 한 장이 꽂혀 있었다.

“당신은 오늘도 참 환하게 웃고 있네.”

그의 눈은 슬픔으로 가득 차올랐다.

“토즈 같은 기업이 아니라면….”

유진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픈 과거를 떠올렸다.

토즈에서 이용당할 만큼 당하고 쫓겨나듯 나와.

술과 여자에 찌들어 살았다.

자신의 꿈을 토즈에 묻어두고 왔다는 핑계를 만들며 말이다.

한참 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의 아내는 어느새 떠나가 버렸고 혼자 외톨이 생활을 하다 고향인 한국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하. 내 업보네 업보야.”

유진태는 지갑 안에 넣은 명함을 다시 꺼내 유심히 바라봤다.

* * *

손성호 회장은 아리raM에게 보낼 원단을 취소하는 조건으로 이브와 일본 브랜드에 대량의 원단을 수출하기로 약속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계속해서 이브에서 자신의 전화를 피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익숙한 번호가 화면에 나타났다.

따르릉!

“나나세 상 왜 이제야 전화를….”

“왜 자꾸 질척거리세요? 볼일 끝난 거 같은데.”

“아니 우리 거래하지 않았습니까. 왜 이러십니까.”

“거래?! 아리raM 곤란하게 하고 광복절 행사 망치게 하려고 했던 건데. 기사보니까 승승장구던데 우리 거래는 당연히 취소죠!”

“그거는 아리raM에서 다른 루트로 원단을 구한 거고 우리 파이널에서는 당신이 시키는 대로 원단거래 취소하고 곤란하게 만들었지 않습니까.”

“나는 결과를 중시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더는 전화하지 마시죠. 제가 일본 관련 기업들 거래 다 막아버리기 전에.”

“……그럼 저는 JB그룹 회장님은 못 만나는 겁니까?”

“당연한 소리를 왜 해요. 회장님도 당신같이 무능한 사람 싫어해 욕심부리지 마시고 자기 밥그릇이나 잘 챙기세요. 그럼 끊겠습니다.”

손성호 회장은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수화기를 강하게 내려놓았다.

“개 같은 년이 감히! 나를 가지고 놀아. 정비서!”

“네 회장님 부르셨어요?”

“아리raM에 연락해서 아시아 어워드 대회 때 모든 물품 일제히 제공하는 조건으로 신지혜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해 봐.”

“네, 알겠습니다.”

손성호는 큰 욕심을 부리다.

배로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의류 시장이 더 큰 일본을 노리기 위해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덤으로 소문이 무성한 JB라는 거대 그룹과 인맥을 맺고 싶었다.

하지만 현재 한국 시장까지 놓치게 된 거에 분통이 터질 지경이다.

그리고 켈링의 막내딸인 신지혜에게 낙인찍혔다는 게 찝찝하게 다가왔다.

“젠장! 하여튼 이기적인 원숭이 새끼들!”

손성호는 끝내 분노를 삼키지 못하고 좁은 탁자 위에 있는 전화기를 집어 던져 버렸다.

“X발!”

* * *

사무실로 들어가니.

다니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응?!”

“유진태 장인.”

“또 그건 어디서 들었냐?”

“내가 이 회사에서 모르는 게 어딨어. 어떻게 됐냐고.”

“명함만 전해드리고 왔어. 기다려야 할 거 같아.”

“하…. 그분 한동안 방황하셨다고 알고 있었는데. 한국에 있을 줄이야.”

“방황? 무슨 방황?”

“아. 피렌체가 동네가 좁잖아. 그리고 가죽 밥 먹는 사람들 소문도 빠르고. 회사에서 쫓겨나고 한동안 망나니처럼 사셨다고 들었어. 그런데 어느 날 부인이 사라지고 그분도 같이 피렌체에서 사라졌다고 들었어.”

“그랬구나…. 하.”

“그분이 우리 브랜드 신발 제작 맡으시면 대박이긴 한데 아쉽다. 내가 한번 다시 가볼까?”

“아니야. 다시 연락 올 거야. 눈빛이 그랬어.”

“점쟁이냐 눈빛은 무슨.”

“너 일 안 바쁘냐? 왜 사무실에 죽치고 있어.”

“바빠. 그러니까 같이 일 좀 하자.”

“안 돼. 나도 바빠 새로 출시할 가방디자인 만들어야 해.”

“아 진짜!”

“아 진짜는 무슨 빨리 내려가세요. 다니엘 장인님.”

“아 네! 사장님.”

다니엘은 내려가는 척하더니 뒤를 돌아 MD팀에 가서 또 수다를 떨고 있었다.

“안 내려가냐?”

“내려갈 거야. 윽 잔소리 사장 놈. 신 디렉터보다 더해요.”

“아이고 머리야. 저걸 진짜…. 아 다니엘.”

“응?”

“너 계속 그러면 존 커터 스카우트 추진한다. 얼마 전에도 너 잘 지내는지 연락 왔던데.”

“아 씨 일할게.”

“진작 그럴 것이지.”

.

.

.

일주일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아직도 연락 없으시지?”

다니엘은 수시로 나에게 다가와 질문했다.

“아직. 진짜 안 오시려나.”

“거봐! 내가 가본다고 했지 눈빛이 어쩌고 하더니.”

우리가 티격태격하고 있는 사이.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사무실로 들어오셨다.

“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아니 내가 일이 있는 게 아니고 어르신이 널 찾아왔다고 하시는데 그래서 내가 모시고 왔다.”

“어르신이요?”

그때 아버지 뒤에서 낯익은 백발의 노신사가 나타났다.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달려갔다.

“잘 오셨어요. 정말 잘 오셨어요.”

내 모습을 보던 유진태는 코끝을 문지르며 이야기를 이었다.

“네놈 보러온 거 아니니 아서라. 형준이한테 아직 가르쳐줄 게 남아서 온 거니까.”

“네, 그럼 저희야 영광이죠. 안으로 드시죠.”

내 모습을 보고 있던 아버지는 신기하다며 다니엘에게 질문했다.

“누구길래 쟤가 저래?”

“아 피렌체 토즈 신발장인이세요. 신발의 미래를 보는 남자라고.”

“그건 또 뭐냐?”

“대단한 능력이죠. 아버지 저희는 내려가서 커피나 한잔해요.”

“좋지 네가 타라.”

“물론이죠. 설탕 반 프림 반 콜!”

“콜!”

둘은 나를 뒤로하고 이 층 작업실로올라갔다.

“어르신 제 사무실로 모시겠습니다.”

나는 유진태를 사무실 소파에 안내한 후.

김상진 팀장과 신 디렉터를 사무실로 불렀다.

무거운 분위기가 이어지고 유진태가 먼저 말을 이었다.

“같이 일하는 대신 조건이 있어. 들어 줄 거야 말 거야?”

나는 그에게 밝은 미소로 답했다.

S/S 가방디자인 1.

* * *

나는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그에게 답했다.

좋은 신발만 만들 수 있다면 그에게 투자하는 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말씀만 하세요. 최대한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를 얻을 수 있다면 큰 연봉을 지급해도 아깝지 않다.

“일은 내가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둔다. 회사가 망하면 뭐 어쩔 수 없지만.”

오래 근무해준다면 우리로서는 좋은 조건이다.

“그리고 병신 같은 디자인은 내가 수정할 걸세 내 철학이야. 불편한 신발 따위는 이제 안 만들 거야.”

“…….”

고민되는 조건이다.

일시적으로 사용될 신발도 존재하는 법이다.

“왜 싫어?”

“어르신도 알다시피 일시적으로 디자인된 신발도 존재합니다. 신데렐라의 유리구두같이 말이죠. 그 조건은….”

“나도 알고 있어 그런 건 이해하지. 하지만 양산화는 안 돼! 사람의 발을 망치는 꼴 나는 이제 못 봐.”

“물론이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세부적인 내용을 조절해나갔다.

유진태는 공장을 폐쇄하고 안산으로 거처를 옮긴다고 했고 우리는 흔쾌히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럼 어르신 장비는 회사에서 일괄 구매하겠습니다.”

“됐어 내가 무슨 돈 벌자고 이러는지 알아. 그냥 공장에 자리나 비워놔 그리고 연봉도 필요 없어.”

“아니 그래도.”

“두말하게 하지 마. 죽기 전까지 쓸 돈도 있고 공장 처분하면 충분하니 다음에 필요한 거 생기면 바로바로 사주기나 해.”

“그럼요. 불편한 점 없도록 지원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조건 하나 더 있다. 신발 마이스터는 내가 직접 뽑도록 하지. 어차피 나랑 일할 놈들이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의 신발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돈이고 뭐고 그냥 신발을 만들고 싶어 했다.

“신 디렉터님 김상진 팀장님 유진태 장인이 필요하신 거는 제 결제 없이 바로 이행해주세요.”

“네, 그럴게요.”

나는 유진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계약서는 공장 이전 때 쓰도록 하시죠.”

“아무 때나 상관없어. 나는 이제 가보겠네. 할 말 다 했어.”

“형준 씨 보고 가시죠. 조금 있으면 들어올 텐데.”

“다음에 보지 뭐 그놈이야 이제 질리도록 볼 건데. 근데 스니커즈만 만드나 여기는?”

“아닙니다. 구두도 만들 겁니다. 남성화, 여성화 모두요.”

“그거 반가운 소리고만 여러 가지 만들어야 재미있거든.”

유진태는 소파에서 일어나.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하네. 대표.”

“제가 더 잘 부탁드립니다.”

* * *

S/S시즌 새로운 가방디자인.

현재 나에게 가장 큰 숙제로 다가왔다.

나는 고민 끝에 다시 과거의 디자인을 사용하기로 했다.

“전에 만들어 놓은 디자인을 써야겠다. 아끼다 똥 되는 것보다 낫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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