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200)

“제가 뭐 좀 도와드릴까요.”

“아니 가만히 있는 게 돕는 거야.”

“아…. 네.”

그는 절단한 도면을 갈피에 가져다 댄 후.

도면 그대로 갈피를 절단해 나갔다.

마치 물결치듯 부드럽게 곡선을 이어 나가는 것이 엄청난 솜씨를 가졌다는 걸.

김형준은 지레짐작할 수 있었다.

정교한 작업이 계속해서 이어졌고 그가 커다란 갈피에서 도면 그대로 절단된 갈피를 들어 보였다.

평면적이지만 얼핏 보아도 자신이 만든 디자인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멋들어졌다.

“디자이너라면 이 과정까지는 가능해야 하는 거야. 그래야 제작자도 디자이너의 의중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거라고 알아들어!”

“네….”

“이제 너도 해봐.”

“제가요?!”

“너 신발 만드는 과정을 배우고 싶다며 그러면 해봐야 알지!”

김형준은 노신사의 눈치를 보며 두 번째 신발디자인을 패턴지에 그려나갔다.

“야 인마! 그렇게 그리면 너 같으면 그 신발 사겠냐.”

“네?!”

“그대로 그리지 말고 생각을 하면서 그려. 신발은 편안해야 한다고 이쁘다고 신냐. 발바닥 까지고 뒤꿈치 까지면 또 신겠냐고.”

“아…. 네.”

김형준은 최대한 그가 말한 문제점을 보완해가며 다시 패턴지에 도면을 그려나갔다.

생각이 많아졌는지 도면을 그려나가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해 떨어지겠다. 요놈아.”

“다했어요.”

“이제 절단해.”

“네.”

서툴지만 김형준은 구두칼을 들고 패턴지를 조심스럽게 잘라나갔다.

나름 처음 해본 거지만 깔끔하게 절단된 도면이 마음에 든 눈치다.

“네놈한테는 천연 갈피도 아까우니까. 이걸로 해.”

그가 내민 건 연습용으로 쓰이는 얇은 인조 갈피였다.

“감사합니다.”

김형준은 도면을 갈피에 가져다 대고 모양 그대로 구두칼을 그어나갔다.

얇은 덕분에 큰 힘 들이지 않고 갈피를 재단할 수 있었다.

“다 했으면 가져와.”

노신사는 김형준이 재단한 갈피를 들고 재봉틀 앞에 앉았다.

“잘 봐.”

노신사는 재봉틀의 스위치가 올리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신발을 만들어갔다.

“제 도면으로 신발이 만들어지기는 하네요. 신기하다.”

“그럼 재봉사가 장인인데.”

“아 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김형준이 디자인한 신발이 완성되었다.

“와…. 이쁘지 않아요?”

“이건 못 신겠다.”

“앗!”

노신사는 가차 없이 쓰레기통에 김형준이 재단한 신발을 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자신이 재단한 갈피를 가져와.

다시 재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시간이 지난 흐른 후.

완성된 신발을 김형준에게 내밀었다.

“어때?”

“……멋지네요.”

디자인이 많이 변해 있었지만, 자신의 디자인 시안보다 훨씬 좋은 신발이 만들어졌다.

“이제 여기에 모형을 잡고 밑창만 접착제로 결합한 후에 아리안스 하면 끝.”

“아리안스요?”

“밑창도 바느질해야지. 접착제만 발라서 팔래?”

“아 네.”

“이제 다 배웠으니까 가봐. 충분하지.”

“감사합니다. 사장님 근데 저 여기서 좀 더 배우면 안 될까요?”

“뭐라는 거야.”

백발의 노신사는 어림도 없다며 손사래 쳤다.

하지만 김형준은 그에게 배운다면 분명 큰 걸 얻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부탁드립니다. 청소면 청소 할 수 있는 거 다하겠습니다.”

“나 바빠.”

“귀찮게 안 하겠습니다. 여기서 5일만 머물게 해주세요.”

“하…….”

백발의 노신사는 마음대로 하라며 작업실을 빠져나갔다.

“재미있는 놈이네.”

그는 김형준을 처음 보는 순간.

자신의 젊은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렸다.

멋모르던 시절 신발에 빠져 타지에서 갖은 핍박을 받으며 일을 배우던 그때를 말이다.

“새끼 얼마까지 버티나 보자.”

그렇게 둘의 시간은 흘러갔다.

* * *

“형준 씨는 오늘도 출근 안 해요?”

“저도 잘….”

“도대체 어디 간 거예요? 뭘 시키셨길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시장조사를 5일 동안 하라 하고는 신경을 안 쓰고 있었으니까.”

“사장님!”

“올 겁니다.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 아니잖아요.”

신지혜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안다.

하지만 김형준의 눈빛에는 열정과 열망이 가득했기에 나는 믿고 있었다.

“만약 이대로 그만두면 어찌하시려고.”

“그럼 그 정도 그릇인 거죠. 그냥 모르는 척하고 계세요.”

신지혜와의 대화가 길어질 때쯤.

아리raM 사무실에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왔네요.”

나는 밝게 웃으며 신 디렉터를 바라봤다.

그녀는 김형준을 빤히 바라보고는 MD팀으로 이동했다.

“많이 배우고 왔어요?”

“네.”

그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가득하다.

무언가 큰 깨달음을 얻은듯했다.

“그럼 숙제 확인 한 번 해볼까요.”

내 말에 옆에 있던 류미리와 안정원도 걱정 반 궁금한 거 반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이럴 게 아니라 회의실에 모입시다.”

“네.”

디자인팀 4명이 회의실로 들어가자.

신지혜도 얼마나 대단한 걸 배워왔길래 신입 디자이너가 일주일이나 자리를 비웠냐며 회의에 참석했다.

김형준은 컴퓨터가 아닌 자신이 만든 패턴 도면을 가방에서 꺼내어 보였다.

“이건 제가 새롭게 디자인한 스니커즈 도면 패턴지입니다.”

내가 얼핏 보아도 구조학적 편안함을 주는 신발디자인이다.

하지만 평면적인 모습보다.

입체적인 모습으로 보는 게 편하고 디자인도 파악해야 하기에.

그에게 스케치하기를 권했다.

회의실에 모인 모두가 그의 스니커즈 디자인을 기다렸다.

“다 됐습니다.”

그가 자신 있게 내민 스니커즈 디자인은 5종으로.

발목을 감싸는 하이 버전의 스니커즈 2개와 일반적인 캐쥬얼 스니커즈 2개, 그리고 등산화의 모습을 한 디자인 스니커즈 1개였다.

‘좋은데.’

어디서 무엇을 보았는지.

단 일주일 만에 발전된 디자인을 가지고 나타났다.

김형준의 디자인을 본.

류미리와 신지혜도 흠칫 놀라는 눈치다.

“설명 한 번 들어볼까요?”

“네.”

그는 그린 종이를 들어 올려 손으로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하이버전의 스니커즈는 발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는 천 재질로 만들어 착용감을 올렸습니다. 그로 인해 벗겨짐 현상이 있기는 하지만 발목을 감싸는 가죽 벨트가 안정감을 더해 줍니다. 안정감과 신발의 착화감을 최대한으로 살린 디자인입니다.”

“와.”

류미리가 감탄하며 손뼉을 짝 하고 쳤다.

옆에 있던 신지혜도 인정하는 눈치다.

“두 번째랑 세 번째는요.”

“모든 고객이 화려하고 특별한 걸 바라지 않는다는 생각에 가장 기본이 되는 디자인을 구상했습니다. 아리raM의 모노그램을 전체에 넣고 양옆에 직사각형으로 터 S/S 시즌에 걸맞은 스니커즈를 만들었습니다.”

정말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다.

시원하게 터버린 옆 공간을 복잡하게 나열한 로고로 공간감을 채워 넣었다.

“네 번째도 발표해보세요.”

“네.”

나는 네 번째 디자인이 김형준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디자인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역학적인 발상으로 만든 스니커즈입니다. 제가 시장조사를 해보니 내년의 유행이 무엇이 될지 보이더라고요.”

“내년의 트렌드가 등산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제 추측이지만 내년에 스니커즈 디자인은 밑창의 화려함이 될 거라 예상합니다. 그런 이유에 밑창을 버블 형식으로 둥글고 높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위에는 최대한 끈을 사용해서 전체를 감아 화려함과 패셔너블한 감성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김형준의 설명이 끝이 나고 회의실에 모인 모두가 그의 노력에 손뼉을 쳐주었다.

“고생했어요. 로고디자인에 대한 부분만 수정하면 최종 시안으로 사용해도 손색이 없겠네요.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온 거예요?”

“아…. 시장조사를 하다 보니. 너무 좋은 신발을 발견했거든요. 그래서 그 신발을 만든 공장까지 가게 되었는데 운이 좋게 백발의 노신사 한 분한테 신발에 대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백발의 노신사?”

“네, 외국 기업에서 신발 만들었다고 하시던데요.”

‘백발의 노신사? 한국인이 외국 브랜드에서 신발을 만들었다라.’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 한 명이 있었다.

만약 그라면 아리raM에 꼭 필요한 사람이다.

“혹시 그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스니커즈 디자이너 3.

* * *

“이름이 유진태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그 사람이다.

명품 토즈의 신발장인 유진태.

그가 한국에 있었다니 놀랄만한 일이었다.

‘분명 외국인 부인이랑 결혼하고 피렌체에 살고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에르맥스 장인학교에 다니던 시절.

그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토즈의 장인들 모두가 대단하지만, 그는 남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디자이너보다 뛰어난 구조적 편안함을 읽는 능력.

신발의 미래를 보는 장인 유진태.

내가 아는 신발장인 중 가장 원탑이 바로 유진태다.

그는 디자인 스케치만으로 몇 번을 신을 때 어디가 불편해지고 몇 년이 지나면 몸에 무리가 오는 걸 본다고 알고 있다.

김형준이 갑자기 실력이 향상된 데에 누군가의 영향력이 미쳤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게 유진태였다니 정말 놀라움의 연속이다.

“거기 어디예요. 당장 가봅시다.”

“네. 얼마 안 걸리는 곳에 있습니다.”

나는 회의를 멈추고 김형준과 함께 유진태가 있는 그곳으로 향했다.

.

.

.

“큰형님.”

“엥?!”

“이렇게 부르래요. 할아버지라고 하다가 신발로 등짝 맞았거든요.”

“아….”

그때 공장 사무실이 열리더니 백발의 노신사가 걸어 나왔다.

나는 그를 향해 고개 숙였다.

“뭐하러 또 왔어. 이제 혹까지 달고 왔네.”

“회사 사장님이세요.”

“사장이 뭐 이래 젊어. 친구인지 알았네. 올라와.”

나와 김형준은 그가 있던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는 왜 왔어? 오늘은 회사 가야 한다고 가더니.”

“아 사장님이 오자고 해서.”

“그래? 자네는 왜 여기 오자고 했나?”

우리에게는 현재 신발과 구두를 마음 놓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나는 그가 가장 제일 나은 선택이라는 판단이 섰다.

“저희는 브랜드 아리raM이라는 세계로 뻗어 나갈 기업을 만들고 있습니다. 현재 무형문화…….”

“말이 길어 왜 왔냐고.”

“아리raM의 신발을 이곳에 맡기고 싶습니다. 아니 가능하다면 아리raM에 선생님을 스카우트하고 싶습니다.”

“고객님이시구먼 근데 싫어.”

“네?!”

“내가 누군지 알고 접근했다는 게 불쾌해. 그리고 내가 만약 동네 신발장이었다면 나를 찾았겠나? 자네는 내 능력을 알고 접근했지 않은가.”

나는 그의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했다.

분명 욕심이 솟구쳐 이곳으로 달려왔다.

“맞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이 없었다 해도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찾아왔을 겁니다.”

“하여튼 싫어. 쉬다 가.”

그는 말을 남기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사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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