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게 모르게 그에게 기대감이 너무 컸던 것일까.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김형준 씨는 지금부터 일주일 동안 신발 판매장 돌아요. 기본부터 배우도록 하세요. 잡지나 전문 서적도 살피고.”
“네, 사장님.”
내가 낸 숙제가 그에게 분명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구두 디자인 보죠.”
“네.”
구두 디자이너 안정원.
포트폴리오에 그려놓은 디자인만으로도 대단한 디자이너가 될 가능성을 보였다.
“한번 보죠.”
“네.”
그가 스크린에 자신의 디자인을 올리는 순간.
류미리의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와….”
안정원의 디자인은 한국 전통 신발을 변형시켜 현대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마치 조선 시대에 그가 있었다면 세계적인 구두 디자이너가 조선에서 나올 법한 디자인이다.
“설…. 명할까요?”
“네.”
나는 김형준이 있었기에.
최대한 감정을 숨겼다.
뛰어난 동기가 있다면 약간 뒤처지는 동기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김형준도 절대 재능이 없는 건 아니다.
“저는 아리raM이라는 회사의 뿌리 즉 회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조사했습니다.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그 회사의 대표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그 회사의 색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와우.’
내성적인 성격의 안정원이 맞나 싶을 정도다.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고 본인이 추구하는 의견을 뚜렷하고 명쾌하게 풀어냈다.
그의 말처럼 한 브랜드의 베스트셀러가 되기 위해서는 그 브랜드의 색을 오롯이 디자인에 담아내야 하며 인기까지 잡아야 한다.
안정원은 그 모든 걸 알고 있었고 상품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과 재능을 가진 듯 보였다.
“그래서 사장님이 디자인한 온리 원 백, 시크릿 백 시리즈를 자세히 살폈습니다. 그리고 저희와 현재 협업 중인 무형문화재 장인분들을 조사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제 첫 번째 구두를 봐주십시오.”
그가 레이저로 화면을 가리키며 상세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안정원의 디자인은 전통 꽃신을 가죽이 아닌 스웨이드로 만들어 깔끔하고 단아한 느낌을 강조했다.
그리고 형태를 현대적으로 바꾸기까지 했다.
‘대단한데.’
구두를 플랫폼 형식으로 디자인했다.
마치 두꺼운 솔(발바닥)을 전통 꽃신에 부착시킨 거 같았다.
그때 약간 투명하게 보이는 무늬를 발견했다.
“스웨이드에 무늬는 뭐예요?”
“아직 최종안이 아니라 여러 가지를 고민 중입니다. 스웨이드라는 천의 특성상 자주와 프린팅 모두가 가능하고 나전이 들어가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좋네. 다음 것도 한번 보죠.”
그가 리모컨을 누르자.
스크린 화면이 변경되었다.
‘이것도 나쁘지 않다.’
내가 반대편에 앉아있는 류미리를 바라보자.
그녀는 벌써 두 번째 디자인에도 빠져들어 가 있었다.
‘미리 씨가 딱 좋아할 스타일이긴 하네.’
그녀와 마찬가지로 나도 점점 안정원의 디자인에 빠져들었다.
“설명해봐요.”
“S/S 시즌의 전체적인 콘셉트를 수석 디자이너님에게 물어보고 만든 구두입니다. 네온색상과 가장 어울릴 수 있는 색으로 블루와 블랙을 선택해 앞부분에 블랙 뒷부분에는 밝은 블루로 그라데이션을 적용했습니다.”
그가 두 번째로 내민 디자인은 슬링 백을 변형시킨 디자인이다.
슬링 백은 뒤 가죽이 없고 발목이나 뒤꿈치를 가로지르는 가죽끈이 발을 잡아주는 형태의 구두다.
‘색감이 살아 숨 쉬는 거 같네.’
나는 안정원의 두 번째 디자인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가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걸.
‘천재다.’
“이것도 좋네요. 조금 더 보완해서 보여주도록 해요.”
“네.”
안정원은 세 번째 구두까지 설명을 완벽하게 이루어 내고 자리로 돌아갔다.
류미리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엄지손가락을 올려 보였다.
나도 김형준만 아니었으면 똑같이 행동했을 거로 생각했다.
정말 대단한 재능을 가진 청년이었다.
“가방 디자인은 다음 회의 때 보여주는 거로 할게요. 제가 일정이 바빠서 아직 손도 못 대네요.”
“네.”
“그리고 김형준 씨는 잠시 저랑 이야기 좀 할까요?”
“…네, 사장님.”
나는 안정원이 디자인에 관해 설명하는 그때.
김형준의 눈을 바라봤다.
매우 초조하고 불안해 보이는 그 눈빛을 보고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옥상으로 올라갈까요?”
“네.”
내가 옥상에 마련된 자리에 앉자.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다.
“뭐 해요. 서 있지 말고 앉아요.”
“네, 사장님.”
그는 나를 아직 어려워하고 있지만 나는 안정원과 김형준을 보며 동생같이 느껴졌다.
지금 차진혁의 몸으로는 두세 살 높을 뿐이었기에 내색은 할 수 없었다.
“어머니 건강은 어때요?”
“좋아지고 계십니다.”
“그래요. 다행이네.”
“죄송합니다. 사장님.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해서.”
“꾸짖으려고 올라온 거 아니니 주눅들 필요 없습니다. 그냥 이야기하려고 온 거예요. 형준 씨도 재능이 있습니다. 아직 부족할 뿐이지 그건 노력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제가 내준 숙제부터 차근차근히 해봅시다. 제 말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네. 노력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제가 시킨 시장조사부터 일주일 동안 하세요. 계속 반복하다 보면 분명 실력이 늘어날 거예요. 조바심내지 말고 자신을 믿으세요.”
“감사합니다. 사장님.”
나는 김형준을 최대한 안정시켰다.
지금은 매보다 당근이 필요할 때다.
그는 디자이너로서 첫 발걸음을 내디디고 있었고 그 첫걸음을 내가 만들어 줘야 했다.
그가 내 말을 깊게 이해했다면 이른 시일 내에 자신의 능력을 개화할 것이다.
누구나 꽃이 피는 시기는 다르다.
더딜 수도 있고 빠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름다운 꽃 한 송이는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저 둘의 재능을 꽃으로 비유하자면 저들은 장미였고 백합이었다.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빨리 개화해주면 우리야 좋지.”
나는 그를 남겨두고 옥상을 내려왔다.
그런데 계단을 내려오는 내내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큰 보배를 얻은 느낌이 들었기에.
“둘 다 분명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겠지.”
* * *
김형준은 진혁의 지시대로 서울 인근의 백화점과 동대문시장, 신발잡화점을 돌아다니며 시장조사를 시작했다.
“고객님 어서 오십시오.”
“네.”
김형준은 첫 번째로 백화점 명품관을 돌기 시작했다.
비싼 가격에도 매해 수천수만 켤레씩 팔려나가는 명품의 스니커즈를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신어 봐도 되죠.”
“그럼요. 치수가?”
“265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김형준은 매장 직원이 내오는 신발을 신으며 착용감과 편안함, 디자인 모두를 생각하며 책자에 기록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매장 직원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 관심이 신경 쓰였는지 김형준이 먼저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제가 신발 디자이너라 시장조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셨군요. 괜찮습니다.”
다행히 김형준의 행동을 꺼리는 직원은 없었기에 쉽게 백화점 시장조사를 마칠 수 있었다.
“트랙이나 스피드 런 같은베스트셀러는 착화감이 확실히 좋네.”
그는 구쯔에 라이톤을 비롯해.
발렌시의 스피드 런 트랙까지 자세히 살피며 스니커즈를 상세하게 기록했다.
“시장으로 가볼까.”
그는 이런 식으로 나흘 동안 서울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신발의 구조와 편의성을 정리해 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문을 듣고 찾아온 곳이 있었다.
“여기를 어떻게 들어간다.….”
한참을 신발공장 앞에서 서성이던 김형준은 고민 끝에 공장문을 열었다.
턱!
“잠겨있네….”
그때 김형준의 뒤로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스니커즈 디자이너 2.
* * *
작업복을 입고 있는 백발의 노신사가 김형준에게 다가왔다.
“누군데 공장 앞에서 알짱대나.”
“아…. 죄송합니다. 혹시 이 신발 사장님이 만드신 건가요?”
“어디 봐봐…. 내가 만든 거 맞네! 근데 왜?”
“아 저는 아리raM 신발 디자이너 김형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신발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가 궁금해서요. 구조도 그렇고 착화감이 너무 좋아서요”
“내가 그걸 알려줘야 해?”
“그건 아니지만 부탁드립니다.”
백발의 노신사는 게슴츠레한 눈을 뜨며 김형준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그래. 디자이너라고.”
“네! 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배우는 처지지만요.”
“그래……. 흠 따라와.”
백발의 노신사는 호기심이 생긴 것인지 김형준에게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김형준이 공장 안에 들어서자.
신발 깔창을 만드는 기계와 가죽을 절단하는 프레스 기계가 눈에 들어왔다.
“잘 봐.”
백발의 노신사는 숙련된 솜씨로 기계를 작동시켜 신발이 차례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런 건 처음 보지. 근데 내가 만드는 거 본다고 공부가 되나?”
“그럼요.”
“신발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간단해.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넘기면 우리는 패턴과 형틀을 만들어. 그걸 프레스로 찍어 내서 바느질하고 재봉질해서 깔창에 결합하는 거야. 간단하지.”
“들으면 간단한데. 과정을 보니까 복잡한데요.”
“젊은 사람이 일머리가 없어! 딱 보면 딱이지.”
그가 말하는 건 간단하나.
김형준 눈에는 매우 복잡한 과정이 여러 차례 진행되었다.
“근데 저 패턴이나 형틀은 다 누가 만드는 건가요?”
“좀 머리 좋은 디자이너면 패턴도 다 만들어 오고 형틀까지 제작할 수 있게 프로그램도 보내주지. 근데 멍청한 것들은 사진만 덩그러니 보내고.”
“그럼 사진만 보내면 패턴 작업과 형틀은 누가 하는데요.”
“누가 하겠어 내가 하지!”
김형준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백발의 노신사를 위아래로 바라보았다.
“이놈이! 그 눈빛 뭐야.”
“아니에요. 그냥 쳐다본 겁니다.”
“내가 이래 보여도 외국에서 신발 밥 먹고 자란 사람이야. 따라와.”
그는 김형준을 데리고 공장 어귀에 마련된 작업실로 향했다.
“너 신발 배우는 놈이면 디자인한 거 있을 거 아니야. 줘봐.”
김형준은 잠시 주춤했다.
자신이 들고 있는 디자인은 얼마 전 진혁에게 퇴짜맞은 디자인이었기 때문이다.
“빨리 줘. 가방 안고 있으면 답 나와?”
“네….”
김형준은 자신이 만든 디자인을 그에게 내밀었다.
백발의 노신사는 김형준의 디자인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개떡같이 디자인했네. 너는 배우려면 한참 멀었다.”
“…….”
“이쁘다고 다 신발 되는 거 아니다. 잘 봐라.”
백발의 신사는 패턴지를 들고 와.
이리저리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얼추 비슷하지.”
김형준은 그가 그린 신발 그림을 내려다보며 흠칫 놀라고 말았다.
자신이 디자인한 신발이지만 조금 다르다.
훨씬 구조학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신발을 그려놓은 것이다.
그때 백발의 노신사는 구두칼을 꺼내 들고 자신이 그린 도면을 절단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는지.”
그는 절단한 도면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창고로 향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작업장에 나타났을 때.
스니커즈 색과 흡사한 갈피를 들고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