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200)

할아버지의 증조부는 말을 잇지 못했다.

혼자서 다수를 이리 오래 견제할 수 있다는 거에 놀라웠고.

자신이 저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다는 거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말이다.

“저도 저기에 남았어야 했는데….”

그때 최한결이 모시던 이 선생이 버럭 화를 내며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이오. 한결이의 목숨을 헛되이 할 생각이오!”

“죄송합니다. 선생님.”

“더는 그를 언급하지 마시오. 그는 자신의 역할을 다했소. 이제는 우리가 그의 몫까지 싸워야 할 때요.”

“네.”

기차가 떠나기 전까지 총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기차가 움직이는 그 순간.

총소리가 멎었다.

셋 모두 모자를 벗고 눈물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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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포기한 듯 뒤돌아 행사장 입구를 벗어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달려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 걸음을 멈춰 세웠다.

“할아버지!”

“누구시오?”

“독립운동가 후손분들에게 정장을 만들어 드리는 사람인데요.”

그를 가까이서 바라보니 영상 속에서 보았던 최한결과 많이 닮아있었다.

큰 키에 부리부리한 눈매 진한 눈썹까지도 말이다.

“혹시 독립운동가 하셨던 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최 한 자 결 자요.”

“그러시군요. 잠시만 저를 따라오시겠습니까?”

“무슨 일이오. 다들 나보고 못 들어간다던데.”

나는 그의 손을 잡고는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제가 초대하는 거니 괜찮을 겁니다.”

나는 유해수에게 전화해.

할아버지의 통행을 허용해줄 걸 부탁했다.

그는 내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나는 그를 아리raM 정장이 있는 곳으로 데려왔다.

나는 줄자를 들고 그의 앞에 섰다.

“치수 재겠습니다.”

“치수는 왜?”

“독립운동가 후손분들에게 정장을 만들어 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할아버지도 제가 만든 정장을 입고 행사에 참석하시면 됩니다.”

“…….”

그는 고개를 떨구며 말을 이었다.

“내 말을 믿어주는 것이오?”

“그럼요. 믿고 말고요.”

“고맙구려 고마워.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는데. 이리 젊은 청년이 내 말을 들어주다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소.”

나는 그에게 정장 한 벌을 내밀며 탈의실을 안내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류미리와 신 디렉터가 나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에요?”

“아…. 명단에 없는 독립운동가 후손이세요. 제가 모셔왔습니다.”

“잘하셨네요. 근데 독립운동가 성함이 어떻게 되신대요?”

“최한결 선생님이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네요.”

뭐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가 한두 명이겠냐마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다한 자의 이름을 기억해주는 이가 한 명도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옷을 갈아입은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이렇게 좋은 옷을 내가 공짜로 받아도 되나 모르겠네.”

“공짜가 아닙니다. 나라를 지킨 분들에게 주어지는 정장이고 그분들의 후손이기에 충분히 받을 자격 있으신 겁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네, 고마워.”

“할아버지 다들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제가 알아드릴 테니. 이런 행사가 있을 때는 연락해주세요. 제가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

할아버지는 순간 얼굴을 붉히시며 나에게 고개를 숙이셨다.

“이러지 마세요. 제가 뭐라고.”

“아니요. 이렇게 마음 써준 것만 해도 고맙구려. 원래는 이런 데 오지도 않는데. 내가 이제는 살날이 얼마 없어서 한번 와보고 싶었다오.”

“그러셨군요, 오래 사시고 다음에 또 오세요.”

나는 그를 행사장으로 안내했다.

“공방 총각!”

내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행사장에 들어서자.

손수레 할아버지가 나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고 계셨다.

‘잘됐다.’

어쩌면 둘에게 연결고리가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영상 속 두 조상의 후손들이 아닌가.

“저기로 가실까요.”

나는 손수레 할아버지 옆에 그를 앉혔다.

“두 분 말동무나 하세요.”

“나야 좋지. 이리 앉으시구려.”

두 분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말동무가 되어주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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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가 시작되었다.

대통령의 연설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에 관련된 작은 공연들이 이어졌다.

많은 사람이 이번 행사를 뜻깊게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공연이 끝이 나고 주위에 모든 조명이 일시적으로 꺼졌다.

“뭐예요? 공연 아직 남아 있어요?”

“아니요. 판소리 공연이 마지막이었는데.”

“뭐지?”

그 순간 조명 하나가 단상을 비추자.

낯익은 인물이 그곳에 서 있었다.

“손수레 할아버지 아니에요?”

“맞네요. 올라가신다는 말씀 없으셨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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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런 자리에 올라와도 되나 싶네요. 저보다 더 훌륭한 분들이 많을 텐데.”

그의 말에 힘을 내라는 듯 앉아있는 모두가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그는 큼지막한 글자들이 빽빽이 적힌 용지 하나를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어제 이렇게 적어서 공부했는데. 오늘에 와서 이거보다 더 큰 걸 깨달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손으로 최한결의 후손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친구는 오늘 이곳에 행사를 참여하고 싶었지만, 조부님의 이름이 독립운동가로 등록되어 있지 않아 참석을 못 할 뻔했답니다. 그래서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우리에게 이 정장을 만들어준 아리raM의 차진혁 대표가 그에게 정장도 입히고 행사도 참여하게 해줬다고 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이브 카메라가 나를 비추었고 지미집도 나를 향해서 다가왔다.

나는 카메라를 향해 고개 숙였다.

“만약 저 친구가 행사에 참여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요? 우리는 그러지 않았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또 한 명의 독립운동가를 놓쳤을 겁니다. 저 친구 증조부의 존함은 최 한 자 결 자 되십니다. 제 할아버지의 존함은 김영태입니다. 어느 사람도 기억하고 있지 않지만, 가족인 저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자리에 앉아있던 한 명의 후손이 자신의 조상 이름을 불렀다.

“변진수!”

그때부터 정말 드라마에나 볼 법한 상황이 펼쳐졌다.

자리에 앉아있던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차례대로 자랑스러운 가족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최태호! 강서백! 채은서! 유지수! ……!

한참 동안 극적인 상황이 이어졌다.

이 장면은 라이브로 전국에 송출되었다.

“사장님 지금 난리 났어요.”

“실시간 채팅창 한번 보세요.”

나는 류미리가 내미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 감동적이네요.

└ 일본 새끼들이 이 장면을 봐야 하는데.

└ 모두 감사합니다.

└ 정말 처음 들어보는 이름밖에 없었어요. 저 자신이 부끄럽네요.

└ 윗분 말에 공감합니다.

└ 정말 감동적이에요.

수천 개의 채팅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다시 마이크를 가까이 가지고 가 연설을 이었다.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알려졌다고 해도 모르는 분들이 많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 노력했으면 합니다. 이상입니다.”

손수레 할아버지가 고개 숙이는 순간.

모두의 박수 소리가 다시 한번 터져 나왔다.

이로써 광복절 행사는 마무리되었다.

“이걸로 끝이네요.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사장님도요. 고생 많으셨어요.”

스니커즈 디자이너 1.

* * *

광복절 행사가 끝이 나고 일상생활로 돌아왔다.

아리raM은 10월 중순에 열리게 되는 서울 패션위크를 준비하기 위해.

모두가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아리raM은 이번 S/S시즌 컬렉션에 40종 의상을 선보일 예정이다.

컬렉션 이외에 기성복으로 판매되는 의상까지 합치면 100종이 넘어갈 것으로 예상한다.

“사장님 회의실에 디자인팀 모두 모였습니다.”

“네.”

중간 디자인을 점검할 시간이다.

나는 광복절 행사 기간에 디자인팀 전체에게 많은 숙제를 내놓았다.

“다들 기대해도 되죠?”

“…….”

“왜 말들이 없어요?”

나는 여유롭게 그들을 향해 미소지었다.

많은 기대를 하는 건 아니다.

발전하는 모습을 평가할 뿐.

“수석 디자이너님부터 하시죠.”

“네.”

류미리가 준비한 디자인을 스크린에 띄운 후.

설명을 이어갔다.

“아리raM의 S/S 시즌 키워드를 로맨티시즘으로 잡았습니다. 매력적인 색채를 조합해 화려함과 화사함을 극강으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화면을 봐주세요.”

“네온색이 주를 이루고 있네요. 너무 과하지 않나요?”

나는 그녀가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했다.

분명 좋은 콘셉트다.

하지만 네온색을 부담스러워서 하는 고객들이 상당히 많다.

옷이란 하루만 입고 버리는 게 아니기에 한 번 입고 질린다면 좋은 옷이라 할 수 없다.

네온색이라는 특성을 가진 옷은 단발성 의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색상은 분명 현대적이고 튀어 보일 수 있지만, 거기에 가미된 한국적인 이미지가 융화되어 더욱 고급스럽고 고풍스러운 느낌을 자아냅니다. 그런 이유에 쉽게 질리지 않고 오래 입을 수 있을 거라 예상합니다.”

“그럼 저 중간중간 들어가는 게 말씀하신 포인트입니까?”

“맞습니다. 현재는 계획을 잡은 거고 최종 시안에 어떻게 바뀌게 될지 모릅니다.”

류미리가 보여준 드레스 디자인은 전면에 스트레이트로 상체부터 다리까지 길게 명주 천이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리raM을 상징하는 모노그램이 프린팅되어 있다.

네온색상의 튀어 보이는 의상을 어느 정도 상쇄시키는 효과를 주고 싶은 듯 보였다.

하지만 저걸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색상을 조금 변경해보죠. 짙은 가지색이나 살구색, 그리고 주황색, 연두색으로 한번 만들어 보는 거로 하죠.”

“네, 알겠습니다.”

“다음 페이지 봐주십시오. 이제부터 재킷입니다.”

류미리의 설명이 길게 이어졌다.

치마, 바지, 블레이저, 블라우스, 오버 롤 원피스와 셔츠, 원피스까지 모두 상세하게 짚어나갔다.

“의상 부분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죠. 최종 시안 회의 전까지 제가 말한 부분 수정하고 한 번 더 회의 진행합시다.”

“네.”

의상 부분이 마무리되고 스니커즈와 구두 디자인을 볼 차례였다.

나는 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누가 먼저 할래요?”

예상대로 소심한 안정원은 눈치만 보고 있었고 김형준이 먼저 손을 들고 스크린 앞으로 다가왔다.

“시작하겠습니다.”

김형준이 준비한 스니커즈 디자인은 3종으로.

입사 당시 면접에서 보여준 변형시킨 디자인 2개와 새롭게 만든 디자인 1개를 내밀었다.

“먼저 전에 보여드렸던 디자인입니다. 모델명은 첼시 스니커즈입니다.”

하단에는 스니커즈를 한 모습이지만 복숭아뼈 위까지 감싸는 모습이 첼시 부츠를 연상시키는 디자인이다.

김형준은 스니커즈에 관해 세부설명을 이어갔다.

나는 마지막까지 그의 설명을 듣고 여러 문제점을 지적했다.

‘아직 갈 길이 머네.’

“김형준 디자이너. 저 스니커즈를 신고 활동할 수 있을 거 같아요?”

“…….”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스니커즈의 기본이 뭐라고 생각해요?”

그는 무슨 말을 하려다.

자신감을 잃었는지 말을 삼켜버렸다.

“편안함 아니에요? 스니커즈가 편안해야죠. 근데 저게 편안합니까. 그리고 디자인도 전보다 못해졌어요.”

“죄송합니다.”

“세 번째 스니커즈 띄워봐요.”

“네.”

세 번째 스니커즈는 슬림한 디자인이다.

발 전면을 가죽으로 감싸고 발목에는 포인트를 주기 위해 탄성이 강한 두꺼운 천을 덧댔다.

‘그나마 쓸만하네.’

신발 옆과 발목 띠에는 아리raM의 모노그램이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세 번째 디자인은 좀 더 보완하도록 하고 첫 번째 두 번째 것은 완전히 다시 수정하세요. 그리고 틈틈이 보고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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