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을 가진 기업이기는 하나 전범 기업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세계시장에 뛰어들지 못하고 도태된 곳이다.
“전쟁 때 군복 만들던 회사 아니야?”
“맞아. 근데 그런 기업이 얼마 전에 파리 프레타 포르테 컬렉션에 초청까지 받아서 올라갔다. 분명 누군가가 밀어줬다는 거겠지. 전에는 세계시장에 발도 못 붙였는데 말이야. 그 말인즉 괜히 건들지 말라고 요새는 소문도 안 좋으니까.”
“무슨 소문?”
“그거까지는 알 거 없고.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
“아니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 이브는 못 건드려도 파이널 인터내셔널을 건드릴 거야.”
“어련하시게. 어떻게 하려고? 파이널도 작은 회사 아니다.”
“나도 알아. 끊어!”
박무식은 한숨을 내리 쉬며 전화를 종료시켰다.
“일내겠네.”
* * *
“팀장님 큰일 났습니다.”
“왜 그래?”
“기존에 거래하던 브랜드들이 우리 회사랑 이제 거래 안 하겠답니다. 이번 물량까지만 받겠다는 곳도 있고요.”
“갑자기 왜?!”
“저도 모르죠. 하…. 올해 실적 이러다 마이너스 나겠습니다. 아리raM 거래까지 잘 텄으면 해외 영업팀 중에 1등이었을 텐데.”
“이럴 때 성과급 걱정하고 있냐. 빨리 나가서 알아봐!”
김 팀장이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 씨 또 이 여자네.”
김 팀장은 더는 피하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
“전화 바꿨습니다.”
“드디어 받으시네요. 왜 전화를 피하세요?”
“아 회의가 있어서 죄송합니다.”
“핑계 좋으시네요. 원단은 어떻게 되셨죠?”
“아….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상황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파업 중이고 아무리 빨라도 2주는 걸릴 겁니다.”
“정말이세요? 정말 상황이 하나도 안 변했어요?”
순간 김 팀장은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억양, 비꼬인 말투가 신지혜의 심정을 말해주고 있었다.
“진짜 저희가 문제가 아니라 현지가….”
“제가 알아보니까 이탈리아 공장 잘만 돌아간다고 하던데요. 제가 알아본 공장이랑 파이널 인터내셔널이 알아본 공장이 다른가 봅니다.”
“…….”
“왜 말씀이 없으세요?”
“죄송합니다. 손해배상을 따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없던 일로 해주시면….”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요 손해배상은 당연한 거고 제가 아는 업계 사람들한테 모두 말할 겁니다.”
“그건…….”
“그리고 회장님한테 제 말 좀 전해주세요.”
“네?!”
김 팀장은 신지혜가 도대체 무슨 깡으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회장이라니.
아무리 기분이 상했어도 한 기업의 회장을 자극하려 하고 있었다.
“회장님한테 똑똑히 전하세요. 켈링그룹 신지혜가 전화해달라고 했다고 아셨어요?”
“네. 전달하겠습니다. 네?! 방금 뭐라고 하셨죠?”
“켈링그룹 신지혜요. 그리고 제가 말한 거는 팀장님만 알고 계셔야 할 겁니다. 저 뒤끝 심해요.”
“네, 알겠습니다.”
김 팀장은 오래전 들어본 듯했다.
켈링의 회장이 한국에서 만난 여자와 아이를 낳았다는 걸.
“설마…. 켈링 회장의 막내딸! 진짜 망했다.”
김 팀장은 왜 거래 중인 브랜드에서 물량 취소가 이어지고 계약을 파기했는지 감이 왔다.
켈링그룹의 막내딸이 한국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그녀의 입김이라면 웬만한 의류 대기업의 회장 정도의 힘이 발휘될 거다.
“아리raM에 있을 줄이야.”
김 팀장은 상상도 못 했다.
“회장님!”
“이 사람이 무례하게 이게 무슨 짓이야!”
손성호 회장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골프 퍼팅 연습을 하고 있었다.
골프공이 길을 놓치고 김 팀장 발아래로 굴러왔다.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저희가 물량을 막은 아리raM 있지 않습니까.”
“그래 물량은 막았나 보고만 잘했네.”
“그게 아니라. 거기에 켈링그룹 막내딸이 디렉터로 있습니다. 근데 저희가 일부러막았다는 걸 알게 된 거 같습니다.”
“뭐! 켈링?!”
“네.”
손성호는 순간 많은 생각을 했다.
어느 쪽이 더 이득일지에 대해서.
“그래서 어쩌라고 당장 나가!”
“회장님. 전화 한 통화 하시는 게 어떨까요. 이러다 저희 거래처 다 막힙니다.”
“별거 아니니까 나가서 일 봐. 올해 실적이 어떻든 자네 팀은 최고평가점수 받을 테니까.”
“…….”
“나가. 긴말하기 싫어.”
무슨 연유일까.
손성호는 평정심을 잃지 않고 골프채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실소를 이어갔다.
‘진짜 미친 건가….’
힘이 빠진 김 팀장이 사무실로 내려오자.
때마침 밑에 직원이 회사를 들어오며 말을 이었다.
“안될 거 같습니다. 아리raM에서 손쓴 거 같습니다. 그쪽에 디렉터가 다 소문을 냈는지 저희를 못 믿겠답니다. 신용 없는 회사랑 거래 안 하겠답니다. 저희 어떻게 해요.”
“그래…. 가서 다른 일 봐.”
“팀장님! 저희 손해가 크다니까요?”
“회장님이 알아서 한대. 우리는 다른 거래처나 찾자고 재고 쌓이기 전에.”
김 팀장은 이러나저러나 마음이 복잡했다.
아리raM에서 주문한 물량도 5억이 넘는 금액이다.
“하 씨 실수했네.”
도무지 회장이 왜 저렇게 강하게 나오는지 말이다.
“문자라도 남겨야 하나.”
― 회장님이 볼일 없다고 하십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 * *
기다리던 전화는 오지 않고 딸랑 문자 하나가 날아왔다.
“아 씨 한번 떠보려고 했는데.”
그녀는 켈링이라는 배경을 이용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한 번씩 사용하기에는 유용한 카드였기에.
신분을 내세워 파이널 인터내셔널 회장의 속내를 알고 싶었다.
“마음을 살짝 떠보려 했는데 안 넘어오네.”
신지혜는 사건의 진위를 알고 싶었다.
정말 일본 기업의 개입이 있었는지.
아니면 이브의 디자이너가 앙심을 품고 이 일을 부탁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아까 전부터 박무식이 했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무슨 소문을 숨기는 거야…. 박무식 이 새끼를 조져야겠네.”
신지혜는 가방을 들쳐메고 아리raM을 빠져나갔다.
영웅들의 후손 1.
* * *
VOKE 서울지부 앞 커피숍.
신지혜와 박무식이 조용한 구석 자리에서 대화를 이어갔다.
“안 좋은 소문이 뭔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시치미 떼지 말고 빨리 말해. 내가 네 머리 위에 있어!”
“야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
박무식은 진땀을 흘리며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그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궁금증이 더욱 커졌다.
‘뭐길래 저래….’
단 한 번도 박무식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자신에게 늘 꾸밈없고 숨김이 없었다.
박무식은 한참을 고민한 뒤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정말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정보야. 그 극소수 중에 켈링 회장님과 네 형제도 포함이고.”
박무식의 말에 신지혜는 얼굴을 찌푸렸다.
“본론만 말해. 그것들 생각도 하기 싫으니까.”
“아니. 너도 켈링 패밀리의 인원이야. 너는 부정할지 모르지만, 회장님은 널 딸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이딴 이야기 계속할 거면 나갈게. 더럽고, 치사해서 안 듣는다.”
신지혜가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때.
박무식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강압적으로 자리에 앉혔다.
“야!”
“이야기 마저 듣고 가. 아리raM도 켈링도 살리고 싶으면.”
“무슨?!”
“현재 JB라는 거대한 패션 그룹이 만들어지고 있어. 거기에 이브도 포함되어 있고 이게 아리raM이 이브를 자극하면 안 되는 이유야. 그리고….”
“그리고 뭐? JB라 처음 듣는 기업인데.”
“극소수만 알고 있다고 했잖아. 말 끊지 말고 좀 들어줄래.”
“계속 말해. 별로 안 중요하면 알아서 해.”
“JB가 거대 자본으로 여러 패션 그룹들을 공격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어. 몇 개의 작은 패션기업들은 벌써 JB에 집어 삼켜졌다는 말도 들릴 정도야.”
신지혜는 박무식의 말에 실린 무게를 어느 정도 짐작했다.
하지만 자신과 연관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우리는 이브만 조심하면 되는 거 아니야?”
“상관이 있지. JB가 현재 1지망으로 노리는 그룹이 너와 아주 관계가 있으니까.”
“설마 켈링을?”
“예측이야. 근데 소문이 그래.”
신지혜는 박무식의 말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룹 전체 시가 총액 70조 이상.
노리면 노렸지 노려질 켈링이 아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박무식의 말은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었다.
“켈링이 들고 있는 가장 주축이 되는 기업 중 구쯔와 생로랑, 보테가, 발렌시의 주식의 25% 이상을 JB에서 확보했다는 거야. 그 말은 회장님의 힘이 축소된다는 거겠지.”
“박무식. 네가 뭘 잘 모르는 거 같아서 하는 말인데 켈링은 가족들이 주식 55% 이상을 가지고 있어. 그 말인즉 절대 그 브랜드들이 넘어갈 일은 없다는 거야. 그 멍청이들이 진짜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주식을 그놈들한테 넘기겠어.”
“아니. JB는 어떻게든 얻어 낼 거야. 그들이 행하는 행동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잔인하고 냉정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거까지는 알 거 없고. 차 대표한테도 말 잘해. 괜히 이브 심기 건드리지 말라고 아리raM의 성장에 방해만 될 뿐이야. 그리고 너도 이렇게 손 놓고 있을 때가 아니야. 잘 선택해. 이곳에 남을지 돌아갈지 아직 시간은 많겠지만 빠를수록 좋을 거야.”
“나는 켈링과는 무관한 사람이야. 그러니 더는 말하지 마”
“신지혜! 적당히 어리광부려 회장님도 너를 원하고 계셔.”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아…. 아니다. 하여튼 회장님한테 연락해봐.”
“꺼져!”
신지혜는 복잡한 심경으로 카페를 빠져나왔다.
“멍청이들 설마….”
그녀는 복잡한 심경을 안고 회사로 돌아왔다.
“켈링이 뭐라고….”
그녀는 다짐했다.
방금 들은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자신의 치부를 어느 사람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사장님한테도 비밀로 해야겠지.”
괜히 진혁에게 말해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뭘 비밀로 해요?”
“사장님!”
신지혜가 나를 바라보고 놀랐는지 어깨를 들썩였다.
“무슨 일 있어요?”
“아……. 그게.”
“네?”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어 보였다.
‘뭘 비밀로 한다는 거야? 무슨 일 있나?’
“아니에요. 잠시 뭐 좀 생각하느라. 혼잣말이 흘러나왔나 봐요.”
“저는 또 무슨 일 있나 하고 물어봤네요.”
“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
“아, 그리고 파이널 인터내셔널에서는 뭐래요?”
“잘 해결했습니다. 그냥 없던 일로 하려고요. 저희도 바쁜데 괜한 데 힘 빼기 싫어서요.”
“잘하셨어요. 괜히 서로 힘들 필요는 없죠.”
내가 잘했다고 그녀에게 웃음을 보이는 그때.
신지혜가 강한 어조로 나를 불렀다.
“사장님!”
“네?!”
“아……. 아니에요. 저 잠시 나갔다 올게요.”
“네, 그러세요.”
순간 그녀의 슬픔과 괴로움이 뒤섞여있는 눈빛을 바라보고 직감했다.
그녀가 무엇을 숨기고 있다는 걸.
하지만 내가 나서서 물어보기에는 모호한 상황이다.
분명 중요한 사항이라면 그녀가 먼저 나에게 말해줄 거라 믿고 있었다.
* * *
다음 날.
사성 모직의 원단이 아리raM 공장으로 입고되었다는 소식에 다시 안산으로 향했다.
“사장님 오셨어요. 인 라인 샘플[초반 견본] 사무실에 준비해뒀습니다.”
“네, 고마워요.”
사무실에 들어가자.
샘플로 우선 만들어진 남성 정장 세트와 여성 정장 세트가 눈에 들어왔다.
“좋은데요.”
내가 영상에서 본 모습 그대로다.
강하게 평행선을 이루고 있는 어깨선과 올곧게 펴진 허리선.
원단의 본연의 질감을 잘 살려준 바느질.
“바느질도 잘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