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말이 없어. 곧 있으면…….”
“제 손에 없습니다. 노랑머리의 외국인이 들고 갔습니다.”
“천주교도의 수장 말이더냐?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도들을 학살할 때 도망쳤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어쩌다 그놈 손에 들어갔단 말이냐.”
“제가 지키지 못했습니다. 너무 무서워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꼭 그 사람을 찾겠습니다. 그 사람을!”
“사연도 모르고 내가 미안하구나. 알았다 알았으니. 너는 좀 쉬고 있거라. 내가 끼닛거리 좀 챙겨올 테니.”
서현도는 장작불을 지피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상의원 전체가 힘을 모아 꾸민 일이 한순간에 허사로 돌아가 버렸다.
“침선장 어르신 저보고 어찌하란 말입니까….”
서현도도 자수장처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끝내고 상의원을 떠났다.
무서웠다.
제 죽음이 아닌 모두의 죽음이 무서웠다
그래서 피했다.
모르고 살면 영원히 기억 속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 믿었다.
근데 하문희를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질 거 같았다.
“저도 거기 있었어야 했나 봅니다.”
서현도는 준비한 음식을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얼른 들거라.”
하문희는 허겁지겁 밥을 목으로 넘겼다.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앞서는 듯했다.
“천천히 먹거라. 안 뺏어 먹는다.”
“죄송합니다.”
서현도는 그녀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물도 떠다 주며 간식거리까지 챙겨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정신을 차린 하문희에게 서현도가 질문을 이었다.
“여기서 그만하거라 너무 위험하다.”
“저만 살고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여기서 멈춘단 말입니까. 그 노랑머리의 외국인을 찾기만 하면 됩니다.”
“하…….”
서현도는 하문희를 애절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내가 찾아볼 테니 너는 몸을 추스르거라.”
“안 그러셔도.”
“지금 상의원의 상 자만 나와도 죽이는 판국에 네가 나가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여기 가만히 있는 게 돕는 것이다.”
“나리도…. 위험하지 않습니까.”
“내가 왜 위험하냐. 나는 이 동네 사람인데.”
서현도는 그녀에게 웃어 보이며 짐가방 하나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며칠 걸릴 것이다. 집 잘 부탁한다.”
“나으리….”
“문희야. 나도 못 찾으면 정말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때는 우리도 포기해야 한다. 내 말 알아듣겠느냐?”
“네, 알겠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너도 나와의 약조를 꼭 들어 주어야 할 것이다.”
“네….”
서현도는 긴 여정을 시작하는 듯했다.
“이렇게 끝나는 거야?”
나는 당황스러웠다.
큰 소득이 없이 영상이 흐릿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 흐릿한 영상이 다시 뚜렷해지더니 새로운 장면이 나타났다.
“시간이 흘렀어….”
마치 영상필름이 갈아지듯 모든 풍경과 장면이 바뀌었다.
분명 가을의 풍경이었다.
그런데 눈이 쌓인 겨울로 바뀌어 있었다.
“서현도….”
노랑머리의 외국인에 대한 소식을 찾아 나섰던 서현도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정장 원단 1.
* * *
서현도의 뒤를 밟은 것일까?
정복을 입은 사내 한 명과 그를 따르는 군졸 여럿이 그의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서현도!”
누군가의 부름에 서현도가 뒤를 돌아봤다.
“네놈이 어떻게 여기를….”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어릴 적 학식을 함께한 사이였다.
“네놈이라. 같은 양반이라고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감히 천출의 몸에서 태어난 반쪽짜리 양반 놈이!”
“나라를 팔아먹은 놈이 어찌 조선의 양반이라 칭한단 말이냐 그러고도 사대부라 할 수 있겠냐!”
“사대부…. 하하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나는 이제 천왕을 모시는 몸이다. 순순히 따라와라.”
“어림도 없는 소리.”
서현도는 있는 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저놈을 잡아라!”
“네!”
군졸들과의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젠장! 저놈들이 따라붙는 걸 몰랐다니.”
서현도가 마을 초입에 들어가는 그때.
“나으리.”
반가운 하문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서현도는 조용히 읊조렸다.
“내가 다가가면 문희가 위험하다.”
서현도는 하문희를 모르는 척하며 지나쳤다.
“나으…….”
순간 하문희 옆으로 군졸들이 달려나갔다.
“저놈을 잡아라!”
뒤를 이어 정복을 입은 양반이 하문희를 지나치려는 순간.
정복의 사내가 하문희 앞에 덩그러니 멈춰 섰다.
“네년 나를 알지 않느냐?”
“…….”
하문희는 고민했다.
분명 이자의 얼굴을 알고 있다.
나라를 팔아먹은 군부대신이 아들.
“모릅니다. 처음 뵙습니다.”
“아닌데…. 낯이 익단 말이야.”
군부대신의 아들이 그녀의 턱 끝을 끌어들여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흠…….”
그때.
마을 반대편 어귀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탕!
“뭐야! 총을 쏘라는 말은 없었는데. 빠가야로!”
군부대신의 아들은 하문희의 얼굴을 놓고는 총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갔다.
하문희도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이럴 때가 아니지.”
하문희는 군부대신 아들이 가던 길 반대편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으리….”
하문희가 도착한 마을 어귀에는 군졸들과 군부대신의 아들이 모여있었다.
그녀는 주위를 살피며 서현도를 찾았다.
“어째서.”
서현도는 바닥에 웅크려 총에 맞은 다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의식에 이끌려 하문희는 그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서현도. 어서 함의 행방을 말해라.”
“모른다.”
“네놈이 천주교도들과 대화하는 걸 하인 놈이 들었다고 했다. 어서 말해라, 아니면 죽일 것이다.”
“죽여라.”
군부대신의 아들은 가슴에서 권총 한 자루를 꺼내 서현도의 가슴을 겨냥했다.
“어차피 네놈만 죽으면 그 함과 그 옷은 영영 세상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하면 천왕께서 이 조선의 땅을 가질 것이다.”
“버러지 같은 놈들! 만약 훗날 그 옷이 세상에 나오는 날에는 역사가 달라질 것이다!”
“망상 속에 빠져 사는구나. 그냥 조용히 침선장의 뒤를 따라라.”
“네놈이었구나.”
탕!
서현도가 총을 맞고 정신을 잃었다.
총소리에 마을주민들이 모여들었고 군부대신의 아들은 모두를 향해 이리 외쳤다.
“다들 듣거라. 나는 서씨 집안의 서자를 죽인 것이 아닌 천주교도 서현도를 죽인 것이다. 알겠느냐!”
군부대신의 아들은 서현도가 메고 있던 작은 등 가방을 아궁이에 집어 던지고는 마을을 빠져나갔다.
하문희는 그들이 빠져나간 뒤.
서현도에게 다가갔다.
“나으리! 나으리.”
“문…. 희냐.”
다행히 서현도는 아직 살아 있다.
하지만 입에서는 선혈이 터져 나왔고 가슴팍에서는 피가 솟구쳤다.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서현도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하문희의 팔목을 잡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이미 늦었다.”
“하지만….”
서현도는 하염없이 눈물을 보이는 하문희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가슴 품에서 옥 팔찌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걸 줄려고 어제부터 기뻤는데. 내가 너를 울리는구나.”
“…….”
하문희는 가슴이 메어 왔다.
자신 때문이었다.
이 죽음은 서현도가 아닌 자신이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제가 죽었어야 했습니다. 제가……. 저 때문에 나으리가.”
“아니다. 네가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한다. 나여서 다행이다.”
“흑흑….”
“문희야 잘 들어라. 그 노랑머리 외국인은 이미 조선 땅을 떠나 미리견으로 돌아갔다더구나. 그와 함께 다니던 천주교도에게 직접 들었으니 거짓이 없을 것이다. 이제 너는 편안하게 아녀자로 살아가거라. 미안하구나. 이제부터는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나으리….”
그렇게 서현도가 눈을 감았다.
하문희는 팔찌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나으리….”
마지막 장면이 흘러나온 뒤.
영상은 끝이 났다.
‘미리견? 미국!’
여러 가지 사건과 의문점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다.
“차 대표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
“아 아닙니다. 근데 이 팔찌는 누구 거입니까?”
중요한 질문이다.
분명 하문희가 가지고 있었다면 박주선이 가지고 있어야 말이 되는데.
“아…. 그게. 아주 오래전 침선장이셨던 하문희 선생님이 내 스승님에게 주신 걸세. 잠시 맡아둔 무거운 짐이라며.”
영상 속 그녀의 팔찌가 분명해졌다.
“어째서?”
“그건 나도 모르지 스승님도 얼떨결에 받았다던데. 근데 이 한마디는 나도 스승님도 잊어버리지도 않고 있어.”
“무슨?”
“제자에게 물려주되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꼭 이 팔찌를 전해주라고 했다더구먼. 그 의미를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게 차 대표인 거 같단 말이지. 낯간지러워서 이런 소리 하기도 그런데 내가 들고 있는 것도 아닌 거 같고 그러니까 자네가 받아.”
“네. 제가 잠시 맡아두겠습니다.”
받을 자격이라.
이 한마디에 온몸 털들이 꼿꼿이 허리를 펴며 소름이 끼쳐왔다.
어쩌면 그녀도 나와 같은 능력이 발현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이러라는 법은 없지….’
깊은 생각에 빠져들려는 그때.
황의선이 내 등을 밀며 돌아가자는 말과 함께 걸음을 달리했다.
* * *
나는 신 디렉터, 류미리와 함께 안산 공장 앞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제가 자주 오는 집이에요. 갈비 정식 정말 끝장이에요.”
류미리가 신이 난 듯 우리에게 설명을 이었다.
그녀는 생산관리와 품질을 위해 당분간 안산에 상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