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명회가 모두 끝이 나고 원하는 인원에게만 계약서에 싸인을 하라 전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 디렉터가 두툼함 계약서 뭉치를 내 앞에 들고 나타났다.
“모두 서류에 사인했습니다.”
“그래요. 빠르네요.”
“다들 들떠 보이던데요.”
당연한 결과다.
이런 조건은 국내에 전무후무한 존재일 테니까.
자신의 능력만큼 돈을 벌어간다니 얼마나 혁신적이고 현대적인 방법인가.
“그럼 협약 인원들만 남겨두고 모두 돌려보내 주세요. 작업장 완공 이후에 다니 연락드린다고 말씀해주세요.”
“네.”
“전달 끝나면 회의실로 바로 와주세요. 저희 네 명이 포트폴리오 확인해야 하니까.”
나와 다니엘은 포트폴리오를 들고 회의실로 이동했다.
“다니엘 어때?”
“뭐가?”
“포트폴리오 말이야.”
“흠…. 솔직히 말해?”
“응?!”
“허접해.”
다니엘의 답변에 류미리가 꾸짖듯이 말을 이었다.
“다니엘 씨 기준을 내려요. 학생들 포트폴리오잖아요. 가능성을 봐야지 평가를 하면 끝도 없어요. 그렇게 계속 표지만 뚫어져라. 보고 있으면 답이 나와요?”
“아니. 그건 아는데. 포트폴리오 디자인이 이게 뭐냐고 우리 할아버지가 해도 이것보다 잘하겠다.”
다니엘은 한 권의 포트폴리오를 흔들어 보였다.
엉망인 표지디자인에 대해 말을 이었다.
“퀄리티가 아니라 디자이너의 포트폴리오가 디자인이 문제인 거야. 이런 표지 자체가 마이너스란 말이지. 표지디자인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심사위원이나 인사담당자가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게 표지란 말이야.”
그의 말도 일리가 있다.
디자이너의 포트폴리오는 처음부터 끝까지 디자인으로 감싸져 있어야 한다.
감각이 얼마나 좋은지를 보는 첫 단계가 표지디자인이다.
하지만 류미리는 다니엘의 평가하는 자세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인상을 구겼다.
“부족하지만 학생들이 밤을 새워가며 만들었을 거예요 그러니 좀 더 집중해서 봐주세요.”
“알겠다고 잔소리 사절이야.”
나는 중간에서 둘 모두의 심정을 이해했다.
류미리는 매우 감정적으로 당사자의 환경과 상황을 고려해 기준을 낮춘 상태에서 평가했고 다니엘은 그래도 기본은 해야 한다는 생각인 듯했다.
둘의 평가 기준이 다를 뿐.
틀린 사람은 없었다.
“둘 다 그만하고! 의상, 가방, 신발, 액세서리 위주로 평가합시다. 아직 프로가 아닌 시작이니까. 가능성만 보자고 그리고 미리 씨 여기는 학교가 아니라 기업이에요 너무 감정적인 평가도 안 좋으니까. 냉정하게 바라보세요.”
“알겠어.”
“네.”
뒤이어 신 디렉터가 합류하고 쌓여있던 포트폴리오가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내가 마지막 포트폴리오를 들어 올려 표지를 넘기자.
따뜻한 기운의 밝은 빛이 순식간에 내 눈을 집어삼켰다.
‘드디어.’
이번만큼은 기다렸다.
이 밝은 빛을 분명 이들 중에 아리raM에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를 바랐다.
산학협약 6.
* * *
어두운 장막이 사라지고 신발 판매장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나이크 매장인가?”
유명브랜드 나이크의 한정판 모델을 판매하는 편집샵이다.
전시된 신발 모두 시중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한정판 신발들뿐이다.
그때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학생이 신발을 둘러보며 가게 주인에게 질문했다.
“아저씨 이거 얼마예요?”
“현재 시가로 200만 원.”
“또 올랐네.”
신발가게 주인은 귀찮다는 듯이 대충 답하고 다른 손님에게로 이동하려 했다.
그런데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말을 이었다.
“나이크 매니아 들어가서 시세 보면 될 걸 왜 맨날 여기 와서 묻고 그래.”
“가격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고 여기 오는 건 실물을 봐야 신발을 만들 수 있으니까 오는 거고요.”
“네가 이거 보면 똑같이 만들 수나 있고?”
“아니요. 다음에요. 제가 멋진 신발디자이너가 돼서 이거보다 멋진 신발 만들 거라서요.”
“네가 이 조던1 시카고의 품격을 알아! 헛소리하지 말고 얼른 집에나 가.”
가게 주인은 장난스레 꾸짖듯 말을 남기고 다른 손님에게로 달려갔다.
하지만 학생은 들고 있던 조던1을 이리저리 유심히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진짜 멋지다. 매달 출시하는 나이크 신발들은 진짜 너무 다 이뻐.”
한참 동안 매장을 휘저으며 신발을 구경하더니 입구 앞 의자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걸 이렇게 바꾸고 이걸 저거랑 합치면.”
그때 신발을 팔아 기분이 좋은 가게 주인이 학생에게 다가와.
“이놈 또 시작이네.”
“이제 갈 거예요. 잔소리 사절입니다.”
“야 가더라도 한번 보여주고 가.”
“왜 맨날 아저씨는 잔소리하면서 이건 보려고 하세요.”
“그냥 재미있잖아. 내가 신발장사만 10년째인데 너 같은 놈은 또 처음이거든. 한번 보자고 그거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가져와 봐.”
가게 주인은 연습장을 빼앗듯이 받아들었다.
그렇게 학생이 그린 신발을 바라봤다.
“이야 오늘은 인정이다. 이쁘게 잘 그렸네. 이 부분은 고쳐라. 조던1의 느낌을 더 살려야지.”
“일부러 그런 거예요.”
“어휴,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너 진짜 이러다 유명한 신발디자이너 되는 거 아니냐.”
“된다고요. 저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에요.”
“그래 그때 되면 우리 가게에서 네 신발 왕창 사서 팔아줄 테니까. 유명해져라. 그리고 이제 좀 오지 말고.”
“내일 또 올게요.”
“아이고….”
중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연습장을 다시 돌려받고 가게 문으로 나서려는 순간.
나는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영상이 사라지고 나는 포트폴리오를 내려다봤다.
그의 포트폴리오는 다른 친구들의 포트폴리오와 살짝 달랐다.
표지는 골판지로 만들어 허접해 보일 수 있었지만, 색종이를 모자이크식으로 붙여 눈을 즐겁게 만들었다.
내용물은 누구보다 좋은 종이를 사용해 전문인쇄소에서 인쇄한 티가 났다.
“남다르긴 하네. 한번 볼까.”
목차 칸을 넘기고 나는 그의 디자인을 확인했다.
하지만 의상디자인이 예상했던 거보다 별로다.
‘영상은 뭐야. 설마 신발디자인에 능력이 있는 건가?’
나는 의문을 가지며 포트폴리오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별거 없네…….”
그때 내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신지혜가 말을 이었다.
“왜요. 표정이 진지한데 뭐 좀 나왔어요?”
“아니요. 생각보다 별것 없네요.”
“이 포트폴리오 한번 봐주세요. 이 정도면….”
신지혜는 남들보다 서너 배는 두꺼운 포트폴리오를 나에게 내밀었다.
“두껍네요.”
그런데 그때! 다시 한번 밝은 빛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나는 빛이 사그라드는 순간부터 신중하게 디자인을 꼼꼼히 확인했다.
“좋다….”
“그렇죠. 숨은 보석이 있긴 했나 봐요.”
포트폴리오에 그려져 있는 건 구두였다.
여성화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남성화도 상당히 많이 만들어놓았다.
나는 유심히 디자인을 관찰했다.
“신선하네요.”
“다 기존의 구두를 리미티드하게 변형시킨 거 같아요, 포트폴리오라 자신의 아이디어를 보여주고 싶었나 봐요.”
여성 구두 플랫폼과 스카핀, 도르세이, 티 스트랩…. 등 수많은 여성 구두의 형태가 스케치 되어있다.
그 옆에는 자신이 변형시킨 디자인을 그려놓았다.
그중 티 스트랩과 플랫폼을 뒤섞어 놓은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티 스트랩은 발에서 발목으로 이어지는 수직 스트랩 구두였고 플랫폼은 앞바닥이 두툼한 유형의 구두다.
이걸 합쳐놓으니 편안함과 세련미가 한층 더 높게 보였다.
“이건 바로 출시해도 히트할 가능성이 높을 거 같은데….”
“어디 봐봐.”
다니엘이 목을 쭈뼛 내밀며 내가 바라보는 포트폴리오를 유심히 바라봤다.
“와…. 프로급 실력인데 이 정도면.”
그의 말처럼 정말 국내의 전문 구두 디자이너만큼의 실력을 갖추고 있는 듯하다.
나는 처음부터 포트폴리오를 유심히 바라봤다.
“이 친구 디자인팀으로 영입하죠.”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그리고 이 친구도요.”
“한 명 더 있었어요?”
나는 빛이 뿜어져 나온 포트폴리오를 앞으로 내밀며 말을 이었다.
“이건데 한번 보세요.”
신지혜는 포트폴리오를 받아들고 유심히 디자인을 살폈다.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무표정하다.
‘역시 별것 없다는 소리네.’
“흠…. 딱히 특색이 있는 건 아닌데.”
“맞아요. 의상에는 큰 소질이 없는 거 같아요.”
“그럼?”
“스니커즈를 그려보라고 할 생각입니다.”
“스니커즈요?”
21세기로 넘어와.
정장과 스니커즈는 빼놓을 수 없는 패션 커플이다.
유명 컬렉션에도 구두 대신 스니커즈를 신고 런웨이를 하는 모델들이 늘어나는 추세였다.
2018년 기준 발렌사에서 발매한 스피드 런 스니커즈가 엄청난 매출을 올렸고 그 후에 출시한 트랙슈즈 또한 한 해 매출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밖에도 명품 구쯔의 라이톤과 루이바통 라이트 등 연이어 스니커즈가 큰 성공을 거두는 추세다.
“잠시만요.”
나는 회의실을 빠져나와
사무실에 있는 김형준을 불러들였다.
“김형준 씨 회의실로 잠시 와주세요.”
“저요?”
“네.”
회의실에 들어온 김형준은 자리에 앉아있는 우리 네 명을 바라보며 뻘쭘하게 서 있었다.
“무슨 일로?”
“아 긴장할 건 없어요. 제가 궁금한 게 있어서 불렀습니다.”
나는 그에게 스케치용 색연필과 연습장을 내밀었다.
“여기에 형준 씨가 좋아하는 디자인을 그려보세요. 시간은 많으니 여유롭게 하셔도 됩니다.”
“제가 하고 싶은 걸 그리면 된다는 거죠?”
“네. 뭐든지요.”
그에게 무엇을 그리라고 지시하지 않았다.
정말 내가 본 영상에 중학생이 김형준이라면 자연스럽게 스니커즈를 그릴 거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그가 붉은색 색연필을 들어 올렸다.
“오 스케치 실력은 좋은데요.”
“그러네요.”
김형준은 한 획 한 획마다 형체를 선명하게 만들어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생각한 디자인을 모두 연습장에 그려 넣었다.
‘역시.’
김형준이 내민 디자인은 스니커즈였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디자인이다.
“설명 한 번 해보실래요? 왜 이런 형태가 만들어졌는지?”
“…네.”
모두 그에게 집중했다.
네 명 모두 그가 그려낸 스니커즈 디자인에 빠져든 듯했다.
“제가 사실 나이크 마니아인데 어릴 적부터 정말 나이크 신발에 빠져 살았습니다. 근데 또 나이크라고 해서 다 좋은 디자인은 아니지만 오랜 역사를 가진 조던 시리즈 만큼은 명품에 버금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걸 변형시킨 겁니다. 제가 디자인했다고 해도 원래는 조던인 거죠.”
“그럼 조던을 카피해서 바꿨다는 말이죠?”
“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모르고 있구나.’
“그럼 한 장 더 그려보죠. 조던을 모두 배제하고 김형준 씨만이 생각할 수 있는 디자인으로.”
“……네.”
그는 다시 색연필을 들고 스케치를 시작했다.
정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한 획 한 획을 그었으며 그리는 순간마다 스니커즈 디자인이 궁금해질 정도였다.
그때 옆에 있던 다니엘이 귓속말로 말을 이었다.
“사장. 처음에 한 디자인 조던이랑은 전혀 다르잖아.”
“나도 알고 있어. 근데 그걸 당사자가 모르니 어째.”
김형식은 카피를 통해 창작의 단계를 만들어낸 디자이너인 듯 보였다.
오랜 시간 카피를 하며 아쉬운 부분을 수정해보고 더 이뻐 보이는 곳을 찾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창작의 눈이 생겼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너무 오랜 시간 한 가지에 집중하다 보니 창작인지 카피인지 구분을 못 하게 된 것이다.
“다 됐습니다.”
그가 책상 끝머리에서 연습장을 내미니 순간.
스케치를 가장 먼저 보게 된 류미리와 신지혜의 감탄사가 먼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