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니엘의 말을 듣고 잠시 회의 동안의 내 태도를 돌아보았다.
“하…. 생각도 못 했네.”
나도 사람이었나보다 눈앞의 급한 상황 때문에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작업실을 빠져나와 사무실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문 너머로 보이는 신지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낯간지러운 거 딱 질색인데.’
나는 큰 숨을 들이쉬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내가 들어오던 모습을 지켜보던 신지혜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고개를 저으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뭐야?’
내 느낌이지만 신지혜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보였다.
‘그래 내가 가야지.’
“신 디렉터님 저랑 이야기 좀 할까요?”
“네?! 무슨….”
“그냥 뭐. 잠시 회의실로.”
우리는 단둘이 회의실 테이블에 앉았다.
“신 디렉터님 제가 죄송했어요. 너무 몰아붙였죠?”
“…….”
신지혜의 눈이 붉게 물들면서 말을 이었다.
“제가 더 죄송해요. 아까 너무 화가 나서 계속 사장님한테 그랬어요.”
“괜찮아요. 제가 잘못했는데요.”
조금 진정된 분위기 속에 나는 내 의견을 그녀에게 자세히 전달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의견을 받아들이는 듯 보였다.
“제 설명은 여기까지예요. 아까는 상세하게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저도 경험이 부족했네요. 너무 국내 쪽만 생각했어요. 국내기업들은 대부분 업체에 맡기니까요.”
“그럼 저 용서해 주는 겁니까?”
“무슨 용서까지. 제가 잘한 것도 없는데요.”
나는 그녀에게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제 나갈까요?”
“네. 사장님 그리고 아까 네 개 업체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네?! 그걸 어떻게 해결하시려고.”
“제가 아는 의류제작업체 있어요. 그곳이랑 연결해주면 훨씬 좋아할 거에요. 아까 전화 온 브랜드들은 제가 소개해주는 업체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곳이거든요.”
“아…. 그래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그녀의 말을 듣고 왜 그녀가 업체를 선호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만큼 품질과 보안에 자신이 있었다는 소리로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아리raM만의 독자 라인을 구축하고 싶었다.
더 먼 곳을 바라보자면 늦기 전에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한국만이 아닌 세계로 나가야 해.’
* * *
김상진은 다음날이 되어 겨우 김형준을 만날 수 있었다.
교대근무를 하는 그의 시간을 맞춰야 했다.
“형준 씨 왜 갑자기 이러세요? 이유라도 들어야 저희도 납득이 가죠.”
“죄송합니다.”
“하…. 답답하네.”
김상진이 계속해서 질문해도 김형준은 말이 없이 이리저리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긴 한데 어려운 일인가 보네.’
김상진은 김형준에게 생각할 시간을 내어주었다.
오랜 침묵이 흐르고 김형준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회계팀장님이라고 하셨죠?”
“네.”
“저희 말고 다른 분들도 고용할 능력이 있나요? 실력은 저희보다 훨씬 뛰어난데.”
“네?!”
생각지도 못한 발언이 튀어나왔다.
김상진은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이었기에 쉽게 답변을 하지 못했다.
“이야기나 들어봅시다. 제 권한 밖의 이야기예요.”
“그게 저희 인원이 다 빠지면 회사가 안 돌아가요. 근데 그렇게 되면 남아있는 분들은 회사를 나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겠죠. 근데 회사가 망하지도 않았는데 그쪽 사장이 그분들을 다 자르겠습니까?”
“그럴 거 같아요. 저희가 이 회사에 들어와서 물량을 늘렸다고 들었어요. 만약 저희가 없어지면……. 사장님 성격으로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아요.”
“그래요…. 하 어쩌지.”
“그분들 모두 자식들 키우고 생계를 이어가시는 어려운 분들이라 동기들도 눈치만 보고 있어요. 그리고 같이 일하는 어른들도 저희 눈치만 보고 있고요.”
어린 나이의 청년이지만 마음이 참 따뜻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신만 생각하고 회사를 나온다고 해도 이들을 욕할 사람은 없을 거다.
하지만 김형준과 동기들은 같이 일하고 있던 모두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 인원이 어느 정도 되죠?”
“20명 정도 됩니다.”
“20명이라. 산학협약 인원까지 70명이네요.”
김상진이 의상제작과 물류에 대한 지식은 많지 않다.
하지만 브랜드 Han과 아리raM을 겪으며 본 세월이 상당하기에 알 수 있었다.
70명의 의상제작 인원이 엄청난 숫자라는걸.
‘몇 개의 브랜드의 물량을 충당하는 인원이면 분명 많은 건데. 골치 아프게 됐네.’
“형준 씨 제가 사장님에게 잘 말해볼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사장님이랑 전화통화 좀 하고 올게요.”
김상진은 무거운 마음을 이끌고 흡연장으로 이동해.
진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산학협약 4.
* * *
신지혜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이따위로 나온다 이거지 아리raM에 내가 있는지 몰랐겠지.”
브랜드의 고충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그녀다.
해결 방안 또한,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서랍에서 두꺼운 수첩 하나를 꺼내 들었다.
“영진은 정장브랜드니까. 럭셔리 원단제작이랑 연결하면 좋겠고 KWN은 캐쥬얼이니까 진성 섬유제작이랑 연결하면 되겠네.”
신지혜는 휴대전화를 꺼내 일일이 업체에 빈자리와 스케줄을 알아보기로 했다.
가장 처음으로 럭셔리 원단에 전화를 걸었다.
이곳은 3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 의류제작업체다.
그만큼 자부심 또한 대단한 곳이다.
한국의 의류산업 시작이자 끝으로 듣지도 보지도 못한 브랜드는 발주 자체를 거부하기로 유명하다.
“저예요 사장님. 바쁘세요?”
“이게 누구야. 신 디렉터 아냐.”
“잘 지내셨죠.”
“그래, 나야 잘 지내지. 연락 좀 하고 살아 이 사람아. 요새는 얼굴 한번 안 비추나 그래.”
“에이. 요새 너무 바빠서 그랬어요. 저 직장 옮겼잖아요.”
“아 그건 들었지. 그래도 놀러라도 와야지 내가 신 감독 오지 않으니까 심심해.”
“역시 저 생각하는 건 사장님뿐이네요. 제가 다음에 사장님 좋아하는 쭈쭈바 왕창 사서 갈게요.”
“나야 그럼 좋지. 그래 진짜 용건이 뭐야?”
“역시 사장님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다니까. 부탁드릴 게 있긴 한데.”
“뭔데? 신 디렉터 부탁이면 다 들어주지.”
“브랜드 하나 있는데 일감 좀 맡아주실 수 있나 해서요.”
“뭐 우리야 일감 준다는데 마다할 일 있나 스케줄도 두 개 정도 비었어.”
“다행이네요. 그럼 하시는 거로 알고 있을게요.”
“그려 다음에 밥이나 먹자고.”
“네. 감사합니다.”
그녀는 친분을 가진 업체에 모두 자리를 만들었다.
모두 대한민국 의상제작에서 유명한 곳으로 4개의 브랜드 모두 혹할 수밖에 없는 곳들이다.
“이제 브랜드에 전화하면 끝인데.”
신지혜는 자신감 넘치게 수화기에 번호를 눌렀다.
“아리raM 크리에이티브디렉터 신지혜인데요. 본사 사장님이나 제작 담당자랑 연결 좀 부탁합니다.”
“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
.
.
“네 전화 바꿨습니다.”
“안녕하세요. 아리raM 크리에이티브디렉터 신지혜라고 합니다.”
“아. 네 영진어패럴 제작팀장입니다. 무슨 일로 그러시죠?”
“제가 연락받고 좀 죄송하기도 하고 오해를 좀 풀고 싶어서요.”
“아……. 그거요. 저희도 마음이 급해져서 연락을 취한 건데 부담가지셨나 봅니다.”
“이해합니다. 같은 업종인데 저희도 다급해서 실수했네요.”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사과의 뜻으로 도와드릴 수 있을 거 같은데.”
“네?!”
“듣기로 섬유 불량률도 높고 납부기한도 못 맞춘다고 업계 소문 파다하더라고요. 그러다 컴플레인이라도 걸리면 큰일이잖아요.”
영진어패럴 담당자는 신지혜의 당당함에 놀라고 있었다.
‘이 여자 뭐야?!’
의상제작 때문에 싫은 소리를 했는데.
역으로 도움을 주려고 연락을 했다.
신기할 따름이었다.
“도움이라…. 말씀해 보시죠.”
“아. 제가 럭셔리 원단이랑 친분이 있어서요.”
“럭셔리 원단이요! 정종필 사장님 회사요?”
“네. 정종필 사장님이 운영하는 럭셔리 원단이요.”
“계속 말씀하시죠.”
신지혜는 수화기 너머 그의 표정이 떠올랐다.
순간 상대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입이 째지지.’
“제가 정종필 사장님한테 말씀드리니까. 제 부탁이니 스케줄도 비워놓는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말인데 업체 변경하시는 건 어떠세요? 강요는 아니고 제가 도움을 드리려는 거니까. 부담가지지 마시고요.”
“부담은요. 저희야 정말 좋은 조건이죠. 그 업체 아무나 못 들어가는 거 모르는 사람 있나요.”
“네 맞아요. 그리고 아시겠지만, 품질이랑 단가는 정말 업체 최고로 맞춰주시는 데라서 후회 없을 거예요.”
“당연하죠. 하…. 저희가 괜히 죄송하게 됐네요. 부담 드린 거 같네요.”
“아닙니다. 저희가 실례했는데요.”
“제 임의로 변경은 불가능하고 사장님이랑 상의드리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저희도 절차가 있어서요.”
“그럼요. 그래도 빨리 답변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연락이 온 브랜드 본사와 모두 전화를 끝마쳤다.
모두 긍정적인 반응이라는걸 전화 너머로 느낄 수 있었다.
‘속물들….’
그들이 이렇게 반응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의류는 품질과 납부기한을 못 맞추는 업체가 가장 최악이다.
판매실적과 컴플레인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
.
.
하루가 지나.
모든 브랜드가 그녀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업체를 변경하겠다는 연락과 함께 고맙다는 인사와 아리raM이 필요한 게 있을 때 언제든지 돕겠다는 말도 섞여 있었다.
“끝이네. 섬유 사장 넌 망했어. 사람 잘못 건드린 죄라 생각해라.”
* * *
남규태는 시끌벅적한 상황을 자신의 힘으로 억눌렀다며 혼자서 자화자찬하며 기뻐하고 있었다.
그러던 순간 휴대전화가 불이 나기 시작했다.
“전화 바꿨습니다.”
“남 사장님. 영진어패럴 제작팀장입니다.”
브랜드 본청의 전화에 인상이 일그러졌다.
또 납기 일자를 맞춰주지 못해 독촉 전화가 왔다고 생각했다.
‘공장장 이 개자식이. 조금 이따 보자.’
“네 팀장님 어떤 일이세요.”
“남 사장님 저희가 죄송하게 됐습니다.”
“죄송이라니요.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 회사 이번 물량 이후로 계약 파기하겠습니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제가 뭐 섭섭하게 했습니까?”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더 좋은 조건에 새로운 업체를 구했거든요.”
“더 좋은 업체라니…. 계약파기 위약금도 상당한데 그냥 계약일까지 유지하시죠.”
“뭐 그건 저희가 부담할 거고요.”
“하. 저희보다 좋은 조건이 어디 있다고 그러십니까. 다시 생각해주시죠. 부탁드립니다. 저희보다 싼 데 구하기 힘듭니다.”
“그렇게는 한데요. 솔직히 남 사장님 공장 불량이 너무 많아서 폐기하는 것도 많아요. 싼 게 싼 게 아닙니다. 그리고 납기 일자도 뒤죽박죽이라 매번 골치 아픕니다. 그래서 회사에서 업체를 변경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갑자기 이러면 저희는 어떻게 합니까? 하청업체 다 죽으라는 소리예요!”
“하여튼 그렇게 알고 계세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남규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계약파기 전화를 계속해서 받게 되었다.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던 그는 문자사서함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 문자 넣은 곳이네.”
영진어페럴, KWN, 제니…. 등 자신의 처지를 속속히 알려 아리raM을 압박하려 했던 브랜드들이다.
“어떻게 된 거야. 미치겠네.”
남규태는 소파에 앉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쌌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다.
“설마. 차진혁인가 뭔가 하는 놈 짓이야?!”
차진혁이라는 존재와 그가 운영하는 아리raM이라는 브랜드를 너무 얕잡아 본 큰 실수였다.
* * *
김형준을 만나러 간 김상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무겁게 깔린 목소리로 나에게 사건의 경위를 조목조목 말해주었다.
“70명이라….”
“네. 이 친구들이 아직 어려서 그런지. 마음이 여리네요.”
나는 한 치의 고민 없이 김상진에게 내 의사를 전달했다.
“받아들여 주세요. 지금은 큰 리스트일지 모르지만 분명 큰 힘이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팀장님이 왜 감사해요?”
“그냥. 저 친구들이 잘되길 바랐거든요. 마음이 이쁘지 않습니까. 저라면 절대 저렇게 못 했을 겁니다.”
“팀장님도 참 마음이 이쁘십니다. 하여튼 김형준 씨한테 잘 전달해주세요. 그리고 주말에 모두 모아서 이야기하는 거로 하죠.”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50명의 학생한테…….”
“네, 그렇게 전달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고생해주세요.”
70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