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더 버티자!”
형준이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재봉틀 앞으로 다가가 작업을 시작하려는 그때.
휴대전화의 진동이 느껴졌다.
“현진이?”
* * *
회계팀 김상진 팀장과 함께 경기도 인근에 커피숍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앳된 모습의 한 청년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혹시 아리raM에서?”
“네. 김형준 씨죠.”
“네.”
“앉으세요. 식사는 하셨어요?”
“네.”
내가 생각한 부분은 이들의 학자금 명목의 장학금을 아리raM이 대납하는 조건으로 이들을 빼 오는 거다.
솔직히 상도덕에는 어긋나는 짓이지만 업체가 행하는 모습에 짜증이 났다.
“근데 무슨 일로? 현진이가 나가보래서 나오기는 했는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재봉틀 기술자가 필요합니다.”
“아…. 네.”
“현재 같이 일하고 있는 분들은 몇 명 정도 되죠?”
“우리 학교 애들만 20명입니다. 그리고 다른 학교 출신들이 30명 정도 됩니다. 근데 현진이한테 저희 사정은 들으셨어요? 저희 다 묶인 몸들이라 옮기기 쉽지 않습니다.”
“네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해 보려고 온 겁니다. 이쪽은 회계팀 김상진 팀장입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주세요.”
“흠…….”
김형준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이후.
어렵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게 산학협약이 맺어진 지 2년이라. 2000만 원 가까이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문제가 또 있기는 한데.”
‘2000만 원 그 정도는 나도 생각한 바다. 근데 다른 문제라니.’
“대부분 회사 명의로 대출을 받았습니다. 다들 사회초년생이라 돈이 없는 상태에서 집도 구해야 하고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은 집에 돈을 주기도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근데 그게 왜 문제가 되죠?”
“만약 사장님 말대로 저희가 회사를 옮기면 다 갚아야 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그럼 우리가 생각한 예산을 웃돈다.
그때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상진이 말을 이었다.
“자세히 말해주시겠어요? 그렇게 말하면 저희도 대책을 세울 수가 없어서요.”
“네.”
최대치 3000만 원 이상의 대출을 은행보다 싼 금리로 내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퇴사와 함께 모든 걸 토해내야 한다고 말했다.
은행보다 좋은 조건이기에 어린 친구들이 대부분 받았다고 한다.
“3000만 원이라…. 형준 씨도 받았습니까?”
“네…. 어머니 병원비 때문에요.”
나는 김상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느 정도 가능합니까?”
“하…. 이거 사장님이 하신다면 억지로라도 추진하겠지만 신지혜 디렉터님이랑 다른 분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있죠. 회의를 통해서 결정하는 게 바르다고 생각하는데요.”
내가 만든 회사지만 아리raM은 함께 만들어가는 회사다.
김상진의 말도 일리가 있다.
“1인당 적게는 2천에서 많게는 5천. 대출이야 저희도 회사로서 빌려주면 되는 거고 다시 돌려받는 돈이니 문제는 없을 거 같은데요.”
“그렇긴 하죠.”
“50명 모두 빼 온다고 가정했을 때. 20억인데.”
“네.”
솔직히 욕심이 났다.
이 젊은 친구들을 아리raM의 직원으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니 설렜다.
“나쁘지 않은데.”
이 정도 여력은 우리에게도 있다.
나는 김형준에게 다음에 다시 만날 걸 약속하고 회사로 복귀했다.
그리고 긴급하게 회의를 추진했다.
* * *
“그래서 50명을 빼 오려고 20억을 쓰겠다는 거예요? 그럼 그 사람들은 월급은 안 받는대요. 그것도 아니잖아요.”
“그렇죠.”
“솔직히 말해서 욕심이에요. 의류업체에 맡기면 훨씬 싼 가격에 가능합니다.”
신 디렉터가 노발대발하며 언성을 높였다.
“사장님 20억이 적은 돈이 아니에요. 매장을 개점하면 10개를 오픈할 수 있는 돈이에요.”
“알고 있죠. 하지만 사람은 그보다 더 큰 가치를 합니다.”
“제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 줄 아세요.”
처음으로 신지혜가 내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녀의 말도 일리는 있다.
경력자를 구하면 그보다 싼값에 직원으로 채용할 수 있으며 업체는 더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브랜드의 퀄리티를 더 끌어올리고 싶었다.
“잠시 힘들겠지만, 이들을 더 성장시키면 훨씬 좋은 퀄리티와 의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
내 말에 다니엘이 말을 이었다.
“나는 사장 말에 찬성. 솔직히 신 디렉터 말대로 이른 감이 있기는 하지만 키워놓으면 분명 좋기는 해. 그런 예도 많이 봤고.”
“다니엘 씨….”
“신 디렉터. 우리는 가방만 명품으로 만드는 회사는 아니잖아. 명품이란 하나부터 열까지 고객에게 명품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줄 필요가 있어. 표면적으로야 손해지만 홍보나 마케팅에도 써먹으면 그보다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거야.”
“그렇기는 하지만.”
제작팀은 내 생각을 선호하는 반면 MD팀은 회의적이다.
신지혜는 마지막으로 현재 아리raM이 추진하는 오프라인 매장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가장 회사에서 부담이 되는 규모의 프로젝트다.
“사장님 지금 아리raM 오프라인 프리미엄 매장 8곳 추진 중입니다. 패션위크가 끝나는 시점에 오픈할 거고요. 그곳에 들어가는 매장비, 인테리어비, 매니저 고용비용도 상당합니다.”
“축소하는 쪽으로 다시 보고서 올려주세요. 광역시랑 서울에 두 군데만 오픈하는 거로 하고.”
“하……. 끝내 하신다는 소리네요.”
“네.”
나는 결단을 내렸다.
내가 결정하지 못한다면 회의만 길어질 뿐이다.
“김상진 팀장님은 김형준 씨랑 다시 약속 잡아주시고 설명회 준비해주세요. 단체로 모아서 스카우트하겠습니다.”
“네.”
먼 미래의 브랜드의 가치를 생각해야 한다.
잠시 편한 길을 찾아가다가는 분명 다음에 어려운 길을 맞닥뜨릴 게 분명하다.
내가 살아온 이 세계는 그러했다.
산학협약 3.
* * *
남규태는 화가 치밀어 올라.
책상을 부술 듯 발로 차며 짜증을 뱉어냈다.
“X발 새끼들 먹여주고 재워주고 학비에 일까지 시켜줬는데 나를 배신한다는 거야!”
“사장님 진정하시고.”
“진정? 진정하게 생겼어! 가뜩이나 일은 밀리고 일할 사람 없어 미치겠는데. 하여튼 젊은 새끼들 힘든 일이라면 안 하려고 이래저래 눈깔이나 굴리지.”
산학협약 인원을 아리raM에서 스카우트해간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인원이 빠져나가면 힘든 당사자는 공장장이기에 그는 심각성을 깨닫고 그걸 사장에게 바로 보고했다.
“애들 잡아야 하는데. 무슨 방법 없어?”
“일단 미지급한 임금부터 해결해야 할 거 같은데요.”
“그걸 왜 줘! 벌써 끝난 일이잖아.”
“알게 모르게 불만들은 있었습니다.”
“버릇없는 새끼들. 하…. 돌겠네.”
“일단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한 소리를 왜 하나. 산학협약 인원들 한 명씩 사무실로 올려보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네 사장님.”
공장장은 작업실로 내려와.
열심히 일하고 있던 산학협약 인원들에게 말을 이었다.
“산학협약으로 들어온 인원 한 명씩 사장실로 올라가. 사장님 면담하신다니까.”
공장장의 소리에 주위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야 들킨 거 아니야?”
“뭐야 어디서 새어 나간 거야?”
“회사에 비밀이 어딨어! 담배 피우는 데서 몇 마디 하면 다 소문나는데. 별일 있겠냐 올라갔다 올게.”
한 명씩 차례대로 사장 사무실로 올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실에서 내려오는 동기들의 얼굴이 어둡다.
“뭐래?”
“들어가서 들어봐라. 아 진짜 X새끼다.”
“…….”
사장실을 다녀온 인원들은 서로의 서로 눈치를 보며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다.
김형준은 궁금해졌다.
무슨 소리를 듣고 왔길래 다들 이런 모습인지.
마지막으로 자신의 친구가 내려오고 바로 사장실로 올라갔다.
“김형준 일로 와서 앉아.”
“네 사장님.”
“뭘 그래 딱딱하게 그래.”
처음 보는 모습이다.
이렇게 푸근하게 웃으며 자신을 대하는 사장의 모습.
늘 작업실로 내려와 공장장의 정강이를 까고 소리 지르며 윽박만 지르던 사람인데 말이다.
“무슨 일로?”
“네가 아리raM 차진혁인가 만났다면서?”
“그걸 어떻게….”
“괜찮아. 그 사람이 뭐래?”
“…….”
김형준은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힘든 사정을 듣고도 손을 내밀어준 사람을 팔고 싶지 않았다.
김형준이 말이 없자.
남규태의 웃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지며 사납게 말을 이었다.
“하여튼 어린 새끼들은 웃으면서 말하면 말을 안 들어요. 뭐 말은 안 해도 되는데 대답은 해야지! 내가 재미있는 거 알려줄까? 너희 나가고 나면 저기 남은 아줌마들이랑 아저씨들 다 어떻게 될 거 같냐?”
“…….”
“너희들 나가잖아. 그럼 어차피 회사 문 닫아야 해. 그럼 나이 많은 아줌마 아저씨들도 내가 다 잘라버릴 거야. 나는 이 회사 안 해도 돼 알겠냐. 다른 거 해도 평생 먹고 살아. 그러니 잘 생각해 아무리 양심이 없어도 1년 가까이 같이 일한 어머니 아버지 같은 분들 다 내팽개치고 나가겠어.”
“…….”
“아 그리고 안 나가면 보너스도 챙겨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고. 나도 이 정도면 너희 신경 써준 거야.”
“네 사장님.”
“나가봐!”
남규태가 손을 휘휘 저으며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X발 새끼!”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다.
김형준은 사무실을 빠져나오며 유리창 너머 작업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 어른들을 바라보았다.
“하…….”
산학협약으로 들어온 자신들을 자식처럼 생각해준 분들이다.
그리고 이곳에 일하는 분 중에 형편이 좋은 분은 없다.
모두 힘든 작업장에 아픈 몸을 끌고 와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하루 12시간씩 고강도로 작업을 하는 분들이다.
* * *
“사장님 큰일 났는데요. 갑자기 산학협약 인원들이 스카우트를 거부했습니다.”
“네?! 갑자기 왜?”
“그쪽 사장이 압박한 거 같은데 이유를 모르겠네요.”
골치 아픈 일이 벌어졌다.
최대한 조용히 일을 처리하려 했는데 복잡하게 꼬여갔다.
그러던 와중 신지혜가 전화를 받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브랜드 네 군데서 전화 와서 상도덕 지키라는데요. 자신들 물건 안 나오면 알아서 하라고.”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혹시 산학협약 업체가 산화 모직이에요?”
“네. 맞아요.”
“그곳에 발주 넣은 브랜드들이에요. 지금 자기들 물량도 못 받았는데 갑자기 무슨 재봉쟁이들 빼가냐고.”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김상진 팀장님은 지금 김형준 씨 만나서 이야기 좀 해주세요. 저는 브랜드 업체들이랑 이야기 좀 할게요.”
“네.”
신지혜는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벌어진 일이에요. 그렇게 뚱하게 있을 거예요?”
“제가 뭘요. 하….”
“책임은 제가 질 테니까. 신 디렉터님은 하던 일이나 하세요!”
점점 감정의 골이 깊어만 졌다.
생각이 다를 수는 있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는 게 내 경영철칙이다.
벌써 내 결정이 떨어졌고 MD팀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받아들였다.
근데 유독 신지혜만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명단이나 주세요. 제가 전화해볼 테니까.”
“여기요….”
나는 신지혜를 뒤로하고 사무실을 빠져 나와버렸다.
같은 공간에 있자니 숨이 막힐 거 같았다.
“여기는 웬일이야. 안 바빠?”
“아 그냥 작업실 내려와 본 거야.”
“신 디렉터랑 한바탕했네. 뭘.”
“아니거든.”
“아니긴.”
다니엘은 작업을 이어가는 와중에 대화를 이어갔다.
“내가 왜 너의 의견에 손을 들어 줬는지 알아?”
“왜?”
“네가 모르는 해외 명품 제작을 직접 겪었으니까.”
‘내가 왜 모르냐. 너보다 백배는 더 잘 알거든.’
“그들 모두 직영으로 운영해. 왜일까? 인건비, 복지에 엄청난 금액이 들어가고 업체에 맡기는 게 더 싼데 말이야.”
“품질과 디자인 유출 때문이겠지.”
“어?! 어떻게 알았어.”
“다 생각하고 의견을 제시한 거란다.”
“아…. 그걸 아는 놈이 그랬냐?”
“내가 뭘?”
“으그 사장아. 그렇게 자기 생각을 우기기만 하는데 신 디렉터가 사장님 말이 맞아요. 하겠냐고 당연히 짜증 나고 화나지.”
“아……. 그랬던가.”
“내가 해답을 줬으니까. 신 디렉터한테 가서 잘 타이르고 네가 아는 걸 설명해.”
“그래…. 고맙다.”
“그럼 다음에 소고기 사라.”
“오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