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200)

‘흰색 드레스와 포인트가 되는 허리와 엉덩이를 감싸는 가죽 치마라 나쁘지 않네.’

우열을 가리기 힘든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되레 설렜다.

저 무대 위에서 내 드레스가 어떻게 바뀔지 말이다.

잠시 뒤 나나세의 의상도 완성됐다.

이제는 평가만이 남았다.

나나세는 작업이 끝난 순간부터 내 의상을 날카롭게 바라봤다.

그리고 회심에 찬 웃음으로 나를 바라봤다.

‘건방진 거야. 싹수도 없는 거야?’

살짝 짜증은 났지만 무시하는 게 상책이다.

나와 나나세가 대립각을 세우고 있자.

엠마가 나서서 경기를 진행했다.

“이제 평가를 하기 전에 런웨이를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요. 엠마 오랜만에 무대에 한 번서야겠어요. 저 어때요?”

“이사벨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멋지죠. 뭘.”

“고마워요. 빨리 올라가요.”

엠마의 말에 이사벨이 설렌다며 무대에 올라갔고 뒤를 이어 엠마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나는 유리 조각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조심히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고마워요. Mr. 차.”

“별말씀을요. 그리고 부인께서 나갈 때는 제가 불을 끌 겁니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네?! 그게 무슨.”

나는 회심의 웃음을 내비치며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

.

.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며 이사벨이 무대 위를 한 바퀴 돌고는 제자리에 와 자세를 취했다.

“저 어때요.”

그 말에 구경하고 있던 부인들과 관계자들이 웃으며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이제 엠마 차례예요. 한번 걸어봐요.”

“네.”

엠마도 디자이너 출신답게.

조심스레 무대를 돌기 시작했다.

커다란 무대 위를 한 바퀴 돌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간.

무대의 조명이 한순간에 꺼졌다.

“스위치!”

내가 크게 외치며 무대 조명 스위치를 올렸다.

그 순간 주위에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

“코리아?!”

“뭐예요. 저게.”

파티장에 있던 모두가 화들짝 놀라며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옆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나진숙 여사가 내 손을 부여잡았다.

“차 대표. 이게 무슨…. 요술을 부렸네요.”

“어쩌다 보니 발견했습니다.”

내가 만든 드레스에 조명이 비추며 흰색원단을 파랗게 물들였다.

치마 하단에 부착되어 있던 유리 조각에도 빛이 반사되어 크리스털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멀리서 본 이 드레스의 모습은 태극이다.

붉은 벨벳과 조명에 비친 흰색원단이 파란색을 띠며 한국의 상징이 나타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인들의 탄성이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

.

.

순식간에 경기는 끝이 났다.

이제는 평가만이 우리를 기다렸다.

이사벨과 엠마는 임의로 만든 드레스를 벗고 다시 무대 위로 올라갔다.

“여러분. 결정하셨습니까?”

엠마의 물음에 아무도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화려하고 의미 있는 내 드레스와 트렌디하면서 일상에서도 착용할 수 있는 나나세의 드레스를 보고 갈등을 느낀 거다.

“결정하기 어렵다면 디자이너들의 이야기도 한번 들어보죠.”

엠마가 나와 나나세를 무대 위로 불러드렸다.

“누가 먼저 설명하겠어요?”

바로 옆에 있던 내가 먼저 마이크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무대 앞으로 다가가 말을 이었다.

“저는 디자인을 하기에 앞서 우리가 이렇게 모인 큰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태극은 한국의 국기에 있는 문양입니다. 그 의미를 말씀드리자면 평화와 창조, 조화, 평등입니다. 지금 여기 모인 분들의 국가, 인종, 추구하는 가치관이 모두 다르지만, 이 태극이 의미하는 것처럼 평화와 조화, 모두가 평등한 위치에서 어우러지길 기원했습니다.”

말을 끝으로 마이크를 내려놓자.

침묵이 조용하게 흘렀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고.

대한민국의 영부인이 나를 향해 힘차게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그걸 시작으로 무대에 있던 이사벨과 엠마.

무대 밑에 있던 18명의 국가를 대표하는 여인들의 박수 소리가 홀 전체를 울렸다.

“정말 대단한 의미가 깃든 드레스네요. 제가 처음으로 입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렇게 내가 뒤로 물러나자.

나나세가 내 마이크를 이어받았다.

“저는 현재의 추세인 가죽과 원단의 조화를 생각해 드레스를 만들었습니다. 저런 화려한 드레스는 아니지만, 누구나 부담스럽지 않게 입을 수 있는 디자인입니다.”

‘저런 화려한 드레스?’

아무리 적대하는 상대라지만 이런 자리에서까지 내가 만든 드레스를 깔아뭉개는 말투다.

기분이 상했지만, 선뜻 나서지 않았다.

‘참자, 참아. 참을 인이 세 개면 사람도 살린다는데.’

내가 분노를 삭이는 그때.

내 옆에 서 있던 이사벨이 나나세에게 다가가 마이크를 뺏어버렸다.

“나나세. 상대에 대한 예의를 지키세요. 굉장히 무례한 말투네요.”

“네?!”

이사벨의 꾸중에 나나세는 무슨 영문인지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그냥 처음부터 나나세는 예의라는 걸 탑재하지 못한 인간인 것이다.

이사벨은 마이크를 들고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는 나나세의 드레스를 입은 게 부끄럽습니다. 아주 아름답고 유행을 좇은 드레스였지만 이걸 만든 디자이너의 태도는 정말 짝퉁명품보다 못하네요. 저는 차진혁 디자이너에게 한 표 드리겠습니다.”

이사벨은 그 말을 끝으로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참고 있던 나나세의 예의 없는 태도를 더는 용납할 수 없다는 모습이다.

뒤를 이어 엠마도 나에게 한 표를 내어주었다.

그렇게 공개투표가 시작되었다.

“나도 한국에 한 표 주겠습니다.”

“저도요.”

“차진혁 디자이너에게 한 표 주겠습니다.”

태도 문제에서 우리의 평가가 나뉘어버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위주였던 나나세에 모두가 등을 돌린 것이다.

일본의 총리 부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파티장을 조용히 빠져나갔다.

엠마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마이크를 들어 올려 말을 이었다.

“승자는 한국의 차진혁 디자이너네요. 공교롭게도 재미로 했던 일이 커져 버렸습니다. 이런 일을 벌인 제가 사과드립니다.”

그녀는 무대 맨 앞에 나가 모두에게 고개 숙이며 승자를 알렸다.

뒤를 이어 모두의 박수 소리가 다시 파티장 전체를 울렸다.

‘재미…. 두 번 재미있다간 새우등 다 터지겠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그때 엠마와 이사벨이 나를 불렀다.

“차진혁 대표님.”

산학협약 1.

* * *

무더운 여름이 시작되었다.

원래라면 아리raM도 리조트 컬렉션을 열어야 하는 시기다.

리조트 컬렉션.

프레타 포르테 기성복 컬렉션인 F/W와 S/S 사이의 긴 공백기에 열리는 컬렉션이다.

매년 여는 컬렉션은 아니었지만 큰 매출이 생성되는 쇼이기에 요즘에는 매년 열리는 추세다.

하지만 현재 아리raM으로서는 리조트 컬렉션을 개최할 여력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런 이유에 내년으로 미룬 상태다.

“아쉽긴 하네. 리조트 컬렉션 매출도 상당하긴 한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 리조트 컬렉션 안 한 게 좀 아쉬워서요.”

“내년에 하면 되죠. 지금 S/S 서울 패션위크 준비도 안 끝났잖아요.”

“그렇긴 한데. 그때까지 공백기가 아까운 거죠.”

“사장님 지금 가방 물량 밀린 것도 상당해요. 괜히 욕심부릴 필요 없을 거 같은데요?”

“그렇긴 한데.”

6월호 VOKE의 영향으로 엄청난 매출 효과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뉴튜브에 업데이트한 영상으로 아리raM 가방은 튼튼하다는 이미지가 국민에게 심어졌다.

그로 인해 발생한 매출 효과가 엄청났다.

“정상회담 다녀온 이후에 저보다 더 매출에 신경 쓰시는 거 같아요.”

“아…. 이유가 있어요.”

‘아시아 패션 어워드…….’

그날 무대에 내려가는 내게 이사벨과 엠마가 다가와 자신의 나라를 방문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말했다.

“미국에 오면 꼭 연락해요. 상을 줘야 하니까.”

“저도요.”

“두 분 다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파티가 마무리되고 나와 영부인이 파티장을 빠져나가는 그때.

나나세가 나를 찾아왔다.

“이야기 좀 하죠.”

나는 영부인에게 잠시 시간을 내어달라고 부탁했고 다시 들어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요. 너무 우쭐대는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우쭐댄 적 없는데요. 자격지심 아닙니까? 할 말이 그거라면 저는 할 말이 없는데요.”

“뭐 또 만나게 되겠지만 그때는 제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그러시든지.”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영부인에게 돌아왔다.

‘내가 널 왜 또 만나니.’

아무리 패션업계가 좁다 해도 광범위하다.

마주치지 않으려면 평생 안 볼 수도 있는 사이인데 뭘 다시 본다는 말인가.

나는 그녀의 말을 흘려버리고 일정을 마무리했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대통령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차 대표 저랑 이야기 좀 할까요.”

“네 대통령님.”

비행기 한쪽에 마련되어 있던 테이블에 문명진과 단둘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그가 어렵게 꺼낸 이야기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어워드라…….’

문명진이 나에게 한국 대표로 출전해달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아리raM보다 더 크고 명성을 가진 디자이너와 브랜드는 한국에도 존재한다.

근데 아리raM을?

“제가 이 어워드를 참여함으로써 분명 반발이 있을 겁니다. 저희보다 더 큰 회사들도 많으니까요.”

“그렇겠죠. 근데 제 생각은 다릅니다. 큰 회사건 작은 회사건 필요가 없어요. 디자이너 싸움이 될 겁니다. 현재 한국에 차 대표만큼 젊고 능력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짧게 보고 결정한 게 아닙니다. 멀리 봐야죠.”

문명진은 현재 기성 디자이너가 아닌 젊고 새로운 신성이 필요했다.

짧게 끌고 갈 사업이 아니라는 판단이다.

길게는 십 년 이십 년을 바라봐야 한다.

“어때요? 해보겠습니까.”

“저야 당연히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근데 한 가지 부탁이 더 있습니다. 차 대표 말처럼 대기업과 유명한 디자이너들의 등을 아예 돌릴 수는 없습니다. 차 대표도 올해 안에 그 성과를 그들에게 보여줘야 할 겁니다. 매출이건 유명세건 말이죠.”

“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아요. 가서 좀 쉬어요.”

대통령과의 대화를 회상하는 그때.

신지혜가 내게 공문 한 장을 내밀었다.

“뭐예요?”

“벌써 잊어버렸어요. 한 달 반 뒤면 광복절인데.”

“아 맞다.”

너무 바쁜 일정으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늘 공문을 보내주더라고요. 행사에 참석할 독립운동가 후손들 명단이에요. 치수도 다 알아서 보내줬어요.”

나는 천천히 공문 내용을 확인했다.

인원과 치수가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인원이 상당하네요. 이건 우리 손으로 다 못할 거 같은데.”

“업체 몇 군데 알아볼까요?”

“업체보다는 우리가 생산설비를 구축하는 편이 이제는 효율적일 거 같은데.”

“흠…. 저는 별로인데 벌써 무리할 필요가 있을까요?”

“다 같이 회의 때 이야기해보죠.”

디자인팀, 제작팀, 회계팀, MD팀까지 모두가 모여 회의를 진행했다.

아리raM도 꾸준히 인력을 채용한 덕에 몸이 불어나고 있었다.

신지혜의 진행으로 회의가 시작됐다.

“이제 곧 시작하는 서울 패션위크부터는 의상을 대량생산해야 합니다. 그리고 광복절 행사도 있어요. 마냥 맞춤복으로는 갈 수 없는 실정이에요. 이제는 기성복 시장을 노려야 해요. 의견 부탁드립니다.”

나는 가장 먼저 회계에 대해 김상진에게 질문했다.

“회계팀 팀장님. 지금 예산이 충분하죠.”

“네 어느 정도 크기인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경기도 인근에 공장을 개설한다면 충분할 거 같습니다.”

“그렇다면 증설 쪽으로 ….”

솔직히 내 마음은 증설 쪽에 기울어져 있다.

외부 업체에서는 여러 가지 잡음이 수시로 발생한다.

그럴 때마다 생산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

나는 이런 리스를 최대한 줄이고 싶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다니엘이 손을 들고 말을 이었다.

“생산설비를 구축한다고 해도 인력을 어떻게 뽑을 생각이야? 아무리 기성복이라고 해도 재봉틀 기술도 바느질 기술만큼 정교해야 할 텐데.

다니엘의 말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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