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면 몰라요. 완전 촌스러워요. 돈이 없는 나라도 아닌데 좋은 거 사 입어요.”
“제 돈인가요. 국민의 돈이죠. 함부로 쓸 수 없는 돈이에요.”
“품위 유지비 없어요?”
“아…. 그건 모두 기부하고 있거든요.”
“영부인이면 품위 유지해야지. 맞춤 드레스는 아니라도 명품 정도는 입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수준 안 맞게.”
억양을 보아 일본인이다.
영어 발음이 좋지 못했다.
“그런가요. 제가 실수했네요. 저는 깔끔하게만 입고 나오면 되는지 알았거든요. 그리고 이렇게 무례한 분이 있는지도 처음 알았고요.”
“무례라 무례는 당신이나 그 나라 사람들이 더 무례하지. 맨날 일본에 부탁이나 하고 우기기나 하고 말이야. 역사가 어쩌고저쩌고 멍청한 것들.”
“그게 무슨?”
영부인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혀 버렸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것들이 자신들만 옳다고 말하는지.
“키미코 씨는 옷만 화려한 거 같은데. 정신이나 똑바로 차리세요. 역사도 똑바로 공부하시고요.”
영부인의 말에 주위에 있던 부인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키미코는 술기운과 짜증이 겹쳐지며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고아 주제에 보이는 게 없나 보지!”
“그걸 어떻게?!”
영부인의 표정이 한 순식간에 굳어갔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대통령에게 누가 되기 싫어 가슴속에 고이 숨겨둔 이야기였다.
그런데 어떻게 키미코가 알게 되었는지 분하고 억울했다.
“일본이 모르는 게 있을 거 같아! 어디 족보도 없는 년이 거지 같은 꼴로 파티장에 나와서 큰소리야.”
키미코의 폭언에 주위는 정적에 휩싸였다.
긴박한 상황 속 굳건히 닫혀있던 파티장의 문이 열렸다.
문 앞에는 일본 총리와 한국의 대통령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분명한 건 키미코의 목소리를 모두 들었다는 거다.
“미친!”
일본 총리가 욕을 뱉으며 그녀에게 빠르게 달려왔다.
그리고는 자신 아내의 뺨을 쳐버렸다.
“멍청한 년 주제도 모르고 어디서 감히 한국의 영부인에게 당장 사과해!”
“여보….”
“당장 사과하라고.”
흑흑.
“죄송합니다. 영부인 제가 술기운에 실수했네요.”
일본의 수장은 밖으로 나가기 전.
영부인과 대통령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 아내가 많이 취했나 봅니다.”
“…….”
“차후에 이야기하시죠.”
매우 정치적인 태도다.
일단 상황을 회피하고 보자는 심산인듯하다.
그렇게 총리 뒤로 울먹이던 키미코가 바삐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문명진은 아내의 어깨를 감싸며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는 파티장에 있는 모두에게 고개 숙였다.
모두에게 지금 있었던 일을 모두 묵과해주길 당부하며.
영상은 그의 고개 숙인 모습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그래서…. 나에게 부탁했던 거구나. 근데 진짜 이런 상황을 외부에 안 알렸다고’
문명진도 대단하지만 이 정도 사건을 외부로 알리지 않은 영상 속의 사람들도 대단했다.
모두 한 나라의 최상위집단이다.
분명 이득이 있으니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근데 왜? 불길한 검붉은 빛이 일어난 걸까? 설마 또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건가.’
나는 정신을 차리고 영부인에게 드레스 입기를 권했다.
“여사님 드레스 착용하고 나오시면 제가 연출해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잠시만 기다려요.”
탈의실로 들어가는 그녀의 얼굴에 띤 미소를 바라보니 괜히 기분이 좋았다.
얼마 후 드레스로 갈아입고 나온 영부인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잘 어울리시는데요. 너무 아름다우세요.”
G20 정상회담 5.
* * *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중년 이상의 나이지만 몸매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V자 벨트와 준비한 액세서리를 내밀었다.
“어때요?”
“잘 어울리시는데요.”
“그래요. 너무 과하지는 않죠?”
“네. 이제 가실까요.”
“그래요.”
파티시간이 다가왔다.
우리는 룸을 빠져나와.
파티장으로 이동하기 위해 차에 올라탔다.
.
.
.
각국의 수장들의 아내가 모이는 파티가 시작되었다.
나름 알려진 파티이기에 연회장 입구에는 각국의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영부인이 천천히 차에서 내리자.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그 모습에 나는 조용히 그녀의 옆으로 비켜섰다.
오늘만큼은 오로지 영부인이 빛나길 바라며.
* * *
파티장에는 세계 정상들의 아내들을 지키는 경호원과 보조하는 관계자와 파티를 주관하는 스태프만이 자리했다.
최소한의 인원으로 그녀들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려는 의도가 비쳤다.
우리가 파티장에 들어서자.
몇몇 안면이 있는 여인들이 다가왔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작년 이후에 처음입니다.”
“근데 옆에 데리고 온 사람은 누구죠?”
“아. 패션디자이너예요.”
영부인과 대화하고 있는 사람은 미국의 영부인 이사벨이다.
현재 미국의 대통령은 재벌 출신으로 그의 아내는 모델 출신으로 유명한 여성이었다.
“패션디자이너라고요. 어느 브랜드죠?”
“아리raM입니다. 차진혁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와. 영어 발음이 엄청 좋은데요. 이사벨이라고 해요.”
뒤를 이어 프랑스 총리 부인인 엠마도 우리에게 다가와 영부인에게 인사했다.
“저번에 불미스러운 일은 잘 해결하셨어요?”
“네. 뭐.”
“무례한 일본 총리 부인은 아직 안 왔네요. 그때 말리지 못해 미안했습니다.”
“괜찮습니다.”
둘의 대화를 들으며 영부인의 현재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모두가 존중해주는 느낌이야.’
그곳에 모인 여성들은 모두 영부인을 존중으로 대했다.
셋은 화기애애한 대화가 이어갔다.
그때 이사벨이 나진숙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Ms 나. 이번에 올라온 기사 잘 봤어요. 그렇게 큰돈을 기부하다니 대단해요. 평생 모은 돈이라고 기사에서 읽었는데 진짜예요?”
“네, 뭐 조금씩 모으다 보니. 대통령이 허락해준 덕분이죠.”
“모두 그 기사 보셨죠. Ms 나가 세계기구에 기부한거요.”
이사벨의 말에 주위에 모여있던 모두가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영부인도 그에 화답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근데 Ms 나. 질문 하나 해도 돼요?”
“네, 하세요.”
“혹시 이 드레스랑 가방 어디 제품이에요? 상당히 고급스러운데. 가방도 수제 가방인 거 같고.”
“맞아요. 수제 가방.”
“정말요. 좋은 정보 있으면 좀 줘요.”
“아 그게.”
영부인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까 소개한 디자이너의 가방이에요.”
“Mr. 차가 만든 가방이라고요. 아리raM?”
“맞아요. 이 드레스도 차 대표가 직접 다 만들어 준 거예요.”
순간 이사벨이 나에게 말을 이었다.
“Mr. 차! 저 가방 얼마죠? 바로 구매 가능한가요?”
“바로는 안 될 겁니다. 2달 정도 기다려야 해요.”
“2달?!”
“네, 모두 수공예로 제작되는 터라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하지만…. 이사벨이 원한다면 바로 구해드리죠.”
“바로 가능해요? 정말.”
“네 원한다면 제가 선물해드리겠습니다.”
만약을 대비해.
영부인에게 쥐여준 같은 종류의 시크릿 백을 5개 더 준비해왔다.
만약 여기 모인 레이디 중 한 명이라도 시크릿 백을 원한다면 흔쾌히 선물할 요량이다.
이들이 들어만 준다면 자연스럽게 광고 효과를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때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프랑스 총리 부인인 엠마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둘이 너무 친해진 거 아니에요. 근데 무슨 가방 말하는 거예요?”
“아 Ms 나가 들고 있는 저 가방 말이에요. 너무 이쁘지 않아요? 이분이 만들었대요.”
엠마는 이사벨의 말에 영부인이 들고 있는 시크릿 백을 유심히 바라봤다.
“수제 가방이네요. 보니까 최고급 재료만 사용했고요.”
역시 프랑스 총리 부인이다.
소문으로는 패션스쿨을 졸업한 수재로 루이 바통에서 디자이너로 오래 일했다고 들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호응하듯 대답했다.
“맞습니다. 정확하게 알아보시네요. 카프스킨 앱송으로 만든 가방입니다. 모두 손으로 만든 100% 핸드메이드입니다.”
“불어를 잘하시네요.”
“패션디자이너가 되려고 공부했습니다.”
과거 파리에 육 년을 넘게 살았는데 이 정도쯤이야.
프랑스인의 특징이 있다.
모국어에 대한 애착.
고급스럽고 고귀한 민족이라 믿는 그들이라 모국어를 사용하는 타국의 사람에게 굉장히 흥미를 느낀다.
“흥미롭네요. 차진혁이라고 했죠? 브랜드 이름이 뭐죠?”
“아리raM입니다.”
“처음 듣는 브랜드인데…….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한국에서 오트 쿠튀르를 경연대회처럼 하지 않았나요?”
“네, 맞습니다.”
“그럼 그 대회 우승브랜드가 차의 브랜드입니까?”
“네.”
엠마는 영부인에게 잠시 가방을 보고 싶다며 정중히 부탁했다.
그녀는 웃으며 가방을 선뜻 내주었다.
“내부도 정말 잘 디자인했네요. 그리고 이 포인트 부분 이건 뭐죠? 처음 보는 건데?”
“자개라는 겁니다. 한국 전통공예입니다.”
“정말 아름답네요. 저도 구매하고 싶어요. 얼마죠?”
“제가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같은 디자인이면 될까요?”
“선물이라. 이렇게 좋은 가방을 그냥 받는다니 미안한데요.”
“제 성의입니다.”
우리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파티장의 문이 다시 한번 열렸다.
* * *
G20 정상회담.
20명의 국가수장이 모여 회의를 시작했다.
여러 가지 의제와 토론이 이어졌다.
“인도네시아가 포함된 기후변화에 관한 토론은 다음에 다시 하도록 하고 3번 의제 넘어가겠습니다. 경제 아이디어입니다.”
의장의 의제 발표가 이어지고 각 나라의 대표들이 손을 들어 자신의 견해를 발표했다.
문명진의 차례가 돌아왔고 한국에 대한 견해와 생각을 전달했다.
“한국은 브랜드 체인에 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문명진의 내용은 진혁과의 대화 이후.
빠르게 참모진과 머리를 맞댔다.
그렇게 긴 시간 회의를 통해 정상회담 의제에 수긍할 수준의 발표자료를 준비했다.
진혁의 의견과 비슷한 맥락이지만 그 범위를 넓게 바꾸었다.
“현재 각 나라의 산업들은 서로를 견제하고 무너트리며 뺏고 뺏기는 싸움을 하며 성장해 왔습니다. 왜일까요?”
“당연한 거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성장하면 누군가는 도태돼야 하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쓰러지는 기업이 있다면 같이 일으켜 세워야 하며 지쳐서 더는 움직이지 못한다면 함께 걸어가 주어야 합니다. 함께 성장하고 함께 이끌어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시안이 어떻게 됩니까?”
“브랜드 체인입니다. 브랜드와 브랜드를 묶어 같이 성장해야 합니다.”
문명진의 발표에 강대국들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
대한민국과 경제 수준이 비슷하거나 못한 나라는 정말 환호할 일이다.
자신들보다 나은 나라의 영향을 받을 수 있으니 하지만 가진 자들이 달가워할 리가 없다.
그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미국 대통령이 마이크를 앞으로 당겨 말을 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건 알고 하는 소리죠?”
“강대국들이 조금만 내려놓으면 가능합니다.”
“이봐요. 한국 대통령님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럼 우리도 같이 힘들어진다는 소리인데 거기에 대한 해결방안은 있어요?”
“잠시 힘들지 모르지만, 체인으로 묶이면 환율이 안정되고 소비가 촉진될 겁니다. 시간이 지나 지금 약간의 손해를 본 강대국들의 물품이 수출되고 소비가 촉진될 가능성이 큽니다.”
“흠…….”
순간 서로의 진영이 나누어지며 혼란이 일어날 징조가 보였다.
그때 의장이 망치를 두드리며 주위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한국의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
그때 프랑스 총리가 손을 들어 말을 이었다.
“한번 시도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는데요.”
“프랑스랑 한국이랑 손잡고 한번 해보는 건 어때요?”
미국 대통령이 비꼬듯이 말했다.
프랑스 총리는 그를 향해 한 번 웃어 보이고는 들고 있는 자료를 하나 꺼냈다.
“프랑스로만 가능하겠습니까. 이 자료를 보면 한국 대통령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
프랑스 대통령이 내민 자료는 각 나라의 수출품목과 소비패턴 그리고 경제 대국과 개발 도상국의 경제 차이를 보여주는 분석 자료다.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소비를 촉진한다는 말은 굉장히 공감 가는 상황입니다. 제 의견이지만 한 분야를 먼저 시범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디를 말이요!”
“프랑스는 가장 큰 부분을 내놓겠습니다. 패션입니다!”
순간 중국 주석과 일본 총리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