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200)

“역시. 저는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네요. 찾아오길 잘했어요.”

그녀의 말에 한명숙이 한 번 웃어 보이더니 말을 이었다.

“미리야 이제 남은 건 네 몫이다. 너는 내 제자고 그만한 자격과 실력이 있다.”

“선생님….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한데 과찬이세요.”

“너도 나만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 겸손한 것도 못 쓰는 법이다. 오랜 시간 내 꾸중을 들어가며 한복을 만드는 일만큼 오래 수를 놓았지 않았니 이제는 마음의 여유도 찾은 거 같으니 한번 해봐. 이 생동감 있는 자수를 기억하면서 말이야.”

“…네.”

한명숙은 자신이 들고 있던 바늘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 바늘은 대대로 내려오는 자수장들의 바늘이다. 그러니 이제 네가 쓰거라.”

“선생님….”

류미리는 놀란 표정으로 그녀가 내민 바늘을 바라보았다.

무슨 의미가 담겨있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런 그녀를 빤히 보고 있던 한명숙이 류미리에게 가까지 다가갔다.

“이제는 네가 이 짐을 들고 가야 한다.”

“네 선생님.”

무슨 말인지 알 수는 없으나.

마치 자수장의 권한 모두를 류미리에게 넘겨주는 모습인 듯 보였다.

내가 멍하니 둘을 바라보고 있자.

한명숙이 내게 말을 이었다.

“차 대표. 우리는 나가서 차나 한잔하지.”

“네, 선생님.”

한명숙과 나는 류미리를 남겨두고 마당 옆에 작게 마련돼있는 테이블로 이동했다.

“커피 괜찮지?”

“네 그럼요.”

“내가 커피를 좋아해서 커피는 많아.”

그녀는 사뭇 진지한 모습으로 나에게 말을 이었다.

G20 정상회담 3.

* * *

* * *

나나세는혼신의 힘을 다해 총리 부인의 의상의 디자인을 만들어갔다.

자신의 브랜드를 더욱 강하게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아니야! 이딴 걸로는 그들의 눈에 띌 수 없어. 하……. 이놈이고 저놈이고 내 머리만 복잡하게 하네.”

수십 장의 스케치 종이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그녀는 몇 시간째 색연필의 끝을 휘갈겼다.

한창 작업이 이어지는 그때.

사무실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누구야!”

“나.”

검은 선글라스, 검은 정장과 검은 와이셔츠를 입은 남성이 그녀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여기는 왜?”

“회장님이 남긴 쪽지를 전하러 왔지.”

“…….”

“인상 펴. 너도 이제 우리 소속이면 이 정도 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려놓고 꺼져!”

“분명히 말하는데 단독행동은 삼가는 게 좋아. 그리고 이번 일은 아주 쉬운 일이야. 누굴 죽일 필요도 없고 그냥 놀아주고 귀찮게만 하면 되는 거든.”

검은 정장의 남성은 짧은 말을 남기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나나세는 떨리는 손으로 펜을 내려놓고 그가 남기고 간 쪽지를 들어 올렸다.

나나세. 이제 자네도 우리 그룹의 일원이라는 걸 보여야 할 거야. 나는 준 만큼 돌려받아야 직성이 풀리거든. 성과를 이루지 못한다면 바닥뿐이라는 걸 잊지 말게. ― [아리raM]

길지도 짧지도 않은 문장 속에 아리raM이라는 브랜드명이 적혀있었다.

나나세는 마지막에 적힌 브랜드명 한 자 한 자를 잊어버리지 않으려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리raM?”

그녀는 쪽지를 라이터 불로 태워버린 후.

겉옷을 챙겨 밖으로 빠져나갔다.

나나세는 은밀히 마련된 공간에서 아리raM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회사길래. 회장이 쪽지를 보낸단 말이야.”

한참 동안 자료를 찾던 그녀는 아리raM의 대표인 진혁의 얼굴을 기억하고는 검색창을 닫았다.

“이런 작은 불씨도 예민하게 받아들인단 말이지. 노망나셨군.”

그녀는 다시 겉옷을 입고는 차에 올라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자신을 지켜보는 검은 정장의 남자가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멍청한 년.”

그리고 그는 휴대전화를 들어 올려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네 보스. 그녀에게 잘 전달했습니다.”

“…….”

“그냥 제가 나서서 없애버리는 게.”

“…….”

“네 죄송합니다.”

그는 전화 종료 버튼을 누른 후.

전화기를 버려버렸다.

“귀찮게 하네.”

* * *

선생님과 나는 화단이 보이는 테이블에 앉았다.

봄이 지나고 무더위가 다가오려는지 따뜻한 바람이 찬바람과 섞여서 불어왔다.

“노곤한 바람이 부네. 차 대표.”

“네, 선생님.”

그녀는 말을 하려다 말고 잠시 사색에 잠겼다.

“흠……. 혹시 김태현이라는 분 알고 있어?”

“…….”

순간 잊고 지냈던 사람의 이름이 튀어나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 아니겠지.’

돌아가신 아버지의 성함과 같다.

하지만 지금의 나와는 연관성이 없는 분이시고 한국에서 흔한 이름 중 하나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없긴 하네. 참.’

할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버지와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사실 궁금했지만 나도 먼저 물어보지 않았다.

그때는 할아버지만 있다면 모두 필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동명이인이겠지.’

“아니요. 처음 듣습니다. 근데 그분은 왜?”

“아는 사람이랑 자네가 많이 겹쳐 보여서 말이야.”

“닮았나요?”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느낌이 그래서 설마 하고 물어봤네. 내가 실수했어. 이러려고 부른 게 아닌데.”

그녀는 실수라며 말을 끊어 버렸다.

‘뭐지….’

이 찜찜한 기분이 싫었다.

나는 다시 그녀에게 질문했다.

“그분 성격이 저랑 닮았나 봐요?”

“닮았다기보다 풍겨오는 느낌이 그래. 말하자면 어려우니 묻지 마.”

그녀의 눈은 잠시 감더니 슬픈 기운으로 가득 찼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나.

무언가 뭉클한 감정이 그녀의 얼굴에 피어올랐다.

“우리 미리가 참 차 대표한테 의지하는 거 같던데. 진짜 무슨 사이야?”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나는 두 손을 흔들어 보이며 부정했다.

“미리 정도 성격에 미모면 괜찮지. 뭘 그리 튕기나.”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직장동료일 뿐입니다.”

“어휴 마음의 상처가 많은 아이니 서로 잘 챙겨주고 하면 좋지.”

“진짜 아무 사이 아닙니다.”

“재미없네. 은근 기대했는데. 그리고 차 대표 박 선생님 이야기 들어보니까. 무형문화재 선생님들이랑 작업한다지?”

“작업한다기보다 제 일을 도와주고 계십니다.”

“참 차 대표가 그분들 모셔줘서 내가 마음이 편해. 그래서 얼굴 한번 보고 싶긴 했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젊은이가 그분들 마음을 사로잡았나 하고 말이야.”

그녀는 말이 끝나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잘생겼네.”

“네?!”

“내가 잘생긴 거 못생긴 거 관상을 보거든. 잘생겼어.”

“아…. 네.”

류미리가 말하던 성격과 관상을 본다던 게 이런 거였다니 허무함이 밀려왔다.

그렇게 나와 한명숙은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누며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이제 한번 가볼까. 이 정도면 자수 한두 개는 완성될 시간이니까.”

“네.”

우리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침 류미리도 완성된 자수의 뒤 실을 정리하고 있었다.

한명숙은 그 모습을 지켜보더니 말을 이었다.

“어디 한번 보자.”

류미리는 긴장이 되었는지 손을 떨며 드레스를 내밀었다.

“오랜만이라 긴장되네요.”

“뭐 하루 이틀이야. 너는 맨날 검사 때면 긴장했으면서.”

“제가 그랬나요.”

한명숙은 류미리가 내민 드레스의 하단 자수를 확인했다.

자신이 했던 자수 옆에 놓여있는 작은 민들레 두 송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왜 내가 한 민들레는 오른쪽에서 바람이 부는데 네 민들레는 왼쪽에서 바람이 불꼬?”

한명숙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류미리를 바라봤다.

류미리는 주먹을 부여잡으며 말을 이었다.

“바람이 어디 한길로만 통하겠습니까. 이런들 저런들 자기 마음 가는 데로 불어오는 게 바람이지 않습니까. 그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하하하.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녀의 말에 한명숙이 바닥을 치며 크게 웃어 보였다.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장하다 장해. 이제야 자수장인에 한 걸음 들어왔구나. 그래 자수란 그런 것이다. 아무런 감정 없이 만든다면 자수라 할 수 없지.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고 마치 꽃 한 송이라도 자기 마음을 가지도록 한 땀 한 땀 만들어 가야 한다.”

“네, 선생님.”

“이제 이거 들고 돌아가라. 해 떨어지겠다. 또 먼 길 가야 할 텐데.”

“저녁 식사라도 같이하시죠.”

“아서라. 이 선생님도 남자친구가 있거든 너는 저놈이랑 가서 밥 먹어.”

“……네.”

한명숙의 말에 류미리의 볼이 불그레하게 변했다.

‘왜 저래….’

우리는 한명숙에게 다음에 또 찾아뵙는다고 인사를 드린 후.

집을 빠져나왔다.

“사장님. 이 드레스 자수 제가 해도 되겠어요?”

“물론이죠. 장인도 인정한 제자가 한다는데 제가 말릴 도리가 있나요.”

“최선을 다해볼게요. 정말이요.”

“네 부탁드릴게요.”

“그럼 완성되면 저도 소고기 사주세요.”

“웬 소고기? 저도?”

“장하나 씨한테 1대1로 소고기 사준다고 하셨다고 들었는데.”

“누가 그래요?”

“장하나 씨가요.”

“둘이 연락해요?”

“네 아리raM 여자분들 단체채팅방 있거든요.”

“아 그래요. 제 욕하고 그러지는 않죠?”

“아니요. 하는데요.”

“정말요?!”

“장난이에요. 그냥 수다방이에요. 한두 명씩 모이다 보니 방이 생겼어요. 초대해 드려요?”

“아니요.”

그녀는 슬며시 단체채팅방을 내 앞에 내밀었다.

그리고 비밀은 없다며 나를 압박해왔다.

“소고기 사주실 거죠?”

“그럼……. 같이 드실래요?”

“아니요!”

그녀는 절대 그럴 수 없다는 답변을 남기고 차에 올라탔다.

“다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 * *

서울공항에 도착해 개별적 출입 절차를 마치고 게이트로 들어왔다.

그때 스튜어디스인지 안내원인지 모르는 분이 나에게 다가왔다.

“청와대 관계자이십니까?”

“네, 그런데요.”

“그럼 바로 이동하셔야 합니다. 따라오시겠어요.”

“네.”

일반 게이트를 통해 입국 심사를 마쳤지만, 버스를 타고 대통령 전용기가 있는 곳으로 바로 이동해야 했다.

10여 분을 이동해 버스에서 내리니 비행기 주위로 사람들이 가득하다.

방송용 기자들과 정치인들이 한데 섞여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국무총리네….”

내가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검은색 정장에 선글라스까지 착용한 젊은 여성 한 명이 내게로 다가왔다.

“혹시 차진혁 대표님입니까?”

“네 그런데요.”

“저는 경호 2팀 김예림이라고 합니다. 여사님께 부탁받았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 네. 부탁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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