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200)

그때는 알지 못했다.

신지혜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냥 독백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인제 와서 생각하니 박무식도 모든 게 이해가 갔다.

“하하하!”

순간 파비앙의 웃음소리가 마천루 밖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는 웃음기 사라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스마트하다라. 그것만으로는 이 자리까지 오를 수 없지.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만약 지혜가 이 자리를 원했다면 끝까지 버텨야 했을 거야. 자네는 내가 시키는 일이나 잘하도록 해.”

“네. 지혜를 잘 챙기도록 하겠습니다.”

파비앙은 박무식의 대답을 듣고 의자를 뒤로 돌려 버렸다.

* * *

순간 내 눈앞에 빠르고 묵직한 무언가가 지나갔다.

“억!”

“조용해라. 박무식 내일 눈뜨기 싫은가보다?”

“이런 폭력이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능!”

“그 오타쿠 같은 말투 좀 고쳐. 차라리 영어로 말해!”

“나는 오리지널 한국인이야.”

“말을 말자. 가요 사장님 이놈은 신경 쓰지 말고.”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장님 빨리 따라오세요.”

순간 신지혜에게 위협감이 느껴졌다.

“갑니다.”

나는 데이비드 박을 남겨두고 신지혜를 따라 걸었다.

그녀가 과거를 숨긴다는 건 확실해졌다.

왜? 라는 의문이 생기지만 그녀와의 신뢰가 더 쌓인다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기에.

오늘도 나는 물러났다.

사실 주먹을 쥐고 있는 그녀를 앞에 두고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

.

.

.

“컷! 좋은데요. 모델을 해도 되겠습니다.”

카메라 작가가 나에게 끊임없이 칭찬을 해왔다.

나는 오트 쿠튀르에 오른 남성복 4종을 갈아입으며 화보 촬영에 임했다.

그때 내 눈에 데이비드 박과 신지혜가 싸우는 모습이 다시 드리웠다.

“아까 장난했던 거 아니야?”

달려가서 말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화보 촬영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열 명 남짓의 촬영 스태프들이 고생하고 있었다.

“대표님 가방도 하나씩 들어주시죠.”

“네.”

나는 새로 나온 온리 원 백을 양쪽으로 들고 촬영을 시작했다.

“좋습니다. 포즈 바꿔주시고요. 컷 좋네요. 찍으신 거 한번 확인하고 가시죠.”

“네.”

나는 카메라와 연결된 화면에 내가 찍힌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 나왔네요.”

“모델이 좋아서 그렇죠. 얼마 전에 배우 박보겸 씨랑 촬영했는데. 대표님이 훨씬 빛나 보입니다.”

“네?! 누가 들으면 화냅니다.”

박보겸은 현재 대한민국 탑 5위 안에 드는 남자배우다.

겸손한 태도와 살인미소를 장착한 여심 폭격기로 통하고 있었다.

“대표님 정도면 팬클럽도 있을 법한데 미디어에 노출도 많았잖아요.”

“그렇긴 하죠.”

그러고 보니 브랜드 Han 컬렉션 이후 생성된 팬클럽의 행방이 궁금하긴 했다.

‘아직 있으려나.’

잠시 옛 생각에 웃음이 터질뻔했지만 참았다.

“지금 콘셉트 괜찮은데 장소만 바꿔서 다시 촬영 들어가시죠.”

스태프들이 장비를 챙겨 장소를 이동하려는 그때.

큰소리가 내 귀에 울려 퍼졌다.

“넌 매사 왜 그따위야! 과거에서 빠져나와! 그리고 당당히 맞서 싸우란 말이야!”

“네가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해! 이 새끼가 진짜.”

박무식이 신지혜에게 소리를 지르며 따지고 있었다.

신지혜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식식거리며 반문했다.

“작가님 잠시만요. 제가 잠시 가봐야겠는데요.”

“네. 저도 VOKE 촬영 몇 번이나 진행 중인데 편집장이 저렇게 화내는 건 또 처음 보네요. 갔다 오세요. 저희도 좀 쉬다 하죠.”

내가 그들이 앉아있던 나무 그늘 가까이 다가오니.

둘의 싸움이 멈추었다.

“두 분 다 왜 이러세요.”

“차 대표님 들어보세요. 제가 아까 말하려다 말 못 했잖아요? 근데 저한테 와서 따지잖아요. 말조심하라고 누구 잘못이에요.”

분명 이 내용이 아니다.

그렇다는 건 박무식도 나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괜히 질문해서.”

둘은 서로를 바라본 후.

나를 바라보며 뻘쭘하게 서 있을 뿐이다.

“봐 네가 얼마나 성격이 고약하면 회사 대표님이 사과하시냐.”

“너 진짜 말 다 했어! 네가 코 질질 묻히면서 애들한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일 때 챙겨줬던 사람이 나야.”

“아씨 십 년 전 이야기를 왜 또 꺼내.”

“십 년 전이고 지금이고 뭐가 달라. 너 다시 파리로 가라. 한국에 갑자기 들어와서 나한테 민폐야.”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둘에게 무거운 한마디를 던졌다.

“일합시다. 두 동창분 싸움은 끝나고 맥줏집이나 술집에서 푸시고요. 다들 두 분 싸우니까 눈치 보잖아요.”

“…….”

내 말이 맞는다며 둘은 걸음을 달리하며 촬영장으로 향했다.

분명 둘은 나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서로가 무슨 연유로 싸움이 커졌지만, 나에게만큼은 말할 수 없는 거다.

나는 찝찝한 마음을 가지며 촬영장에 복귀했다.

그러자 사진작가님이 나에게 다가와 말을 이었다.

“대표님이 갔다오니 풀렸네요.”

“풀린 건 아니고요. 일 끝나고 싸우라고 했습니다. 애들도 아니고 왜 다들 보는 앞에서 싸우는지.”

“근데 저는 생각이 좀 다른데.”

“네?!”

신지혜나 과거의 나보다 10년은 더 나이가 있을 법한 사진작가가 말을 이었다.

“얼굴 붉히면서 싸우는 거 같아도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가요.”

“제 눈에는 그렇습니다. 그냥 두셔도 될 거 같습니다.”

“그래야죠. 촬영 시작할까요?”

“네 그러시죠.”

나는 다시 고궁을 바라보며 촬영을 시작했다.

내 뒤로는 경회루의 아름다운 호수의 운치가 펼쳐졌다.

“좋습니다. 포즈 자연스럽게 바꿔주세요. 제가 알아서 촬영하겠습니다.”

“네.”

우리는 장소를 몇 군데 더 옮겨 다니며 촬영을 마무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대표님이 더 수고하셨죠.”

촬영을 마친 내가 주위를 바라보니.

신지혜와 데이비드 박이 또 웃으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화해했나 보네.”

내가 그곳으로 다가가니.

“오셨어요.”

“두 분 편해 보이십니다.”

순간 둘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여튼 편집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내일 장하나 씨 화보라고 들었는데 그쪽도 잘 부탁드리고요. 신 디렉터가 가긴 하겠지만.”

“네. 근데 대표님 제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장하나 씨랑 커플 화보 한번 찍으시죠. 제가 봤을 때 그림이 좋을 거 같은데. 솔직히 이번 6월 특성상 연인을 위한 그림도 필요하거든요. 근데 이번에 라이프랑 피트니스 화보가 들어갈 예정이라 그 부분이 좀 약해서요. 부탁 좀 드립니다.”

“뭐 그럼 가방은 저희 걸로 내주십니까?”

“……고민 좀 해봐야 할 거 같은데. 지금 분량만 해도 아리raM 가방은 다 노출될 거라서요. 차후에 제가 한 번 더 아리raM 메인으로 쓰는 거로 하죠. 어떠세요?”

파격적인 조건이다.

언제가 되었건 메인으로 한 번 더 촬영할 수 있다니.

“좋습니다. 그 약속 받아들이죠.”

“그럼 내일 강북에 스튜디오로 오시겠습니까. 장하나 씨 내일 그곳에서 촬영하는데 저희가 세트장 하나 더 만드는 게 편할 거 같거든요.”

“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오늘 수고하셨어요. 다음에 또 뵙죠.”

나는 데이비드와 악수를 하고 촬영장을 빠져나왔다.

“오늘 수고하셨어요. 괜히 저희 때문에 신경 쓰이신 건 아니죠?”

“네, 두 분 다 금방 화해하시길래 안심되던데요. 근데 데이비드가 한국 온 지 얼마 안 되었나 봐요?”

“네 이번에 한국지부 편집장이 사임하면서 무식이가 오게 된 거죠. 저도 좀 놀라기는 했는데 갑자기 파리에 있던 놈이 한국이래서 뭐 저희로서는 잘된 거죠.”

“저도 좀 놀랐어요. VOKE 편집장 중에 가장 어린 거 같은데.”

“네 맞아요. 최연소 지부 편집장이래요. 저딴 놈을 편집장을 시키다니…. 신기한 일이에요.”

“부럽네요.”

“뭐가요?”

“두 분 사이가요. 서로 모르는 게 없는 그런 막역한 사이로 보여요. 저도 노력해서 신 디렉터님을 더 알아가야겠어요.”

“충분합니다. 더 안다고 좋은 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자신의 속마음을 살짝 내비치어 보이고서는 내 앞으로 걸어가 버렸다.

이른 시간에 촬영이 마무리되었기에 신지혜와 나는 회사로 돌아왔다.

우리가 도착하니 회사의 분위기가 이상하다.

나는 류미리에게 다가가 무슨 상황인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분위기가 왜 이래요.”

VOKE 3.

* * *

잠시 머뭇거리다가 류미리가 말을 이었다.

“사장님 자리 비우시고 악성 컴플레인이 걸려서 난리가 아니었어요. 사장님 화보 촬영 중에 신경 쓰일까 봐. 다니엘이랑 사장님 아버님께서 고객분 말리고 요청 들어준다는 조건에 일단은 일단락된 거 같은데 아직 모르겠어요.”

“컴플레인이라….”

나는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쉽게 넘길 상황이 아니다.

가방을 런칭하고 이제 며칠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나와 함께 듣고 있던 신지혜도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이유를 알아야겠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1층 디스플레이 관으로 내려가기 전.

작업실에 먼저 들렀다.

“아버지. 오늘.”

“아…. 진상 고객 때문에 왔냐?”

“네.”

“뭐 그냥 그랬다.”

아버지는 내가 걱정할까 봐 말을 아끼고 있다.

하지만 작은 컴플레인 하나가 브랜드에 큰 타격을 입힌다.

절대 쉽게 넘어갈 수 없다.

유통업계나 의류브랜드가 가장 예민하게 생각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때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있던 다니엘이 조심스레 나에게 다가왔다.

“바느질 땀이 다 터져있더라고. 말이 안 되는데….”

“그래서 어떻게 해주기로 했어?”

“바꿔 달라고 새것 가지고 오라고 난리 난리! 일단은 알겠다 했지. 소리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어. 다른 고객들도 많아서 어쩔 수 없었어. 매장 관리 매니저도 놀라서 얼어있었고.”

다니엘이 잘 처리해주었다.

신지혜는 CS 교육을 새로 해야겠다며 1층으로 먼저 내려갔다.

“잘했어…. 가방은 받아뒀지?”

“응. 저기.”

가방이 놓여있는 테이블로 다가가 바늘땀이 터진 전면부위를 확인했다.

“이거 어느 공방에서 제작한 거야?”

“일련번호 조회하니까 수원에 있는 공방이던데. 그 노부부가 운영하시는.”

그분들의 솜씨라면 이런 불량이 나올 수 없다.

“그분들이 이런 불량을 낼 리가 없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완성본을 받아서 검수를 거치고 출고하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지. 그리고 타공 쪽 자세히 봐봐.”

“자세히?!”

“실이 매달려 있는 게 엉성하지 않아?”

“그러네…. 바느질하면 티가 나니까. 엉성하게 걸어놓기만 했다는 건가.”

다니엘과 내가 검수를 거친 결과.

고객이 임의로 실 땀을 터트렸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의 바느질법은 새들 스티치다.

한 땀이 터진다 해도 양쪽에서 잡아주기에 절대 전면이 분해될 수가 없다.

그리고 의심 가는 게 한둘이 아니다.

가방에 작은 상처들이 무수하게 많다.

실을 터트리는 도구가 스쳐 지나간 자국이 분명하다.

“이거 가방 패턴 도용하려고 터트린 거 같은데….”

“내 생각도 그래.”

이런 사례가 명품 A/S 창구에서 자주 발생한다.

패턴이 복잡한 가방의 경우 외부의 모습만으로 카피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 이유에 가방의 실 땀을 다 터트려서 가방을 해부해 그대로 패턴을 떠내고 다시 조립한다.

하지만 컴플레인 고객은 그 단계까지는 가능했으나 조립을 하지 못한 듯 보였다.

그리고 가장 걱정스러운 부분이 남아 있었다.

“일련번호 위치도 다 파악했겠는데….”

“다는 모를 거야. 표면에 드러난 건 알겠지만. 가죽을 뜯어내지는 않았어. 만약에 뜯어냈다면 뒤 가죽이건 앞 가죽이건 늘어나서 너덜너덜할 건데 부자재 손상도 없잖아.”

“그러네. 그나마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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