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200)

“물도 여기 있소. 천천히 드시오.”

“감사합니다. 정말 감…. 사……. 합…. 니다.”

하문희가 눈물을 펑펑 흘려가면서 옥수수를 베어 물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가슴이 여미어 오는지 나도 눈물이 흘러나왔다.

“총소리가 닷새 전에 들렸는데 그때부터 숨어 있었던 거요?”

“…….”

“지금 온 동네 순사 놈들이 누굴 찾는다고 동네방네를 들쑤시고 난리요. 절대 마을로 내려오지 말아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거는. 내가 먹을 건데 이것도 가지고 가요.”

그녀는 딱딱한 옥수수 두 개를 내밀며 말을 이었다.

“이 반대로 가서 작은 산 하나만 넘으면 강변길이 쭉 나오는데 그쪽으로 가면 보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숨어 있기도 좋을 거예요. 무슨 사연인지 모르겠지만 꼭 살아요.”

그렇게 말을 전하고는 떠나가는 그녀의 소매를 하문희가 잡았다.

“드릴 게 이거뿐입니다. 이거라도 가져가세요.”

하문희가 가슴 품에서 비단쪼가리를 꺼냈다.

“저건….”

침선장이 함을 감쌌을 때 썼던 천은 분명.

명주 천으로 누에의 실을 짜내 만든 최고급 비단이다.

“옥수숫값입니다.”

“아니. 이런 귀한걸…….”

하문희는 그길로 그녀가 알려준 길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영상이 끊어지려는 듯 흐릿해졌다.

그런데 그때 하문희가 작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랑머리의 외국인을 찾아야 해….”

작지만 명확하게 들렸다.

“노랑머리의 외국인?”

그렇게 영상이 끝이 났다.

내 앞에는 두 손을 마주 잡은 영부인과 이지석 선생님의 모습이 드리웠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머릿속에 여러 생각을 정리해나갔다.

‘함, 열쇠, 손수건의 영상, 노랑머리 외국인….’

시대적 배경으로 비추어 봤을 때.

일제강점기다.

일제가 한국의 주권을 침탈한 시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그 함에 무언가 들어있다는 건데. 노랑머리의 외국인은 또…. 하 미치겠네.’

분명 큰 퍼즐이 존재한다.

하지만 완성된 그림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듬성듬성 그림이 짜 맞춰질 뿐.

“어르신, 이 손수건 어디서 났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저희 조부님 유품입니다. 그리고 유언도 있으셨죠.”

“유언이라니….”

“이 손수건은 할아버님의 동료가 잠시 맡기신 물건입니다. 그런데 동료가 순사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걸 눈앞에서 지켜보셨다고 이 손수건을 가족들에게 돌려줄 수 있다면 용서를 빌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셨군요. 그럼 할아버님 동료분 성함은 알고 계시는가요?”

“성함이라…. 이거 한번 보시겠습니까.”

이지석은 철제 함에서 흰 봉투 하나를 꺼내 영부인에게 내밀었다.

“이게…. 조부님이 간직하신 동료분의 편지입니다. 그리고 안에 조부님이 써놓으신 편지도 함께 있습니다.”

영부인은 그 편지를 받아들고 천천히 읽어 나갔다.

“편지에 할머니의 이름이 적혀있네요.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어머니의 이름도 있어요. 참 자상도 하셔라.”

그 말을 끝으로 영부인은 눈물을 소매로 닦아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제가 조부님을 대신해 영부인에게 사과의 뜻을 전합니다.”

나이로 보아 영부인보다 스무 살은 더 많은 이지석이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조부를 살리기 위해 희생한 독립운동가에 대한 예의를 자손인 영부인에게 표현한 것이다.

“이러지 마세요. 제가 무슨 일을 했다고 안 그러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조부님이 매번 저에게 말씀해주신 말이 꼭 형님의 자손들이 살아 있다면 머리 조아리고 싶으시다고 다행히 제가 대신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참 신비한 일이라며 둘은 오래 묵혀둔 이야기를 꺼내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차 대표 이걸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우리 집안의 짐을 자네 덕에 내려놓네.”

“아닙니다. 제가 뭐 한 게 있다고요. 선생님이 간절히 바라시니 이루어진 거겠죠.”

그때 내 옆에 있던 영부인도 내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게 정말 신기해요. 차 대표는 참 대단한 사람인 거 같아요.”

“별말씀을요. 두 분의 바람이 이런 우연을 만들어 낸 거죠.”

이로써 고아였던 그녀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입증됐다.

이 사실이 언론에 흘러 들어간다면 영부인의 이미지가 더욱 안정적으로 자리 잡힐 거다.

그리고 대통령에게도 정치적인 힘을 키울 기회가 될 거다.

“차 대표, 제가 큰 신세를 졌네요. 그런 의미로 제가 차 대표한테 좋은 제안을 하고 싶은데.”

“네?! 괜찮습니다. 부담 갖지 마세요. 저도 좋은 경험하게 되어 기쁩니다.”

“그래서 제 제안 안 받으실 겁니까?”

“아닙니다.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럼 저랑 G20 정상회담에 함께 가주세요.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그리고 세계 정상들과 영부인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을 거예요.”

그녀의 제안에 나는 속으로 환호했다.

세계진출에 큰 기반을 쌓을 기회였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주세요.”

영부인과 나는 이지석 선생님의 부인이 마련해 주신 식사를 마무리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나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많은 생각을 정리했다.

“마치…. 퍼즐을 맞춰주는 거 같단 말이야.”

아리raM을 론칭한 초기부터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점점 차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마치 신비한 힘이 나를 이용해 큰 사건을 만드는 느낌마저 들었다.

“벌써 도착했네.”

나는 차를 주차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 * *

기다리던 VOKE의 화보 촬영 날이다.

VOKE는 각종 브랜드 컬렉션부터 스타일, 쇼핑, 뷰티, 라이프스타일, 셀러브리티까지 가장 핫한 트렌드를 소개하는 잡지다.

현재 프랑스,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한국 등 10여 개국에서 발행되는 세계 최고의 바이블이다.

나와 신지혜는 경복궁 안을 걸어 촬영장으로 향했다.

“의견대로 촬영장은 경복궁으로 섭외되었네요.”

“네 그쪽 편집장도 이번 컬렉션을 보고 이곳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했나 봐요.”

나는 의상의 콘셉트보다 브랜드이미지를 생각했다.

한국과 전통공예를 떠올릴 때.

아리raM을 떠올리게 하고 싶었다.

“저번에 들으니까 VOKE 편집장이랑도 친해 보이던데. 오늘 온대요?”

“안 올 거예요. 야외이기도 하고 촬영장을 싫어하거든요.”

“편집장이 촬영장을 싫어한다니.”

“성격이 좀 그래요. 귀찮은 짓은 절대 안 하는 스타일이에요. 사진이랑 문서로만 잡지를 만들거든요.”

“서류작업에 뛰어나다고 받아들여야 하는 거죠? 한번 보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뭐 좋게 보면요. 완전 별로예요. 안 봐도 돼요.”

우리는 화기애애한 대화를 이어나가며 촬영장소로 걸어갔다.

“VOKE 편집장이면 파리 출신이겠네요?”

“네, 거기서 편집일 배웠을 거예요. 사장님은 어떻게 잘 아세요? 한국 밖으로 한 번도 안 나가봤다는 분이.”

“뭐 업계잖아요.”

“그건 그렇네요. 알고 있으면 좋은 정보들이니.”

VOKE의 지사 편집장이 되기 위해서는 VOKE 파리지부에서 인정을 받아야 하며 편집장들의 추천으로 편집장의 타이틀을 가질 수 있다.

파리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야 신지혜!”

“아 깜짝이야!”

그때 누군가가 우리 뒤에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가 미쳤나. 왜 갑자기 나타나서 소리 지르고 난리야!”

“어휴. 성격 여전하네.”

“너는 진짜 우리 사장님 있어서 살았어. 여기는 웬일이야. 귀찮아서 현장에 잘 안 오잖아.”

“뭐 그냥 심심하기도 하고 오늘 5월호 출간도 끝났고 해서 와봤지.”

둘의 대화를 들어보니.

이 사람이 VOKE의 편집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전혀 둘의 대화에서 벽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엘리제 편집장인 김소연과는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벌써 한 지부의 편집장이라니 믿어지지 않는다.

내가 봐온 VOKE의 편집장들은 모두 40대 중후반은 된 사람들이었다.

그때 나를 바라보던 곱슬머리에 흰색 테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사람이 나에게 악수를 청해왔다.

옷을 입은 감각을 보아 웬만한 디자이너 못지않다.

“안녕하세요. 차 대표님 VOKE 한국지사 총괄편집장 박무식입니다. 데이비드라고 불러주세요.”

“데이비드는 무슨.”

“야 이게 내가 유학 당시에 쓰던 이름인데 네가 왜 난리야. 이걸 진짜.”

둘은 여전히 티격태격한 모습을 자아냈다.

“아리raM 대표 차진혁이라고 합니다. 오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별말씀을요 지혜가 알아서 잘해왔을 텐데요.”

“근데 두 분은 어떻게 아는 사이세요.”

“아 저희 파슨스 대학 동문이에요. 저는 의상디자인 전공이었고 지혜는 경영인데 디자인 복수전공을 하면서 친해졌죠.”

“아….”

나는 빤히 신지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인맥은 어디까지인지 궁금하던 찰나였다.

“아 그럼 신 디렉터 과거도 많이 알고 있겠네요.”

“그럼요. 지혜의 모든 걸 알고 있죠. 궁금하세요?”

“뭐.”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박무식이 살인미소를 나에게 날려주었다.

“뭐가 궁금하세요.”

VOKE 2.

* * *

* * *

파리 도심 속 마천루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

꼭대기에 있는 켈링 그룹의 회장이 머무는 곳이다.

“자네가 지혜랑 파슨스 대학 동문이었고 우리 비서실장 말로는 나름 친했다고 들었는데 내 말이 맞나?”

“…….”

“왜 말이 없어? 나는 기다리는 걸 싫어하네만.”

“네. 친했습니다.”

“친했었다라. 나는 말장난하자고 자네를 부른 게 아닌데?”

“친합니다. 하지만 안 본 지가 오래돼서.”

“뭐 그거야 한국 가서 다시 보면 되는 거니.”

“네?! 한국이라니….”

“곧 있으면 VOKE 한국지부 편집장을 새롭게 선출할 거야. 나는 자네를 추천할 거고, 그렇다는 건 자네가 이제부터 편집장이 된다는 소리지. 또 하나 내 부탁을 들어줘야 한다는 소리기도 해.”

인자한 얼굴에 웃음기 가득한 얼굴을 한 프랑수아즈 파비앙.

세계 4대 패션그룹 중 하나를 이끌어 가는 수장이다.

그의 영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GQ, 에스콰이아, VOKE를 비롯해 세계에서 알만한 잡지사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편집장이라니…. 제가 벌써 그럴만한 위치에 오른다는 게….”

“싫으면 무를 수도 있어. 누구나 탐내는 자리지 지부의 편집장이라는 자리는. 나는 누가 되었건 상관은 없어 내 귀와 눈이 될 놈이 필요한 거니까.”

“아….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순간 박무식은 다른 사람이 파비앙의 부탁을 들어주는 거보다 자신이 하는 게 더 낫다는 판단이 섰다.

타인으로 인해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 같았다.

그리고 파비앙의 의중이 궁금했다.

“만일이지만 나를 실망시키지 말게. 위와 아래는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니까.”

“네.”

“한국에 가서 지혜가 무엇을 하는지 어떤 놈이랑 무슨 일을 하는지 나한테 수시로 보고해주게.”

“혹시 지혜를 그룹에 들어오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룹이라….”

순간 박무식은 파비앙의 회장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지혜 정도면 이 싸움에서 어느 정도 확률로 그들을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도박을 걸어야 하나.’

켈링 그룹의 가계도는 상당히 복잡하다.

이혼한 본처에게서 낳은 자식 2명 그리고 재혼을 해서 낳은 아들딸들이 3명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한국 출장길에서 만난 한 여인과 낳은 아이.

6명 중에 가장 총명하고 똑똑한 수재지만 동양인 혼외자식이라는 이유로 그들에 속하지 못했다.

“자네 생각은 어때? 지혜가 형제들을 이기고 이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녀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그들보다는 훨씬 똑똑하니까요.”

그리고 가장 현재 알만한 사람은 알고 있다는 켈링 그룹의 문제점.

굵직한 브랜드를 차지하기 위해.

배다른 형제끼리 피 터지는 싸움이 현재 진행 중이다.

이 싸움으로 인해 신생 기업 몇 개가 망해버렸다.

순간 박무식은 파비앙 회장의 의중을 조금은 들여다볼 수 있었다.

‘지혜를 밀어주려는 건가?’

어쩌면 지혜도 이 전쟁터에 집어넣어 왕좌의 게임을 시작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섰다.

만일이지만 그녀가 이 싸움을 시작한다면.

“지혜라면….”

박무식은 학창시절 술에 취한 신지혜에게 단 한 번 깊은 속내를 들은 적이 있었다.

“엄마 너무 보고 싶다.”

“어머니는 왜? 한국에 계신 거 아니야?”

“돌아가셨어. 내가 어릴 때.”

“…….”

“아버지라는 인간은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고…. 그 개자식들은 날 인간 취급도 안 하고 참 내 인생도 처량하다. 웃기지 않아 내가 봤을 때 그놈들이 더 인간이 아닌데 말이야.”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많이 취했다. 들어가자.”

“야 내가 꼭 저것들 다 뭉개버릴 거야.”

“그래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뭉개든 죽이든 너 알아서 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