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이면…. 나랑 동갑이네. 자식이.’
우리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갈 때쯤.
영부인이 신도들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이제 갈까요.”
“네. 바로 이동하시죠.”
“차 대표 저랑 같이 걸을까요?”
“네, 좋습니다.”
성당의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부설 보육원은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우리는 성당의 뒷길로 이어진 작은 숲속을 걸어 나갔다.
“참 좋은 곳이죠?”
“네, 도심 속에 이런 곳이 있다니 신기하네요.”
“보육원의 원장으로 계시는 수녀님이 가꾸신 거예요. 제가 어릴 적에는 아주 낮게만 있던 나무들이 울창해졌네요.”
“……혹시.”
“저는 이곳 보육원 출신이에요. 놀라셨어요?”
“아닙니다. 아니 사실 조금이요.”
“다들 그러죠. 시선들이 곱지만은 않아요. 그래도 저는 이곳이 좋답니다.”
나는 그녀의 예상치 못한 고백에 흠칫 놀랐다.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거야….’
사실 전 국민이 알고 있는 사실일지 모르나 나에게는 충격적이다.
영부인이 고아 출신이라니.
“차 대표. 우리 저기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할까요? 보육원 근처만 가도 애들이 몰릴 거 같거든요.”
“네. 정말 훌륭하게 자라신 거 같습니다.”
“하하하. 젊은 친구한테 그런 소리 들으니 쑥스럽네요. 사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중학교 때쯤 이곳에 왔어요.”
화단 벤치에서 영부인과 대화를 이어갔다.
기구한 사연인지 모르나.
한국전쟁 당시 고아가 된 어머니와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베트남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는 이야기까지.
더 깊은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그녀는 참 밝고 건강한 정신을 가진 듯했다.
“제가 별소리를 다 했네요. 차 대표는 참, 사람을 매료시키는 힘이 있는 거 같아요. 어른스러워서 그런지 속내를 꺼내게 하네요.”
“저도 여사님이 편하게 대해주셔서 감사드리는데요.”
“그래요 감사하네요. 이제 디자인 한번 볼까요?”
“네, G20에 입고갈 드레스입니다.”
“차 대표가 직접 다 한 거예요?”
“네. 제가 전담해서 디자인부터 제작까지 할 예정입니다.”
“그래요. 영광인데요.”
그녀는 내가 만든 디자인 시안을 천천히 넘기며 확인했다.
한참 동안 유심히 파일을 바라보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흠…. 좋아요. 근데 G20에 입고 가기에는 부담스럽네요.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말아요. 정말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긴 한데.”
당황스러운 답변이다.
최대한 그녀의 성격과 취향을 고려해서 만든 디자인이었기에 자신이 있었다.
“파티나 화창한 날 입고 나갈 외출복으로 최고인 거 같아요. 근데 정상회담에는 어울리지 않을 거 같네요. 저는 대통령을 내조하러 가는 거지 돋보이려고 가는 건 아니랍니다. 뭐 여자로서 이 옷을 입고 영부인들이 모인 자리에 간다면 돋보이고 행복할 거 같긴 하네요.”
“그렇군요.”
생각의 오류다.
영부인은 자신보다 대통령을 더 빛내줘야 하는 인물이라는 걸 간과했다.
그녀가 대통령과 해외에서 보이는 이미지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몰랐기에 일어난 일이다.
“사실 남편이 제가 원하는 스타일로 입으라고 했지만, 마음이 그렇지가 않아요. 미안하네요. 차 대표.”
“아닙니다. 저도 여사님의 깊은 뜻을 몰랐네요. 그럼 디자인은 수정해서 새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원단은 어떤지 여쭤봐도 될까요?”
“원단은 정말 마음에 들어요. 그리고 이 롱 스카프 정말 마음에 드는데요.”
“네, 제가 디자인을 다시 고려해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미안해요. 번거롭게 해서.”
“아닙니다. 제가 해야 하는 일인데요. 이제 의상 치수만 재면 됩니다.”
맞춤복 드레스이기에 최대한 입을 때 불편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 이유에 직접 치수를 재는 게 정확하고 마음이 편하다.
나는 최대한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단면적인 치수를 쟀다.
“다 됐습니다.”
“빠르네요. 그렇게만 재면 되나요?”
“네 충분합니다.”
“바쁜데 이곳까지 와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차 대표 혹시 오늘 약속 있어요?”
“없습니다. 왜 그러시죠?”
“실례가 안 되면 봉사활동도 같이 해볼래요? 정말 기분 좋은 일인데 혼자 이 느낌을 가진다는 게 아까워서요. 차 대표가 같이 가주면 힘이 될 것도 같고.”
“네. 그러겠습니다.”
우리는 벤치에서 일어나.
보육원 건물로 향했다.
그녀의 따뜻한 마음이 나에게 전파되는 거 같았다.
그때 누군가가 반갑게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카타리나.”
“수녀님!”
“영부인이라 해야 하나. 무거운 걸음을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또 장난치신다. 우리 수녀님. 저는 항상 가벼운 발걸음으로 오는데요 뭘.”
“하여튼 그리 말해주니 기분은 좋네요. 오늘은 다른 손님이 같이 방문해 줬네요.”
영부인의 세례명을 친근하게 부르던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안젤리나 수녀가 나에게도 반갑게 인사해 주셨다.
“차진혁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형제님. 안으로 들어갈까요?”
나는 둘의 발걸음을 따라 보육교사들이 머무는 사무실로 들어왔다.
뒤에서 본 둘의 사이가 마치 모녀 같았다.
우리가 사무실에 들어서니 오른쪽 벽에는 이때까지 이곳에 머물렀던 보육원생들의 사진이 가득했다.
그 사진 속의 안젤리나 수녀의 표정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서서 뭐 해요? 앉아서 차 한잔해요. 내가 직접 재배한 국화차인데 향이 좋답니다.”
“감사합니다.”
영부인과 안젤리나 수녀는 오랫동안 함께 관계를 유지했다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서로가 이때까지 못 한 이야기를 풀어놓으시며 대화를 이어갔다.
옆에서 듣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대화 내용이다.
“수녀님 대화 중에 죄송한데 화장실 어디에 있나요?”
“아 차 대표가 지루했겠네요. 2층 오른쪽 복도 끝에 있어요.”
영부인이 나에게 화장실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다시 둘은 대화 삼매경에 빠졌다.
내가 화장실을 들렀다가 나오는 길.
교실 형태의 방에서 큰소리가 들려왔다.
“정수야. 왜 이렇게 투정을 부려. 가방이 뜯어졌으면 꿰매서 쓰면 되지.”
“수녀님은 제 마음도 모르면서…. 애들이 맨날 놀린단 말이에요. 가방 좀 바꿔주세요.”
“여기 형제자매들 다 그렇게 써왔는데 왜 너만 그렇게 투정을 부려.”
초등학교 1~2학년쯤으로 보이는 꼬마가 뜯어진 가방을 보며 울먹이고 있었다.
내 눈에도 오래되고 낡아 가죽의 표면이 다 일어나 있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는 순간.
누군가가 내 손을 잡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녀님.”
“형제님 저 아이가 헤쳐가야 하는 일이랍니다. 작은 관심이 저 아이에게는 큰 관심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뒤로는 기대라는 싹이 돋아나죠.”
수녀님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다.
나처럼 잠시 뭉클한 감정으로 도와주다 떠나간 이들을 보며 이 아이들에게 헛된 기대라는 상처가 생길까 두려워하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수녀님에게 고개를 숙이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누구시죠?”
“아 나진숙 여사님과 함께 온 사람입니다.”
“아…. 카타리나 자매님과 오신 분이시군요. 근데 여기는 왜?”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그 애의 가방을 제가 한번 만져봐도 될까요?”
“…….”
젊은 수녀는 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안젤리나 수녀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들고 있던 가방을 나에게 내밀었다.
“많이 해졌네요. 바느질한다고 해도 금방 그 자리에 가죽이 터져버릴 겁니다. 혹시 재봉틀 있나요?”
“네. 있기는 한데.”
“그럼 잠시 빌리겠습니다.”
나는 가죽의 뒷부분에 천으로 보강을 할 생각이다.
임시방편이지만 가장 티가 나지 않고 다시 해지지 않을 거다.
“꼬마야 잠시만 기다려 줄래?”
“네.”
아이의 눈빛이 참 맑았다.
나는 그 아이를 보며 싱긋 웃어 보이고 재봉틀을 연결했다.
가방의 색에 맞는 실을 찾아 재봉틀에 연결하고 천과 가죽을 맞대어 틀 안에 집어넣었다.
‘가정용 재봉틀이라…. 되려나.’
바늘이 왔다 갔다 하며 실 땀을 일정하게 박기 시작했다.
가정용 재봉틀이지만 낡은 가죽이라 그런지 바늘이 잘 지나갔다.
‘이게 다행이라 해야 하나…. 참.’
재봉을 마무리하고 나는 가방을 꼬마 아이에게 내밀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 4.
* * *
“다 됐다. 어때?”
“좋아요. 티도 별로 안 나고 미카엘라 수녀님이 고치면 막 이상한데.”
아이의 말에 뒤에서 계시던 수녀님의 얼굴이 붉게 변하셨다.
나는 수녀님에게 다가가 애들의 가방을 모두 보고 싶다고 전달했다.
“수녀님.”
“시키는 대로 해요.”
“네 제가 가져오라고 전달하겠습니다.”
작은 방에 가방이 한가득 쌓였다.
그때 영부인인 나진숙도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죽이 너무 많이 삭았는데. 교체하고 보강하는 거로는 안 되겠어….’
다른 애들의 가방의 상태는 조금 전에 고친 가방보다 훨씬 좋지 않다.
최소 20년은 돌려쓴 느낌이 들 정도다.
“가방을 새로 다 바꿔야겠어요. 수리 불가합니다.”
내 말에 수녀님 두 분 다 깜짝 놀라며 얼굴에 근심이 가득 차올랐다.
그때 수녀님의 얼굴을 읽은 것인지.
상황을 지켜보던 영부인이 나에게 말을 이었다.
“차 대표 부족한 재료 있으면 말해요. 제가 사 오도록 할게요.”
나도 그녀의 말에 호응하듯 말을 이었다.
“그럼 다이마루 원단 20수로 30마씩 회색, 흰색, 검은색으로 부탁드릴게요.”
“그건 천이죠? 가죽이 아니라요.”
“가죽은 우리 회사에서 가져올 겁니다.”
“네?! 그럼 가죽값은 내가 지급할게요.”
“아닙니다. 제가 벌인 일인데요.”
나진숙이 신이 난 듯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안젤리나 수녀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됩니다. 수리만 해주셔도 충분한걸요.”
“마음 쓰지 마세요. 제가 벌인 일인데요. 그리고 가죽은 회사에 차고 넘칩니다. 부담가지실 거 없으세요.”
사진 속의 젊고 아름다웠던 안젤리나 수녀가 문득 떠올랐다.
지금의 모습이 될 때까지 이 작은 아이들을 위해 봉사한 그녀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재정적으로 이런 물품을 바꿔주지 못해 늘 미안했는데.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하나.”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건데요.”
“그래도….”
“정 그러시면 다음에 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요새 다사다난해서요.”
나는 그녀와의 대화를 끝내고 휴대전화를 들어 몇 명에게 전화를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다니엘 여기!”
“어. 사장 내려와서 짐 좀 옮겨.”
“짐?! 가죽은 신설동에서 바로 주문했는데.”
내가 창가를 내려보자.
소형트럭에 공업용 가죽 재봉틀이 실려있었다.
“공업용 재봉틀을 가져오다니. 너답다.”
“그 많은 걸 하루 만에 손으로 다 할 수 있을 거 같아? 이럴 때는 이것만 한 게 없지.”
“근데 이거 어디서 가져왔어. 회사 기종이랑 다른데?”
“내 방에서 가져왔는데.”
“도대체 집에 이게 왜 있는 건데.”
“나는 장인이니까.”
사실 가죽용 재봉틀이 간절히 필요한 순간이긴 했다.
최소 50개는 되는 가방을 손으로 바느질하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사장님 저희도 왔어요.”
류미리가 도착했다.
그런데 부르지도 않았던 바느질 장인 세 분도 함께 오셨다.
뒤를 이어 가죽을 실은 작은 승합차가 들어왔다.
신설동 가죽 시장을 들렀다 오신 아버지와 신지혜가 그 차에 타고 있었다.
“어떻게?”
“뭐 우리만 쏙 빼놓고 좋은 일 하려고 그랬어요. 섭섭하네! 차 사장님.”
“아 아니요. 주말인데 남편분이랑 애들 밥도 차려주셔야 하고.”
“남자는 밥 차려 먹으면 안 되나. 그런 거 걱정하지 말아요.”
“그렇죠.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부탁은 무슨 우리야 집에 있으면 못생긴 남편밖에 더 봐. 이래 나오면 우리 잘생긴 사장님 얼굴도 보고 나는 좋지 뭐. 우리 미리는 더 좋고.”
바느질 장인의 말에 주위에 모인 모두가 웃고 난리가 났다.
‘소문 다 났구먼. 다 났어.’
이상하게 나는 웃기지 않았다.
나름 진지하다.
그리고 아버지는 한술 더 떠 류미리에게 다가가 장난까지 치시고 있었다.
아니다 진심일 수도 있다.
“아이고 며느리.”
“아버지!”
때마침 차가 한 대 들어오더니 나진숙 여사와 경호팀장이 차에서 내렸다.
“헉! 영부인이시다.”
아버지는 놀라시며 그 자리에 굳었다.
나진숙은 천천히 걸어와 모두에게 인사했다.
“차 대표님 회사 식구들인가 보군요. 주말인데 미안해요.”
나는 앞으로 다가가 한 명 한 명 소개했다.
“다니엘이라는 미국에서 온 가죽장인입니다.”
“와 차 대표처럼 젊네요. 대단한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