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친구야 차 대표도 바빠. 그거야 차차 또 구경하면 되지. 한 번 보고 안 볼 건가?”
“그건 아니지. 하하하.”
이지석 선생님은 내 손을 따뜻한 두 손으로 잡아주시며 말을 이었다.
“바쁜데 멀리 와줘서 고맙네. 언제든지 놀러와.”
“네 조만간 들리겠습니다. 제가 한지 섬유에 푹 빠졌거든요.”
“오 그래. 그럼 잠시만.”
이지석 선생님은 보관 중인 한지 섬유를 한가득 들고나오셨다.
“이거 가지고 가. 필요하면 또 연락하고,”
“이렇게나 주셔도 됩니까?”
“우리도 더 좋은 한지 섬유 만들려고 개발 중이야. 다음에 내가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도 있으니 한번 들러.”
“네.”
나와 황의선 선생님은 다시 서울로 향했다.
“그래. 저 친구 만나보니 어때?”
“좋았습니다. 무형문화재 선생님들은 한 분 한 분 특색도 있고 재미있으셔서.”
“특색은 무슨 다들 고지식해서 자기들밖에 모르지. 그래도 다들 차 대표한테는 꿈쩍도 못 하니까. 자주 연락도 하고 그래. 다들 외로운 인간들이야.”
황의선 선생님의 눈빛이 아련하다.
모두 한길을 걸어온 외골수들인 만큼 주위를 돌아볼 겨를 없이 세상을 살아오셨을 거다.
나는 그분들과 함께 주위를 챙겨가며 앞을 향해 갈 거라고 다짐했다.
어느덧 서울에 도착해 황의선 선생님과 헤어졌다.
* * *
이번 주 토요일이면 영부인을 만나야 하기에 분주히 디자인을 만들어야 했다.
“이번 개최지가?”
G20 개최지 인도네시아.
평균온도 29도로 매우 습한 지역이다.
나는 상황을 고려해 소재와 원단, 디자인을 만들어갔다.
“리넨이 좋겠지.”
리넨은 아마 줄기를 가공해서 만든 식물성 원단이다.
피부에 달라붙지 않아 여름이나 습한 기후에 아주 적합한 원단 중 하나다.
내가 의상의 콘셉트를 잡으며 스케치를 이어갈 때.
류미리가 슬쩍슬쩍 계속 파티션을 침범해왔다.
“할 말 있어요?”
“아뇨. 그냥 궁금해서요. 뭐 하시는지.”
“영부인 디자인하고 있죠. 궁금해요?”
“네.”
“그럼 셔츠랑 블레이저 재킷 수정한 거 저한테 바로 주세요.”
“네….”
현재 그녀는 아리raM의 S/S 서울위크에 올라갈 의상 전체 기초 디자인을 잡아가기 위해 매일매일 자신과 싸우는 중이다.
내가 책임지고 진행해야 하는 프로젝트다.
하지만 그녀도 어엿한 아리raM의 수석 디자이너이기에 기량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런 이유에 전적으로 기초 시안은 그녀에게 맡겨둔 상태다.
“이번 9월 가을 시즌 특별의상도 콘셉트 잡았어요?”
“네. 제가 서류화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녀는 괜히 파티션을 넘봤다는 표정으로 시무룩해졌다.
그런 그녀에게 내가 만든 영부인의 드레스 디자인을 내밀었다.
“와. 눈에 확 뜨이네요. 근데 프린세스 드레스라. 영부인의 나이에 비해 너무 젊은 느낌 아니에요?”
시무룩해 보이던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내 디자인에 대해 질문을 토해냈다.
‘디자이너는 디자이너네.’
나도 처음에는 류미리와 같은 생각을 했다.
영부인이라는 사회적 입지, 대외적 이미지를 고려해 디자인을 만들었다
하지만 유해수의 말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취향을 고려한 거죠. 일단을 보여드리고 수정해야 할 거 같은데 초안은 이대로 갈 거예요.”
영부인도 여자다.
그 누구보다 빛나 보이고 싶고 다른 나라의 퍼스트보다 이뻐 보이고 싶을 거다.
“디자인 완성되면 다시 보여주세요. 그래도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더 잘 아는 법이니까.”
“그러죠.”
나는 영부인의 드레스에 총 4가지 원단을 이용할 예정이다.
한가지는 붉은색으로 광택이 없이 염색된 명주 천.
아리raM의 로고를 모놀로그 형태로 변형한 패턴 원단, 시원함을 주는 리넨.
그리고 드러난 어깨를 살짝 비추어주는 실크 롱 숄더 스카프.
거기에 구두와 액세서리가 더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는 코디네이션이 될 거다.
“신 디렉터님. 명주 염색 원단 취급하는 업체 연락해서 원단 샘플 좀 받아주세요.”
“네. 내일까지 표본 받아놓을게요.”
이제 원단 수급과 제작만이 남았다.
몇 가지 수정사항은 제작 과정에서 고쳐나가야 한다.
“마음에 드셔야 할 텐데.”
나는 완성된 디자인과 파일북을 챙겨 회사를 빠져나왔다.
* * *
나는 아침 일찍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 영부인 만난다며?”
“네.”
“우리 아들이 출세하긴 했나 보다. 대통령도 만나고 영부인도 만나고.”
어머니는 엄청난 사람들을 만난다고 아침부터 설레하고 계셨다.
자식이 높은 사람을 만난다니 출세했다는 느낌이 오셨나 보다.
“그냥 잠시 만나서 치수 재고 디자인한 드레스 상의드리러 가는 거예요.”
“그래도 그게 대단한 거지. 어서 먹고 조심히 갔다 와.”
“네.”
그때 아버지가 옷까지 빼입고 내 앞에 나타나셨다.
“언제 가냐?”
“네?!”
“나도 가게.”
“아버지가 왜 가세요. 주말인데 어머니랑 데이트나 하시지.”
“아들. 나도 야망이 있단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정장 재킷을 뺏어 장롱에 다시 걸어 놓았다.
“다음에요. 저도 오늘 처음 뵙는 분이고 정말 비즈니스 때문에 조심스럽게 가는 거예요. 그리고 경호팀이 있어서 외부인은 출입금지라고 했어요.”
“내가 외부인이냐!”
“네. 그러니까 오늘은 오붓하게 어머니랑 보내 주세요.”
아버지는 심술을 부리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어머니는 웃으시며 말을 이었다.
“그냥 영부인이 보고 싶은 게 아니고 네가 그분이랑 일하는 모습이 보고 싶은 거야. 어제 자기 전에 말하더라. 네가 그런 분이랑 서 있는 모습 보면 자기가 뿌듯할 거 같다고.”
“…….”
“그리고 신기하다고 늘 아기 같던 애가 회사의 대표가 되고 자신의 힘으로 발전해 나가는 게 뿌듯하시단다. 네 아버지가. 그리고 이 엄마도 그렇게 생각하고.”
“뭐 혼자 한 건 아니죠. 다들 도와주셨으니 가능한 거죠.”
이들이 내가 차진혁이 아닌 김서진인걸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
순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불안한 마음이 가슴속을 짓눌렀다.
나도 이제는 이들과 함께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욕심인가?’
순간 아버지에게 냉정했던 내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다음에 정말 좋은 자리 만들어지면 두 분 꼭 모실게요.”
“말이라도 고맙다. 내가 네 아버지한테 그리 전할게. 조심히 갔다 와라. 아들.”
“네.”
나는 깔끔한 정장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와 차에 올라탔다.
“한빛 보육원이라.”
오늘 봉사활동은 성당에 부속된 보육원에서 이루어질 예정이다.
그런 이유에 영부인은 미사를 마친 이후.
보육원의 아이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신다고 전해 들었다.
사실 나는 죽기 전에도 신을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늘따라 나도 미사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 신이 있다면 이 행복을 영원하게 간직하게 해달라고 빌고 싶었다.
“기도는 무슨…….”
나는 좀 더 차를 빠르게 몰기 시작했다
이른 시간에 성당 앞에 도착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성당 입구에 들어서니 경광봉을 흔들며 나보다 한두 살 많아 보이는 남자가 다가왔다.
“잠시만요. 검문 좀 하겠습니다.”
“네.”
검은 정장에 청와대 배지를 달고 있다.
아침 일찍부터 보안 점검이 이루어지는 듯 보였다.
한참 동안 차 안과 하부를 살폈다.
“아무 이상 없네요. 들어가셔도 됩니다.”
나는 성당 뒤편으로 넘어가 차를 주차했다.
그리고 영부인에게 보여줄 스케치와 원단 샘플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그때 마침 유해수가 멀리서 나를 향해 달려왔다.
“빨리 오셨습니다.”
“팀장님이 오셨군요.”
“오늘 대통령님 대외활동이 없으셔서 제가 오게 됐습니다. 빨리 오실 줄 알았으면 애들한테 말해뒀을 텐데요.”
“아닙니다. 지킬 건 지켜야죠.”
“근데 한 시간이나 빨리 오셨네요?”
“처음 뵙는 어른인데 먼저 와있어야죠.”
“차 대표님은 나이에 비해 예의도 생각도 깊네요. 안 그래도 여사님도 차 대표 오늘 온다고 기대하고 계십니다.”
“긴장해야겠는데요.”
“그럴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곧 있으면 여사님도 도착하실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네. 근데….”
내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무전이 울렸다.
“팀장님 영부인 차량 성당 초입 진입합니다. 에스코트해 주십시오.”
“차 대표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여사님도 빨리 오셨네요.”
그는 성당의 입구로 뛰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대의 검정 세단이 등장했다.
“오셨습니까.”
“주말인데 괜히 저 때문에 고생 많으시네요.”
“아닙니다. 제가 해야 하는 일인데요.”
둘이 짧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멀리서 보였다.
유해수가 먼저 앞으로 걸어 나와.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 3.
* * *
유해수는 앞으로 걸어 나와 나를 영부인에게 인사하기 위해 말을 이으려 했다.
“여사님, 이쪽은.”
“소개 안 해도 알아요. 너무 반가워요. 차진혁 대표.”
상냥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의 미소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거 같다.
웨이브 탄 단발머리에 중년의 아름다움이 몸에 배어 있었고 미모 또한 특출났다.
영부인은 나를 알아보고 활짝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악수 한번 해요. 유명한 분을 이렇게 보게 되네요. 컬렉션 정말 인상 깊게 봤어요.”
빈말일지 모르지만,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언변을 가지고 있었다.
오랜 세월 정치가들 사이에서 대통령을 모신 분이라 그런지 사람을 매료시키는 기운을 가진 듯 보였다.
“감사합니다. 이름도 기억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차 대표, 화면보다 실물이 훨씬 미남이네요. 차에서 내리는데 깜짝 놀랐어요. 모델인지 알았네요. 그리고 애 아빠가 했던 말도 정확하고요.”
“네?!”
“좋은 의미예요. 애 아빠가 생긴 것도 훤칠한데 젊은데도 말하는 게 완전 어른스럽다고 칭찬했거든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 봐요. 완전 애늙은이처럼 말하네. 사업가는 사업가네요. 일단 들어가서 마저 이야기해요. 급할 거 없으니까.”
나는 빨리 온 보람을 느끼며 그녀와 발걸음을 함께했다.
정확한 시간에 맞춰서 왔다면 이런 좋은 대화를 하지 못했을 거다.
그때 걸어가던 그녀가 나에게 질문을 해왔다.
“혹시 종교 있어요?”
“저는 무교입니다.”
“그래요!? 그럼 조금 있다가 따로 봐도 되는데. 괜히 미안하네요.”
“아닙니다. 한 번 정도 미사에 참여해보고 싶었으니까요.”
“그렇게 말해주면 내 마음이 편하네요.”
어느덧 나와 영부인이 성당의 정문을 지나 미사가 열리는 대관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자리에 앉은 뒤.
나에게 패션 나인에 있었던 일에 대해 궁금한 게 많다며 질문을 해왔다.
“그래서 불이 나서 옷이 다 타버린 거였어요? 어떤 놈이 그런 짓을. 범인은 잡혔고?”
“네. 잡혔습니다. 다행히 급하게 한지 섬유를 화혜장 선생님이 구해주셔서 겨우 컬렉션 전에 의상 완성해서 쇼에 오를 수 있게 됐습니다.”
“천만다행이네요. 차 대표가 인복은 있나 봅니다.”
“저도 늘 감사드리고 있어요.”
“근데 그 퍼포먼스는 차 대표가 생각해낸 거예요? 전 마지막 스포트라이트가 쫙 켜질 때 소름이 다 끼쳤거든요.”
“그건 저희 총괄 디렉터가 만든 겁니다.”
“그래요. 진짜 그분도 대단한 분이네요. 다음에 기회 되면 한번 봐요.”
영부인은 내 이야기를 경청하며 수시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사람을 대하는 방법과 공감 능력이 대단했다.
그때 신부님이 단상 위로 올라오셨다.
“이제 미사 시작하네요.”
“네.”
나는 다행히 그녀와 좋은 친분을 쌓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분명 그녀와 친해진다면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될 거다.
한 나라의 영부인이 가지는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까.
* * *
미사가 마무리되고 영부인은 주위에 모인 신도들과 인사를 나누고 계셨다.
그때 유해수가 내 옆에 다가와 말을 이었다.
“일찍 오셔서 고생하시네요.”
“비즈니스라고 생각하면 고생인데. 그냥 좋은 분을 만난다 생각하면 투자죠.”
“와…. 대단하시네요. 혹시 실례가 안 되면 차 대표님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27살입니다.”
“저보다 열 살은 더 어리신데. 저보다 훨씬 어른인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