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혜와 내가 한창 대화를 이어갈 때쯤.
다시 한번 환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뭔데 그래?”
“누구 한 명이 대량 구매했어요. 크기별로 리미티드 상품,가죽별로온리 원 백 모두요. 금액만 4천만 원 가까이 되는 거 같아요.”
“4천만 원?!”
내가 놀라자.
신지혜가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분 아이디랑 연락처 나한테 가져와요.”
“그건 왜?”
“왜라니요. 광고해야죠. 우리 아리raM은 받은 만큼 고객에게 보답한다는 걸.”
“충성심을 보인 고객에게 선물을 주자는 거죠.”
“그렇죠. 이게 소문만 나면 분명 충성고객들도 생길 거예요. 차후에 VIP 초대 파티를 통해 충성도를 더 올릴 필요가 있을 거 같아요.”
“그 부분은 전적으로 신 디렉터님이 맡아주세요. 보고서로 받아볼게요.”
“네, 맡겨주세요.”
우리는 이렇게 새로운 도약 점에서 뛰어올라 새로운 땅에 안착했다.
나는 안심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때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 선생님.”
* * *
황의선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중요무형문화재 제117호 한지장 이지석 어르신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바쁜데 내가 괜히 귀찮은 일 시키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아닙니다. 이번 컬렉션 때 큰 도움 받았는데요. 인사 한번 드려야죠.”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그 친구가 어찌나 자네를 보고 싶어 하는지 한번 데리고 오라고 난리야.”
“신세 졌는데 미리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하네요.”
“별말을 다 한다. 우리가 자네한테 도움받은 게 얼만데.”
황의선 선생님은 항상 나를 치켜세워주시고 힘이 되는 말을 아낌없이 해주셨다.
항상 정신적인 안정감을 주시는 분이다.
“자네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저야 영광이죠. 무형문화재 선생님들이 보자고 하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큰일 없으면 찾아뵙겠습니다.”
“말만으로도 고맙고 충분하네.”
컬렉션 이후 내 인식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한지라는 소재가 의류와 만날 때 생기는 시너지 효과가 생각보다 크게 받아들여졌다.
그런 이유에 나도 꼭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한참을 달려 원주에 있는 이지석 선생님의 사택에 들어섰다.
“여기야.”
우리는 허름한 공방으로 보이는 건물 옆에 있는 작은 가옥으로 들어갔다.
“어이 지석이.”
황의선 선생님이 큰 소리로 부르자.
안방으로 보이는 곳에서 짧은 스포츠머리를 한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나오셨다.
“아이고 먼 걸음 했네.”
“멀기는 원주면 금방이지. 요새 도로가 얼마나 잘돼 있는데. 아 인사하게 이쪽이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차 대표.”
나를 지긋이 바라보던 이지석 선생님이 버선발로 나와.
내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반갑고만 반가워. 내가 어찌나 이 친구한테 부탁했는지.”
“안녕하십니까. 차진혁이라고 합니다.”
“알지 알아. 내가 그 이름은 똑똑히 기억한다니까. 일단 앉지.”
나와 선생님 두 분이 자리에 앉자.
부엌에서 이지석의 아내로 보이는 여사님이 다과를 내오셨다.
“좀 들면서 대화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녀가 부엌으로 다시 돌아갔다.
부산스러운 게 음식을 준비하는 듯 보였다.
“그래. 젊은 친구가 어쩌다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랑 일하게 된 거야?”
“내가 말해줬잖아 왜 또 물어.”
“신기해서 그런다 신기해서.”
나는 두 분의 대화를 들으며 두 분의 우애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가늠했다.
“황의선 선생님 덕분에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한국의 문화를 패션에 접목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됐으니까요.”
“겸손도 하지. 의선이가 사람 보는 눈은 있네.”
“장인 선생님들 덕분에 좋은 결과도 얻었습니다. 이번에 선생님 덕분에 큰 고비 넘겼습니다.”
“내 덕은 무슨 다 차 대표 복이지.”
내 말에 뿌듯한 표정으로 이지석이 말을 이었다.
“어찌 다 장인들 덕분이야. 자네가 그리 멋진 옷을 만들어내니 잘될 수밖에 없네.”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감사드리죠.”
“말도 참 예의 있게 한다. 캬. 내가 딸만 있으면 사위로 삼는 건데. 아들만 두 놈이네.”
우리는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지석아 그 이야기는 안 하냐.”
“아 그렇지.”
순간 이지석이 기침을 한 번 하더니.
“고맙네. 차 대표.”
“네?!”
뜬금없이 고맙다니.
내가 더 감사드려야 하는데.
“그게 말일세 컬렉션에서 윤호 그놈이 적었던 독립운동가 이름 중에 내 조부 되시는 분의 이름도 있었다네. 이 홍 자 석 자 쓰시지. 유명한 분은 아니지만 우리 집안의 자랑이시네.”
“…….”
나는 차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우연히 숨겨져 있던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찾아내 사용했는데.
그중 한 분이 이지석 장인의 조부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대단하고 존경스러운 조부님을 두셨습니다. 제가 무례하게 이름을 사용해서 죄송합니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짐승은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 않나. 뭐 조부님이 이름을 알리려고 독립운동을 하신 건 아니지만 가족으로서 그 이름 석 자가 텔레비전에 나오니 얼마나 감개가 무량하던지. 내가 고맙다고 꼭 말하려고 이리 불렀네.”
“저도 그렇고 모든 사람이 감사해야 하는 일인데요. 제가 더 감사드립니다.”
“조부 대신 내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한테 인사를 다 받는구먼.”
대화가 무르익어갈 때쯤.
이지석 어르신의 사모님이 저녁밥을 준비하셨다며 우리를 불러들였다.
“모두 식사하세요. 멀리서 오셨는데 식사는 하고 가셔야죠.”
“그래 그래야지. 차 대표 밥 한 숟가락 뜨고 시간 되면 한지 만드는 것도 한번 보고가.”
“네. 선생님.”
나와 선생님 두 분은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여사님이 많이 지치셨는지 비지땀을 뚝뚝 흘리고 계셨다.
“아이고 오늘따라 땀이 왜 이리 나는지.”
땀을 닦기 위해 여사님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드는 순간.
그 손수건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어김없이 나를 제외한 모두의 시간이 정지했다는 의미다.
그리고 빛이 사그라지더니 내 눈에 순식간에 빨려 들어왔다.
나는 빛에 휩싸이며 눈을 감았다.
“절?”
주위는 울창한 숲과 돌로 이루어진 멋진 풍경이 펼쳐졌다.
그 풍경 속 중앙에 멋들어지게 지어진 대웅전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얼핏 봐도 엄청 오래되어 보이는 절이다.
“스님?”
그때 스님 복장을 한 남자 둘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가 아는 익숙한 모습이 아니다.
짧은 머리기는 하나 민머리가 아니었고 언행 또한 거칠었다.
“내가 그랬지! 그놈들 모가지를 따버려야 한다고. 내가 이 사달이 날 줄 알았시야!”
“형님은 맨날 그러잖아요. 모가지 따버려야 한다고.”
한 명은 작은 키에 빠짝 말라 있지만, 눈매가 아주 매섭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기백이 느껴졌다.
또 다른 한 명은 젊은 청년으로 수려한 외모와 단정한 품위를 가진 사내였다.
“어이구 절에 숨어있는 것도 지겨워 죽겄네.”
“거사가 코앞입니다. 우리 목도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이 아닙니까. 몸 사려야죠.”
“그니까 말이야. 내 모가지 걱정하기 전에 처음부터 매국노 놈들 모가지 따브럿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냐 말이야!”
둘이 목청이 점점 커지자.
또 다른 인물이 나타났다.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였다.
훤칠한 키에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었다.
“홍석이 이놈! 방방곡곡에 우리 여기 있소 하고 소문낼 생각이더냐. 조용하지 못해.”
“형님 제가 촉이 안 좋은디… 오늘 말고 다시 날 잡읍시다…. 하.”
“걱정하지 말아라. 잘될 것이다.”
“협상 체결 전에 우리가 모가지 따븐다고 그리 말했는디. 코구녕으로도 안 듣다가. 일 다 벌어지니까. 거사를 진행하라는 게. 이거 우리 다 뒤져브러라고 하는 거 아니요. 나는 고뿔에 걸려서 몸도 성치 않은디.”
“다 큰 뜻이 있을 것이다. 전국에서 의병들이 일어나고 있다. 황제께서도 이 일은 묵과하지 않을 것이니 우리 일만 생각해라.”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주머니에서 민들레가 수놓여 있는 손수건 하나를 내밀었다.
“뭐요?”
“콧물이나 닦아라. 이놈아.”
“형수님이 주신 거라고 손도 못 대게 하더니 기분 나쁘게 왜 지금 내미는 것인디.”
“필요한 사람이 가지는 게 좋을 듯싶구나.”
뒤이어 사대천왕이 있는 커다란 문을 지나.
남자 둘이 더 나타났다.
“형님들도 오셨소?”
“우리도 함께해야 하지 않겠느냐? 셋보다야 다섯이 나은 법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잘못하다가는 다섯 다 죽습니다.”
“죽는 거 따위야 두렵지 않다. 나라 잃은 슬픔이 더 두렵구나.”
함께 모인 다섯은 서로의 계획을 토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섯은 함께 얼싸안으며 서로의 안부를 전했다.
“형님 두 분은 바로 내부대신한테 가주시오.”
“알겠네. 살아서 봄세.”
“다들 살아서 보자.”
“몸조심하세요.”
순간 짧은 영상이 끊어졌다.
“차 대표. 뭐 그리 멍하게 서 있어.”
“아 아닙니다.”
나는 자리에 앉아 밥을 먹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하지만 대화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여사님이 들고 계시는 저 손수건이 계속 신경 쓰였다.
‘분명 사연이 있는데.’
이때까지의 사건을 종합해 봤을 때.
이유 없는 현상은 단 한 번도 없다.
분명 사연이 존재한다는 판단이 섰다.
나는 끝내 고민을 멈추고 여사님이 들고 있던 손수건에 대해 질문했다.
“혹시.”
“응?!”
“여사님 아까 쓰시던 손수건 어디서 나신 거예요?”
“무슨 손수건?”
내 질문에 당황한 표정으로 여사님이 말을 이으셨다.
“이거요?”
“네 맞습니다.”
“저번에 장 정리하니까 있길래. 내가 손수건으로 쓸려고 들고 다니는 건데.”
순간 이지석 선생님이 화들짝 놀라며 말을 이었다.
“당신! 그게 뭔지 알고.”
“이게 뭔데요? 그렇게 중요한 거면 잘 챙겨뒀어야지.”
“아…. 그렇긴 한데 그거 당장 가져와.”
무슨 사연이 있길래.
이지석 선생님은 버럭 화를 내시며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 2.
* * *
선생님은 아내분이 들고 있는 손수건을 빼앗듯이 받아냈다.
그리고는 식탁에서 일어나.
서랍 안에 있는 동그란 철제 통을 꺼내 손수건을 그곳에 넣으셨다.
그때 무거운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황의선이 말을 이었다.
“대체 뭐길래 그래. 제수씨 무안하게.”
“하…. 조부님이 남긴 유품이야. 왜 이게 장 안에 나뒹굴었는지 모르는데. 손수건으로 쓰면 안 되는 물건이야. 본 주인이 따로 있어.”
황의선 선생님과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기다렸다.
“독립운동을 하시던 당시에 생명의 은인에게서 받은 손수건이라고 만약 살아생전 연이 닿기만 한다면 가족들에게 돌려주고 싶다고 하셨는데 아직 내가 가지고 있네.”
“그런 사연이 있었나. 참 기구하고만. 그래서 자네가 찾아주려고?”
“찾아봤는데 없어. 백 년도 전의 일인데 쉽지 않네.”
이지석은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는 철제 통을 서랍 깊숙한 곳에 숨기고는 부인에게 다가갔다.
“미안하게 됐네. 내가 갑자기 화내서 당신도 알다시피 조부님이 날 얼마나 아끼고 좋아해 주셨나. 갑자기 그 생각이 나서 그랬네. 미안하네.”
“괜찮아요. 그러니 물건 좀 잘 챙겨요. 나는 앞집이나 갈랍니다. 밥이나 먹어요.”
“그래.”
다행히 오랜 세월 함께한 사이여서인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해주었다.
“함, 열쇠, 류미리의 디자인, 박물관 그리고 독립운동가의 손수건 맞아떨어지는 게 하나도 없네…….”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게 전혀 없다.
생각하면 할수록 답이 없었다.
나는 생각을 떨쳐 버리고 식사를 마무리했다.
“시간이 이렇게나 많이 지났네.”
“그러게 이제 슬슬 올라가 봐야겠는데.”
“공장도 한번 구경하고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