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200)

가장 메인 가방인 시크릿 백의 숨겨진 자개 부분을 축소했다.

가장 단가가 높은 부분이기도 했고 자개 장인들이 하나하나 붙여서 만들기에 시간도 상당히 많이 드는 부분이다.

“또 내부 가죽도 변경하면 얼추 되겠는데.”

안감도 최고급 카프스킨 가죽을 제외하고 이탈리아산 중저가 가죽으로 변경했다.

그렇게 하나하나씩 디자인을 건들다 보니 어느덧 밤이 찾아왔다.

나를 제외한 모두 퇴근 준비를 한다고 바쁘다.

“퇴근하겠습니다.”

“저도요.”

그때 가장 늦게 자리에서 일어난 류미리가 말을 이었다.

“사장님 퇴근 안 하세요?”

“네?!”

“사장님. 너무 빠져 있는 거 아니세요. 옥상 가서 바람 좀 쐬고 오세요. 아니면 퇴근을 하시던가요.”

“아 아직이요. 하나를 고치면 하나가 틀어져서. 이거 또 디자인했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고 샘플 제작도 해봐야 하는데.”

“내일 다니엘 씨랑 같이하면 되죠. 하여튼 저는 퇴근하겠습니다.”

“네 조심히 가세요.”

그녀의 말처럼 바람이라도 쐬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내 눈에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처음 고친 메인 시크릿 백의 스케치에서 검붉은 빛이 일렁거리며 뿜어져 나왔다.

순간 소름이 쫙 끼쳐왔다.

“아씨!”

내가 멍하니 메인 시크릿 백 스케치를 바라보고 있자.

연이어 러브 시크릿과 마이 시크릿에서도 검붉은 빛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옅은 검붉은 빛이었지만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하…. 그래. 알겠다. 알겠어. 나도 알아!”

현재 최종안이 최상의 디자인이라 자부할 수 있다.

그러니 고치면 고칠수록 디자인이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이 상황을 외면하고 옥상으로 올라왔다.

“하 바람 좋다.”

시원한 바람을 쐬고 나니 한결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바꾸지 말라는 거야 뭐야.”

문득 스케치에 검붉은 빛이 떠올랐다.

마치 자신들을 손대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하는 듯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 한번 크게 시원한 바람을 들이마시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다시 자리에 앉아 스케치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목과 허리가 뻐근하다.

스케치 용지만 수십 장을 갈아 치워가며 디자인을 수정했다.

그런데 디자인 수정본이 완성될 때마다 검붉은 빛이 떠올랐다.

솔직히 수정본도 그리 나쁜 디자인이 아니다.

충분히 좋은 디자인이고 상품성을 가진 디자인이었다.

“어찌하라는 거야!”

나는 펜을 내려놓고 의자를 젖혀 천장을 바라봤다.

“하 이대로 가야 하나.”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간다.

최종안 그대로 생산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수지가 맞지 않는다.

팔아도 이윤의 크지 않다는 거다.

수십 명의 장인이 만드는 가방인데 노동의 대가에 비해 이윤 창출이 안 된다는 게 불만스러웠다.

“다들 고생해서 만드는데…. 안 되지.”

생각이 깊어지는 그때.

신지혜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일찍 출근하셨네요.”

“…….”

“얼굴이….”

나는 아침 해가 뜬지도 모르고 사무실에 박혀 있었다.

신지혜가 내 퀭한 얼굴과 어제와 같은 옷을 입은 걸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뭐예요. 퇴근 안 하고 계속 가방 디자인 수정하신 거예요?”

“그렇게 됐네요. 수정해도 좋은 디자인이 안 나와서.”

“그래요. 흠.”

그때 내 책상을 밑을 바라보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말을 이었다.

“뭘 이렇게나 많이. 이거 수정본들이죠.”

“네.”

“제가 한번 볼게요.”

“그러세요.”

그녀가 허리를 숙여 몇 장을 들고 와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디자인을 확인했다.

“이게 좋지가 않다는 거예요?”

“그러니 밤새 이러고 있었죠.”

“사장님 이 정도면 웬만한 디자이너들은 그려내지도 못할 정도예요. 시크릿 백이 너무 잘 나오긴 했지만, 수정본도 나쁘지 않은데요 아니 좋은데요.”

그 소름 끼치는 검붉은 빛이 안 보이는 그녀에게는 그럴지도 모른다.

근데 나는 영 기분이 좋지가 않다.

마치 검붉은 빛이 피어오른 수정본으로 출시했다가는 망할 거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때 류미리와 다니엘이 함께 사무실을 들어왔다.

“Good morning. 둘이 뭐해?”

“다니엘 씨 사장님 퇴근도 안 하고 가방 디자인 수정했대요.”

“오호. 그래서 완성은 했어? 시안 줘봐 가방 만들어보게.”

“못 했대요. 원하는 게 안 나와서. 근데 이거 좀 보세요.”

“뭔데?”

“마음에 안 든다고 쓰레기통에 버려진 디자인 수정본이요.”

그때 옆에 있던 류미리도 궁금했는지 다니엘과 함께 수정본을 확인했다.

구겨진 종이를 보는 둘의 표정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눈이 커지며 좀 전에 신지혜의 표정과 같아졌다.

“뭘 얼마나 더 하려고 이게 별로라는 건데.”

“그러게요. 진짜 이쁜데 근데 완전 다른 가방 같아요.”

둘의 반응을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가 알겠냐. 내 심정을.’

나는 다니엘이 들고 있던 수정안을 뺏은 후.

말을 이었다.

“기존 시크릿 백보다 더 나은 디자인으로 수정하려는 거야.”

“그래?! 근데 만들기 쉽지 않을걸. 아예 다른 콘셉트 잡고 새로 만드는 게 빠르지.”

다니엘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수십, 수백 가지의 가방을 보며 공부했을 다니엘이다.

디자인을 하지는 않지만, 안목만큼은 웬만한 디자이너를 뛰어넘는다.

“그냥 그대로 가면 되잖아. 왜 수정을 하려고 애쓰고 있어?”

“단가가 너무 비싸. 이윤이 얼마 안 남는다고 수지타산이 안 맞아. 장인들이 그 고생을 해서 수작업으로 다 만드는데 200만 원대에 받으면 말이 안 되지.”

“그럼 가격을 올리면 되잖아.”

“말이야 쉽지. 고객들의 인식이라는 게 있어. 디자인보다 민감한 게 금액이라고.”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내 생각은 조금 다른데.”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신지혜가 다니엘의 말에 살을 보탰다.

“다니엘의 말에도 일리는 있어요. 고객들 인식도 벌써 고급화된 가방에 있을 텐데 그걸 다운그레이드시킬 필요는 없죠. 오트 쿠튀르의 우승작을 싸게 파는 것도 웃기긴 해요.”

“그렇긴 한데.”

“그리고 우리가 이긴 제너락이나 이안섭 하우스 고급 가방도 4백까지도 가는 게 존재하니 큰 무리는 아닌 거 같은데요.”

그들의 말도 일리가 있다.

의견의 차이다….

만약 이들의 말처럼 높은 가격대에 높은 판매량을 만들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방법이다.

하지만 나는 명품 디자이너 생활을 하며 많은 경험을 몸소 체험했다.

몇십만 원이 상승한다는 소문이 퍼지면 다음 날 백화점 앞에 줄을 서는 게 고객들이다.

이 말은 떠나가는 고객도 많다는 거다.

“다니엘 씨 말대로 너무 예민해요. 나쁜 건 아니지만, 저희는 신생브랜드잖아요. 도전하고 무너져도 다시 일어나면 됩니다.”

“그러네요. 제가 너무 지키려고만 했네요.”

“사장님 걱정도 이해는 가지만 저희는 앞으로 나가야 하지 멈춰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녀의 말에 나 자신을 돌아봤다.

오래전의 경험에 두려움을 가진 건 아닌지.

“그럼 온리 원 백을 산 고객들 위주로 설문 조사 한번 실행하죠. 참여자 중 뽑기를 통해 3명한테 컬렉션에 오른 시크릿 백 증정으로 하고요.”

“나쁘지 않네요. 바로 홈페이지에 올릴게요.”

어쩌면 새로운 국면에 들어설 수 있는 도전일지 모른다.

* * *

다음날.

전화통과 설문 조사 게시판 댓글이 불이 나기 시작했다.

― 지금 온리 원 백 사도 설문 조사 참여 가능?

― 오 설문 조사 완료.

― 저도 완료.

― 지금 사면 가능하냐고.

― 구매 완료요. 구매하니까. 설문 조사 가능합니다.

― 구매 후 설문 조사 가능!

신지혜와 직원들 모두 전화를 받으며 설명을 하느라 분주하다.

그때 신지혜가 수화기를 내려놓고 내 쪽으로 걸어왔다.

“온리 원 백 하루 만에 1000개 팔렸어요.”

“….”

나는 예상했다.

누군가가 나를 향해 걸어올 거라는걸.

아니나 다를까.

다니엘이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사장 내려와. 가방 제작해야 해.”

작업실에서 바로 주문장이 인쇄되는 방법이다.

그런데 다니엘이 출근을 하자마자.

수북이 쌓인 주문장을 보고 달려온 것이다.

“그래 곧 갈게. 그리고 디렉터님은 설문 조사 결과 지금까지 나온 거 좀 출력해서 가져다주세요.”

“네. 수고하세요.”

내가 작업실을 내려가니 아버지가 발 빠르게 움직이고 계셨다.

“이게 무슨 일이야. 너희들 뭐 했길래 하루 만에 1000개나 되는 주문서가 날아와?”

“아 그냥 작은 이벤트 좀 했어요.”

“큰 이벤트 했다가는 몸이 남아나질 않겠다. 어서 와서 거들어 요놈아. 멍하니 서 있지 말고.”

“네.”

나는 앞치마를 걸치고 가죽 프레스기에서 재단을 시작했다.

현재 아리raM에 소속된 가죽 장인들은 30명 남짓으로 몸을 불린 상태다.

충분히 현재 들어온 주문량을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한창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 신지혜가 서류 한 장을 들고 작업장으로 내려왔다.

“여기요. 확인해보세요.”

서류를 건네는 신지혜의 얼굴이 밝다.

나는 프레스기를 정지시키고 서류를 바라봤다.

그 순간.

밝은 빛이 서류에서 일렁거리며 피어올랐다.

아주 뚜렷하게 말이다.

내용을 살펴보니.

비용이 올라간다면 구매하지 않겠다는 고객의 비율은 5% 내외.

비용이 올라가도 구매한다는 비중은 70% 이상으로 나타났다.

정말 나쁘지 않은 결과다.

공실이 어느 정도는 발생하겠지만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결과였다.

“참여 인원은 몇 명이에요?”

“내일까지는 있어 봐야겠지만 현재까지 2천 명 정도예요. 생각보다 진행이 빨라요.”

“이 데이터 수치면 디자인 그대로 제작해도 되겠네요.”

“네.”

“신영길 선생님한테 갔다 와야겠어요.”

“같이 갔다 오시죠. 저도 안 간 지 좀됐어요. 컬렉션도 바빴고요.”

“그래요 퇴근하고 가시죠….”

“네, 그럼, 일부터 끝내시고 사무실로 오세요. 수고하세요.”

신지혜가 작업장을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왜 저래?’

그 순간 다니엘이 문을 활짝 열고 들어왔다.

“가죽 들어온다!”

“무슨 가죽?”

“긴급하게 주문했지. 신설동 수입 가죽업체 다 전화했어.”

“너 일부러 나 일 시키려고.”

“당연하지. 너 요새 바쁜 척하면서 작업장에서 일도 안 했잖아. 프레스 기계에 서는 순간 나는 깨달았지 너에게 오늘 들어온 물량 전체를 찍어내게 하겠다고.

“…….”

진짜 악마 같은 놈이 여기에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쉼 없이 철형을 가죽에 조준하고 재단을 이어갔다.

그 모습이 즐거우셨는지 아버지가 다니엘에게 손을 올리셨다.

“어휴, 아버지랑 다니엘 제가 일 끝나기 전에 퇴근 못 하십니다.”

“에엥 무슨 소리냐. 내 아내이자 네 어머니가 오늘 집에 빨리 들어오라고 했는데.”

“어머니가 오늘 모임 간다고 천천히 들어오라고 하셨는데요?”

“그랬냐…. 일하자 그럼.”

시크릿 백 3.

* * *

신영길이 운영하는 공방에 도착했다.

미리 연락을 받은 선생님이 우리를 마중 나오셨다.

“어인 일이야.”

“선생님! 저 보고 싶으셨죠.”

신지혜가 반갑게 선생님에게 달려나가자.

신영길 선생님도 그녀를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왜 또 이래. 다 큰 처자가.”

“좋으시면서. 또 이러신다.”

“시집이나 가라고.”

“갈 사람이 없어요. 다들 눈이 삐었나 나 같은 여자를 안 채 가네.”

“네가 바쁘니까 그렇지 눈도 높아서. 우리 공방 장인 한 명 소개해줘?”

“됐거든요. 저는 할 게 많아요.”

“이 화상을 어쩐대. 하여튼 들어가자.”

우리 셋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사무실로 들어왔다.

선생님은 나를 바라보며 뜬금없이 찾아온 연유를 물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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