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200)

방화사건의 담당 형사가 나를 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네.”

“괜한 방문하신 거 같습니다. 사건은 여기서 마무리해야 할 거 같은데요.”

“그렇군요.”

“조선족인데. 절대 말 안 할 거 같습니다. 그냥 추방해주라네요.”

“그렇습니까. 혹시 잠시라도 만날 수 있을까요?”

“뭐 만나는 건 문제가 안 되죠. 근데 만난다고 별거 없을 겁니다.”

“제가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요.”

“뭐 그러시면 따라오시죠.”

나는 전담 형사의 뒤를 따라 취조실로 향했다.

“들어가셔서 자극하지 마십시오. 괜히 일만 커집니다.”

“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조심스레 전담형사과 함께 취조실로 들어갔다.

내가 발을 들이는 그때.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진술서에서 검붉은 빛이 피어올라 왔다.

시크릿 백 1.

* * *

한국어와 중국어가 섞여 있는 간판들이 즐비한 동네가 내 눈에 비쳤다.

밤이라 주위에 인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골목을 당당히 걸어가는 사람이 나타났다.

“장 실장?”

가죽 재킷에 뒷모습만이 비치고 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짧은 머리에 저 다부진 몸 그리고 저 팔자걸음.

그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작은 철제 쪽문 앞에 멈춰 섰다.

“문 열어.”

“여기는 또 웬일이니. 이 근처에 발붙이지 말라 그리 일렀지 않니.”

“소주나 한잔하자.”

“하…. 너 이러다 진짜 칼 맞아 죽는다. 너 노리는 놈들 한둘인지 아니.”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같다. 한잔할 거야 말 거야.”

“그래 하자 해.”

벽에 가려져 누구인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대화 내용만은 선명하게 들려왔다.

“무슨 일 있는 거니. 왜 이 새벽에 찾아와서.”

“하 세상이 개 같아서.”

“무슨 일 있구만. 말해보라.”

“말하면 네가 나 대신 처리해주게?”

“들어보고 해주든 말든 할 테니 말해보라. 사람 죽이는 거면 말하지 말고.”

“어디 한군데 불 좀 내야 할 거 같은데. X발 나는 이번에 잡히면 빵에 다 늙어서 나올지도 모른다.”

“너는 송영태인가 명태인가 하는 놈한테 가서 잘 먹고 잘살 줄 알았더니 그딴 일도 하는 거니 여기 있을 때나 별반 차이도 없구나.”

“여기가 쓰레기장이면 거기는 시궁창이다. 송영태 그 새끼 차명계좌 비밀번호만 내 손에 들어오면 바로 죽여버릴 거다.”

“성격은 아직 안 죽었구나. 그놈의 돈이 원수다.”

“그거 아니면 내가 그놈들 밑에서 개처럼 일할 필요가 있냐. 나같이 없는 놈은 믿을 게 돈밖에 없다.”

“그래. 돈 때문에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돈이라도 왕창 벌어서 떵떵거리고 살라.”

“X발.”

순간 장선봉의 눈에 슬픔이 묻어났다.

“그게 돈이냐! 병원비 몇백이 없어서 돌아가셨는데.”

“어휴…. 그게 언제 일이니. 잊으라. 그리고 불은 내가 한번 질러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 그 뭐 힘든 거라고.”

“잡히면 강제추방될 거다.”

“선봉아 그날 네가 나 대신 칼 안 맞았으면 나 여기 없다. 그리고 어차피 중국 들어가려고 했는데 잘됐다야. 비행기 표 굳었다.”

“미안하다. 1억 어머니 통장으로 넣어 놓을 테니 중국 들어가서 돈 써서 빠져나와라. 그리고 차후에 내가 1억 더 보낼 테니 부탁한다.”

“말이 길다. 술이나 처먹어라.”

영상이 끝이 나고 내 앞에 그가 작성한 진술서가 눈에 들어왔다.

근데 진술서 내용은 얼핏 보아도 전혀 내가 본 영상과 다르다.

술에 취해 우발적으로 저질렀다.

심신미약에 우발적 동기까지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차진혁 씨?”

“아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 좀 한다고.”

“아, 네…. 얼른 물어볼 거 물어보시고 나가시죠.”

나는 자리에 앉아.

조선족 남성에게 질문했다.

“장선봉이 시키든?”

장선봉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조선족 남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무슨 소리 하는 거니? 장선봉. 그게 누구니?”

“잘 알 텐데. 장선봉 실장이 너한테 불 좀 내달라고 부탁했잖아. 이 진술서는 다 거짓말이고.”

그 순간 옆에 있던 전담 형사가 나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자극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어서요.”

“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죄송합니다.”

“하여튼 저는 일하러 가보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역시 장 실장이 가게에 불을 지르게 한 범인이다.

“송원일이 시켰겠지.”

사건의 윤곽이 드러났다.

물증이 없다는 게 아쉽지만, 가만히 둘 생각도 전혀 없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 * *

중앙지검 앞에 있는 커피숍에서 박창식 검사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중이다.

내가 창가를 바라보자.

박창식이 신호를 건너 커피숍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2층으로 올라와 박창식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요.”

그는 앉자마자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바쁜데 왜 오라 가라야!”

나는 두꺼운 서류봉투를 들어 올려 그에게 말을 이었다.

“바쁘신데 그냥 갈까요?”

“앉아. 내가 실수한 거 같네. 이제 그 봉투를 넘길 생각인가 보지?”

“네 넘겨드리죠. 근데 확실하게 정하고 갑시다.”

“뭘?!”

“파일을 보고 분노하지 말 것. 내 말에 따라줄 것.”

“이 새끼가 요구안이 왜 이렇게 많아.”

“할 겁니까 안 할 겁니까. 싫으시면 중앙지검에 뿌릴게요.”

“아씨 알았어. 넘겨.”

박창식은 내 부탁을 듣기 싫다는 말투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칼을 갈고 있던 검사가 이제 칼을 휘두를 때네.’

그때 박창식은 내 팔을 끌어 최대한 사람이 없는 곳으로 이동했다.

“여기 검찰 앞이야. 조심하는 게 좋아.”

내게 받아든 서류를 넘기는 그에게 내가 말을 이었다.

“혹시 송영태 조사하는 과정 중에 차명계좌 같은 거 안 나왔습니까? 대포통장이라던지.”

“없었어. 그건 왜?”

“그냥 뭐, 그게 있으면 서류에 있는 놈들 잡기 편할 거 같아서요. 한번 알아보시죠.”

“그래? 일단 알겠어.”

툭 던진 한마디가 큰 그림으로 변할 거다.

그에게 내가 본 모든 걸 설명할 수는 없으나 사건을 풀어나갈 작은 키워드 하나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 말대로 박창식은 천천히 서류뭉치를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읽고 나서 조용히 서류뭉치를 내려놓았다.

“야! 너 이거 뭐야. 송원일?!”

“그놈이 동생분이랑 연관이 된 거 같아요.”

“근데 X발 이걸 이때까지 숨겼다고 너 나랑 장난해!”

“이러실 거 같으니까요. 그리고 그때 알려드렸으면 송원일 잡아넣을 자신 있습니까? 서류에 나온 사람들이 다 막아 줬을 건데요.”

내 질문에 박창식이 냉수를 들이켜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이제부터 검사님이 알아서 하셔야죠.”

“그렇긴 한데. 네 말에 따라 달라며. 네가 괜히 그런 소리 했을 리는 없고. 아니야?”

괜히 검사가 아니긴 하다.

모든 대화에 팩트를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괜히 의심을 살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모르게 피해자의 처지에서 내 의견을 전달했다.

하지만 내 말은 그에게 큰 도움이 될 거다.

“아 그건 부탁인데요. 아리raM공방 화재 난 거 아시죠?”

“응 뉴스 봤어.”

“근데 제 느낌이지만 송원일이 엮인 거 같거든요. 저한테 억하심정을 많이 표출했기도 하고 몇 가지 사건도 있었거든요. 한번 조사해보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야. 네 사건 해결되지 않으니까. 나한테 떠넘기는 거 아니야?”

“그건 뭐 생각하기 나름이고요. 검사님 선택입니다.”

박창식은 나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다 대답했다.

“일단 알겠어.”

“그럼 아리raM공방 화재부터 시작하는 거죠?”

“알았다고!”

박창식은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내가 멀리서 바라보니 검찰 건물로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분명 며칠을 수사관들을 달달 볶아 문서에 이름이 올라간 인간들을 단죄할 것이다.

* * *

나는 박창식과 헤어지고 바로 회사로 들어왔다.

내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신지혜가 꿍한 표정으로 서류 뭉치를 들고 내 책상으로 다가왔다.

“요새 어디 그렇게 가세요? 저도 좀 알고 싶은데.”

“아 개인적인 비즈니스라.”

“그럼 전화라도 좀…….”

그 말을 듣고 내가 휴대전화의 전원 버튼을 누르자.

켜지지 않는다.

“배터리가 다 됐나 봐요. 근데 무슨 일로?”

“서류 확인 좀 해주세요. 그리고 VOKE 화보 6월 초쯤 촬영예정이에요. 7월호에 실릴 예정이에요.”

“6월이면 바로 시크릿 백 출시해야겠네요.”

“네 시크릿 백도 같이 광고에 올리면 좋을 거 같아요.”

“그러네요. 근데 서류는?”

“아, 신영 백화점 쪽에서 행사 끝나고 입점도 고려해본다고 미팅 한번 하자고 제안이 들어왔어요. 그리고 이번 컬렉션 이후에 중국 광둥 백화점에서도 러브 콜이 왔고. 미국, 유럽 쪽 개인 부티크에서 소량으로 물량 받아보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좋은 소식이네요. 중국 쪽 백화점 계약조건은요?”

“나쁘지 않아요. 순이익의 25% 매장 사용료 면제 인테리어도 부담한답니다.”

광둥 백화점의 조건이 너무 매력적이긴 하다.

하지만 아직 내실을 더 다질 때다.

솔직히 물량을 받쳐줄 장인의 수가 현저히 부족하고 이런 상황을 중국인들이 이해해줄 리 만무하다.

“파리진출 지원은 서울시에서 벌써 공문이 내려왔어요. 올해 S/S 서울 패션위크 참여 이후에 논의하자고 하네요.”

“그럼 언제쯤 지원해준다는 말이에요?”

“내년 예산안으로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근데 문제는 생디카[파리 고급의상점조합]에서 승인해줄지가 의문이에요. 저희는 아직 신생기업이라 그 많은 명품 브랜드를 뚫고 들어가기가 어려울 거 같은데.”

“아마 바로는 힘들 거예요. 거기에 있는 인간들 엄청 고지식해요.”

“네? 사장님이 그걸 어떻게 아세요?”

“아 그게 어디서 들었어요.”

아차 했다.

순간 신지혜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해있었다.

‘실수했네.’

내가 샤네르와 알렉산더, 이블즈 명품 디자이너로 있을 당시에 본 생디카의 모습은 그랬다.

우월주의에 찌들어 세상의 패션은 모두 자신들이 이끌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생디카 본연의 모습 자체가 고지식한 패션철학과 전통을 중시하는 집단이다.

그만큼 브랜드의 가치를 올려놓지 않으면 가입 자체가 힘들 게 분명하다.

‘생각만 해도 소름 돋네.’

“그 일은 천천히 진행하시죠. 일단 공문은 한번 보내 주세요. 파리 부티크 하우스 개장을 원한다고. 서울시가 아니라도 그게 첫 번째예요.”

“네.”

“그리고 광둥 백화점 쪽은 현재로서 무리예요. 조건은 좋은데 아직 저희가 손대기는 부담스러워요. 내실을 다지는 방향으로 가죠.”

“네 그렇게 전달할게요.”

“신영 백화점 쪽에는 행사 끝나고 미팅 가지는 거로 부탁드릴게요.”

“네. 그럼 다시 알려드릴게요.”

신지혜가 일을 처리하러 돌아갔고 나는 가장 급한 일부터 처리해나갔다.

출시할 생각이 없던 시크릿 백.

대회 이후 인기가 급상승한 바람에 회의를 통해 출시하기로 했다.

문제는 원자잿값이 온리 원 백의 두 배는 되는데 이걸 줄이는 게 관건이다.

“시크릿 백을 수정해야겠는데….”

시크릿 백은 기성품이라 할 수 없다.

내부와 외부 모두에 고급재료들로 떡칠 되어있는 오트 쿠튀르만을 위한 가방이다.

금속 장식도 모두 수제로 제작된 가방으로 신생기업의 기성품 가방 가격에 절대 맞출 수 없다.

“문제가 벌써 고객들이 기존의 가방을 안다는 건데.”

벌써 기존의 시크릿 백의 이미지를 알고 있는 고객들이 기성품으로 바뀐 가방을 구매할지가 의문이다.

당연히 바뀐 디자인에 대한 평가도 저조해질 게 분명하다.

그만큼 복잡한 과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천재건 오랜 경력의 디자이너라도 수정이 가장 힘들다.

나 또한 시크릿 백이 더는 고칠 게 없는 최고의 디자인이라고 인식되어있다.

근데 이걸 하향해서 바꾼다는 게 골치가 아프다.

나는 일단 펜을 잡고 불타버린 시크릿 백의 디자인 초안부터 그려나갔다.

“송원일 때문에 이걸 또 하고 있네.”

시크릿 백 2.

* * *

시크릿 백, 러브 시크릿, 마이 시크릿 세 가지 초안을 모두 새롭게 그렸다.

그리고 컬렉션 전날 만든 최종안을 가져와.

두 개를 동시에 대조해.

원초적인 디자인과 최종 디자인을 비교해 디자인을 축소하고 재료를 대체하는 게 가장 빠르고 안정적이다.

근데 문제가 발생했다.

“아이고 머리야.”

몇 시간째 펜과 스케치북과 씨름 중이다.

내가 중간에 수정하다 구겨 버린 종이가 쓰레기통에 가득 쌓여 토해내고 있었다.

“하…. 건드리면 디자인이 틀어져.”

아무리 봐도 수정할 곳이 없다.

하나를 고치면 하나가 무너져 내리는 연결성이 강한 디자인이다.

대회 당시에는 출시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최고의 디자인을 생각하며 만들었다.

그로 인한 부작용이라 볼 수 있었다.

“일단 손이 많이 가는 데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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