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200)

프리랜서 사진작가도 대거 모여있었던 터라 그들의 한탄 소리가 들려왔다.

“아씨 제임스 딘이라고 해서 이쪽으로 왔는데.”

모니터를 보고 있던 제너락의 총괄디자이너는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며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었다.

“젠장! 망했어….”

* * *

아리raM의 컬렉션이 시작되었다.

판소리가 한 소절 크게 울려 퍼졌다.

“아리람의 신명 나는 패션쇼가 시작되겠구나! 얼쑤!”

순간 재즈 느낌으로 편곡된 신나는 사랑가가 울려 퍼졌다.

색소폰과 재즈 드럼 그리고 피아노의 선율이 어우러지며 민속촌 전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무대 뒤에서 모델들이 순서대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걸어 나오는 모델들의 고풍스러운 옷이 휘날렸다.

연출을 위해 기계적인 바람을 만들어 냈다.

5명의 여성 모델이 무대를 크게 한 바퀴를 빠른 걸음으로 이동한 후.

한곳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팔을 맞잡으며 물결치듯 선을 만들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동감을 표현하는 거였다.

“다음 파트 나갑니다.”

다시 노래의 선율이 바뀌며 조금 더 세련된 클래식 음악이 퍼져 나왔다.

시대가 변했다는 걸 알려주는 신호였다.

차례대로 여성 모델들이 화려한 드레스를 자랑하듯 걸어 나왔다.

다시 무대를 크게 한번 돌고 이번에는 5명이 서로의 등을 맞대며 커다란 꽃을 표현했다.

“조명 중간으로 비춰주세요.”

양옆에 설치되어있던 스포트라이트가 움직이며 양쪽으로서 있는 모델들 정중앙을 비추었다.

그 순간.

모델들이 중간에 모여 만든 꽃과 일렁이는 바람이 합쳐지며 하나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그리고 모델들이 흩어지며 물 흐르듯 서로의 소품을 바꿨다.

어떠한 소품과 액세서리와도 어울리는 드레스를 알려주는 듯했다.

― 아리raM 연출자 누구야?

― 브랜드 Han 연출자잖아.

― 대단하네.

모여있던 인파들과 카메라 작가들 그리고 방송국의 관계자들까지 연신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소품을 바꿔서 착용한 모델들의 모습이 처음과 살짝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리raM 컬렉션의 묘미였다.

“10명 퇴장하면 바로 4, 3, 3으로 투입해줘.”

“네.”

10명의 여성 모델이 차례대로 퇴장하고 내가 포함된 그룹이 런웨이를 시작했다.

경연대회 [컬렉션] 4.

* * *

남자로 구성된 네 명의 모델이 먼저 무대로 뛰어나갔다.

오트 쿠튀르의 특성을 살짝 비켜 갔지만, 남자만을 위한 드레스를 제작했다.

의상 콘셉트는 젠더리스.

한복 바지를 개량해 통을 최대한 슬림하게 줄였고 그 위에 천을 덧대어 치마의 느낌을 주었다.

상의는 화사함을 주기 위해 밝은 단색 위주로 디자인했다.

어깨선을 넓히고 복부를 최대한 줄여 하의와 최대한 하나 되어 보이게 만들었다.

모델들은 바닥에 표시된 자신의 위치로 이동했다.

그때 신지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위치 온!”

무대 바닥에 특별히 설치된 리프트가 올라오며 아리raM의 시크릿 백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각기 다른 디자인의 가방을 들고 런웨이를 걷기 시작하자.

함성이 터져 나왔고 우리를 향해 카메라 앵글이 가까이 다가왔다.

― 아리raM 일등 하겠는데?

― 다들 집계 결과 봐봐. 난리 났어. 실시간 투표 1위 아리raM이야. 들어보니까 제너락은 완전히 망했다네.

― 진짜! 우리야 잘됐지 뭐 잡지사에 사진 팔아먹기 딱 좋은 날씨다.

우리는 무대 전체를 누비며 핸드백과 클러치백을 멋스럽게 연출했다.

아리raM의 가방은 남녀노소 착용할 수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지금이야!”

내가 무대를 한 바퀴 돌고 중심에 서는 순간.

남자 모델 셋이 어깨에 걸치고 있던 도포를 풀어 모델이 드나드는 입구를 넓게 막았다.

“세 명 나오면 세 명 바로 투입해줘.”

내 눈에 잡지사 디렉터와 외국인 바이어 그리고 관람객들의 궁금해하는 표정이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반전을 기대하는 듯.

모두 숨죽이며 무대를 응시했다.

다시 음악이 바뀌며 더 굵고 묵직한 캐리비안의 해적 OST Pirates of the Caribbean이 흘러나왔다.

“와 미쳤다….”

“PD님 순간 시청률 32%에요. 완전 대박이에요.”

“야 내가 책임질 테니까. 다른 컬렉션 송출 다 끊으라고 해. 그쪽 연출이랑 조연출한테 연락해. 아리raM에 집중할 거라고 방해하면 알아서 하라고!”

“네, PD님.”

강한 조명이 여성 모델 세 명의 뒷모습을 비추자 그녀들의 그림자가 도포에 실루엣을 만들어냈다.

다시 한번 기대에 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리의 예상대로 기대심리가 강하게 작용했다.

― 와! 아리raM!

가장 메인이 되는 여성 모델들이 남자 모델 뒤에 딱 달라붙었다.

“사장님 파이팅.”

“장하나 씨 집중하시죠.”

“네….”

모두 자신의 위치를 점한 순간.

신호를 알리는 불꽃이 터져 나왔다.

펑, 펑!

그 순간 남자 모델 모두 들고 있는 도포를 하늘 위로 던졌다.

여성 모델 여섯 명이 앞으로 걸어 나오며 남자 모델이 들고 있던 가방을 뺏어 들었다.

그리고 메인 스트레이트를 힘차게 걷기 시작했다.

마치 너희는 탐내지 말라는 도도함이 묻어났다.

모두가 천천히 단아한 발걸음으로 무대 사이드를 걸어 나가며 커다란 원을 만들어나갔다.

순간 엄청난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주위에 있던 카메라가 수시로 위치를 바꿔가며 그녀들을 찍어 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늘 위에는 드론이 날아다니며 더욱 생동감 넘치는 장면들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

“조명!”

신지혜의 목소리에 모든 조명이 나에게 집중되는 순간.

여섯 명의 여성 모델이 모두 한쪽 무릎을 꿇고 자신의 가방을 내밀었다.

그 모습에 나는 어느 사람의 가방도 선택하지 않고 무대를 내려왔다.

“하 왜 이렇게 떨리는 거야….”

이 두근거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친 듯이 심장이 뛰었다.

“모두 준비하세요. 피날레 퍼포먼스 시작합니다.”

신지혜의 목소리가 대기실에 울려 퍼졌다.

흘러나오는 음악이 일시적으로 끊어지며 모든 조명도 한순간에 꺼졌다.

그리고 얼마 뒤 모든 조명이 한 사람을 비추기 시작했다.

집중도를 확 끌어올리려는 기법의 하나였다.

“다니엘! 다니엘 선생님 올려보내요.”

“오케이.”

마지막 피날레 퍼포먼스가 시작되었다.

* * *

YK어패럴 사장실

송원일이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컬렉션 영상을 보고 있었다.

제너락의 컬렉션 쇼가 엉망이 된 모습을 보며 머리가 지끈거렸다.

“개 같은! 병신 같은 새끼들.”

이틀 전 디자인협회와 서울시청이 발칵 뒤집힌 걸 알게 되었다.

자신의 돈을 먹은 협회의 고위직들이 모두 해고되어 필요 없는 쓰레기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검찰에서 불법 자금세탁과 비자금 조성 혐의로 압수수색이 들어왔다.

사건이 연쇄적으로 터져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기대했던 제너락의 컬렉션도 모두 망쳐버렸다.

“젠장!”

몇 달 동안 퍼부은 돈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올라올 거 같았다.

그리고 패션 나인 3개의 브랜드가 동시에 패션쇼를 진행 중이다.

그런데 아리raM의 영상만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기 방송국 어디야. 광고 다 빼버려!”

“케이블이라 저희 광고가 들어간 곳이 없습니다.”

“아…….”

송원일은 편파적인 방송에 분노했다.

왜? 갖은 술수를 다 썼는데 매번 그걸 극복하는지 송원일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장 실장. 저 새끼들 의상 어떻게 된 거야? 다 불탄 거 아니었어, 나는 그렇게 보고 받았는데 왜! 어떻게? 컬렉션에 올라온 거야?”

“분명 공방에서 의상들을 모두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불을 지르는 것도 확인했는데…….”

“어이. 장 실장님! 이 십장생아. 너까지 이러면 나는 누구한테 일을 맡기냐? 주위에 일을 제대로 하는 새끼가 하나도 없어!”

송원일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골프가방에서 자주 애용하는 5번 드라이버를 꺼내 들었다.

“대가리 잘 감싸라. 다치기 싫으면.”

“예, 사장님.”

장 실장은 당연하다는 듯 팔을 들어 올려 머리와 얼굴을 감싼다.

그 모습을 썩은 미소로 바라보던 송원일이 장 실장을 향해 골프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장 실장은 어금니를 강하게 물고 참아내고 있었다.

갈비뼈 하나, 어쩌면 오늘은 손목 어딘가가 부러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버텨야 했다.

큰형님을 교도소에서 빼내려면 이놈의 힘이 필요했다.

송영태가 감옥에 가는 바람에 계획이 많이 틀어졌다.

‘형님만 다시 나오면….’

현재 자금줄인 송원일이 없다면 BB 엔터테인먼트도 무너질 거다.

‘버텨야 한다. 다시 시궁창에 살 수는 없어.’

매타작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쳐버린 송원일이 골프채를 바닥에 강하게 던져버렸다.

장 실장은 몸을 추스르고 골프채를 다시 가방 안에 조심히 집어넣었다.

“오늘은 얼마면 되냐?”

“일억 받겠습니다.”

“싸게 먹혔네. 와씨 스트레스 졸라 풀리네.”

송원일은 매타작이 끝이 나면 맷값으로 흥정한다.

“나 정말 멋진 사장 아니냐. 다른 놈들 같으면 두들겨 패기만 할 텐데 나는 너희가 달라는 대로 돈도 주잖아.”

“네, 그렇습니다.”

송원일은 이런 상황이 너무 즐거웠다.

마치 동물처럼 자신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인간이 있다는 게 즐거웠다.

“송영태 사장이 좋은 사람 소개해줬다니까 둘 다 나를 즐겁게 한다니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근데 있잖아. 장 실장 이번에 내가 시킨 건 왜? 네가 직접 안 하고 다른 사람 시킨 거야? 존나게 궁금하네.”

“그게….”

“우리 완벽한 장 실장님이 몸을 사릴 때도 있네.”

“죄송합니다.”

장 실장은 잘못을 뉘우치며 고개를 숙였다.

“하 나가봐. 갑자기 재미가 없네.”

“예, 알겠습니다.”

송원일은 넥타이를 풀어버리고 소파에 벌러덩 누운 상태에서 생각에 잠겼다.

“아 계속 엮이네…. 거지 같은 새끼들.”

송원일은 더는 한국의 오트 쿠튀르에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

한 번 더 장난질 쳤다가는 분명 구렁텅이로 빠질 게 뻔했다.

압수수색이야.

뒷구멍으로 나쁜 짓을 다 해놓은 거라 별로 걸릴 것도 없었다.

욕심을 부리다 또다시 아버지 귀에 들어간다면 가지고 있는 것도 뺏길 판이니 몸을 사려야 한다.

“차진혁이라. 재미있어.”

* * *

안윤호 선생님이 1m는 되어 보이는 큰 붓을 들고 나타났다.

붓에서는 검은 먹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모든 조명이 그를 비추었고 모든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 순간 전체 스무 명의 모델이 무대로 걸어 나와 정면을 바라보며 교차하게 자리에 멈추었다.

“선생님 시작해주세요.”

바람 소리가 음향장치를 통해 쏟아졌다.

나는 앞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정면에 설치된 대형스크린을 통해 어떤 행위가 일어나는지 알 수 있었다.

“멋지다.”

야성미 넘치는 분장으로 안윤호의 모습은 마치 야수 같았다.

백색의 단정한 옷에 머리를 풀어 자유로움을 표현했다.

안윤호는 붓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바람 소리에 몸을 맡기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획 한 획에 힘이 들어가 있었고 기개가 엿보였다.

모델 한 명 한 명의 옷에 먹을 묻히고 산과 들을 그려나가듯 글자를 써 내려갔다.

한참 동안 퍼포먼스가 이어졌고 가장 메인 자리에 서 있던 나를 마지막으로 퍼포먼스가 끝이 났다.

“끝났다. 이제부터 너희들 몫이다.”

마지막 한 획을 그으며 선생님이 나에게 조용히 말을 흘리셨다.

마지막 획을 끝으로 조명이 다시 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수십 개의 조명이 등을 돌린 모델 개개인의 의상에 비추었다.

그리고 무형문화재 안윤호의 명필이 드러났다.

한 명 한 명의 등에는 아름답고 존경스러운 이름들이 적어있었다.

그때 신지혜의 해설이 시작되었다.

“권기옥 열사, 김용환 의사, 민영구 의사, 이화림 열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와 장하나의 등에는 손수레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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