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200)

김 비서의 브리핑이 끝이 나고 박주선은 안철호를 바라봤다.

“어떻게 할 거야?”

“고문님 살려주십시오. 저는 정말 모르고 한 일입니다.”

“협회장이나 되어서 이런 일을 몰랐다고? 그 자리는 지키고 싶은가 보지.”

협회장은 무릎까지 꿇고 박주선에게 빌고 있었다.

자리만 지킨다면 언젠가는 이 치욕을 갚아 줄 수 있다는 생각인 듯 눈빛은 아직 살아있다.

그때 회의장의 문이 열리고 서울시장인 박원석이 등장했다.

“시장님…….”

“협회장님 어쩌다 이렇게 되셨습니까.”

박원석은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분노가 끓어 오르고 있었다.

“선생님. 이야기는 김 비서님을 통해 들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어떻게 할지 고민 중입니다. 정말 면목 없습니다. 이번 대회 제가 시장님께 권유해서 추진해주신 건데 죄송합니다.”

“별말씀을요. 책임은 협회장 알아서 하겠지요.”

안철호는 시장의 말 한마디에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었다.

박원석의 말은 모든 책임을 안철호가 지라는 뜻과 같았다.

“선생님 저는 괜히 말이 새어나가는 걸 싫어합니다. 여기서 조용히 끝내셨으면 합니다.”

박원석은 얼마 뒤 있을 국회의원 선거에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은 듯 조심스러웠다.

“네 시장님.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시청 쪽에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여기 인원들 책임져 주십시오. 저는 이만 가봐도 되겠죠?”

“네 시장님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회의장을 빠져나가는 박원석은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했다.

정치바닥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였다.

서울시장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더욱 박주선에게 쏠렸다.

‘여우 같은 할망구. 일부러 시장을 불러들이다니!’

“고문님 제발….”

박주선은 안철호를 슬쩍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고문의 권한으로 협회장을 패션디자인 협회에서 제명한다. 그리고 심사위원 모두 자격을 박탈한다. 한국의 오트 쿠튀르 최종 3차는 전 국민이 참여할 수 있도록 오프라인과 온라인, ARS로 대체하도록 한다. 불만들 있어?”

“없…. 습니다.”

박주선의 한마디에 모두 수긍했다.

여기서 반기를 든다면 협회장과 같은 처지가 될 게 분명했다.

“그리고 안철호. 시장님이 조용히 넘어가라고 했지만 내가 은퇴하기 전에 협회 썩은 동아줄 다 도려내야 할 거 같은데 협조 좀 해줘야겠어.”

“그게 무슨?!”

“너랑 같이 돈 받아 처먹은 새끼들 다 불어 안 그러면 검찰에 바로 넘겨버릴 테니까.”

박주선이 칼을 빼 들자.

주위가 어수선해졌다.

“카메라 돌아가고 있어 다들 표정 관리해 살고 싶으면.”

안철호는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송원일이 자신을 지켜줄지 말지.

하지만 송원일은 썩은 동아줄인 자신을 가차 없이 버릴 거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검찰에는 제발 넘기지 말아 주십시오.”

“오호 그래. 말해 그러면 여기 있는 놈들 중에 같이 돈 받아먹은 놈들 불어.”

“박 이사, 정태호 부장, 김현우 부장, 윤한길 과장…….”

“김 비서. 명단 나한테 다 가져오고 안철호는 대회가 끝나는 시점으로 검찰에 넘겨.”

“네, 선생님.”

박주선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경연대회 [컬렉션] 3.

* * *

드디어 컬렉션이 시작되었다.

나와 신지혜, 류미리, 그리고 다니엘까지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컬렉션 무대의 총책임자인 신지혜는 음향감독과 조명감독과 회의를 진행하며 꼼꼼하게 무대를 체크했다.

그때 낯익은 사람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활짝 웃는 얼굴로 나에게 다가온 한하율이 먼저 손을 내밀며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네요. 뉴스는 봤는데 일은 잘 해결됐어요?”

“네 뭐. 겨우겨우 준비해서 오기는 했습니다.”

“다행이네요. 설마 했는데 지혜한테 연락하니까 난리라고 전화를 끊어서 걱정했거든요. 하여튼 오늘 잘 부탁드릴게요.”

“제가 부탁드려야죠.”

“아 그리고 오늘 대표님도 무대에 서신다면서요.”

“하……. 그래야 될 거 같아요.”

“잘하던데 뭘 그렇게 긴장해요.”

나는 VOKE라는 패션 매거진의 단독화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런 이유에 무대에 올라가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나와 한하율이 대화를 이어갈 때쯤 장하나가 우리를 향해 뛰어왔다.

“사장님! 공방 어떻게 됐어요?”

‘오늘만 해도 몇 번째야….’

“잘 해결됐습니다.”

“휴…. 다행이네요. 근데 진짜 섭섭하게 그런 일이 있으면 연락 좀 해주세요. 그래도 제가 명색이 아리raM 메인 모델인데 걱정돼서 죽는 줄 알았어요. 다들 전화도 안 받으시고.”

“바빴어요. 의상이 다 불타버려서.”

“그것도 모르고 제가 괜히 오버했네요. 그래도 다음에 이런 일 생기면 꼭 연락해주세요. 저도 돕고 싶어요.”

나는 그녀에게 살짝 웃어 보이며 고마움을 대신했다.

사실 장하나와 괜히 엮이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알게 모르게 나에게 호감을 표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에게 더 중요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눈앞에 있는데 여자라니 가당치도 않다.

‘사랑…. 아니 복수가 먼저야!’

나는 둘에게 인사를 건네고 류미리에게 다가갔다.

의상을 점검 중인 그녀에게 신지혜와 내가 정리한 의상 전개도를 전달했다.

나는 이번 전개도를 올드함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디자인하며 컬렉션의 전개도 생각해둔 터라 어려움은 없었다.

신지혜가 계획한 뮤지컬 컬렉션은 무대에 오른 모델들이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무대의 특성에 맞게 넓은 공간을 잘 이용해 주어야 한다.

서로가 겹치는 지점에서 모자와 소품을 자연스럽게 바꿔가며.

진짜 뮤지컬처럼 춤을 추고 대사를 하는 건 아니지만 음악과 모델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재미를 더해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리허설 때는 의상은 착용하지 않으니까. 지정된 모델들 순서만 맞춰서 내보내면 돼요. 그리고 리허설 끝나면 의상 스태프들이랑 다시 한번 확인하셔야 해요.”

“네, 사장님. 간격 차도 적힌 그대로만 하면 되는 거죠?”

“맞아요. 그리고 이거 받으세요.”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타임워치를 전해주었다.

뮤지컬 형태의 컬렉션이 이루어질 예정이기에 시간 간격에 오차가 발생하면 안 된다.

“근데 안윤호 선생님은 언제 내보내야 하나요?”

“선생님은 모델들이 무대 전체에 배치되는 순간. 마지막에 올려보내시면 돼요. 신 디렉터가 다니엘한테 설명했다고 했으니 미리 씨는 신경 쓸 필요 없을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전각장 장인의 퍼포먼스가 아리raM 컬렉션의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해줄 예정이다.

다행히 순조롭게 컬렉션이 준비되어 가고 있었다.

.

.

.

리허설 시작 전.

방송국의 관계자들이 주위에 몰려든 시민들 통제와 카메라 설치에 분주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일일이 인사를 했다.

그때 총 책임자인 연출 PD가 나를 보며 다가왔다.

“패션 나인 담당 PD 이창진입니다.”

“최진혁이라고 합니다.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잘 부탁드려야죠. 시청률이 아리raM 덕분에 많이 상승해서 저희 국장님도 신경 많이 써주라고 하셨거든요.”

“그럼 고생 좀 해주세요.”

“네, 대표님 언제 저랑 밥 한 끼 하시죠. 제가 패션 나인 종방되면 패션프로그램 기획 중이거든요. 아리raM 대표님이 좀 참여해주셨으면 하는데.”

나는 뜻밖의 제안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괜히 귀찮은 일에 엮이고 싶지 않았다.

비인기 케이블 방송이라는 점과 현재의 회사 사정으로는 시간적 여유가 부족할 거 같았다.

‘일단 이야기나 들어보지 뭐.’

“네 그럼 다음에 식사하면서 이야기하시죠.”

“네 감사합니다.”

내가 다시 대기실로 이동하려는 그때.

헤드폰으로 신지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듣고 계세요?”

“네 말씀하세요.”

“방송국에서 카메라 설치 다 끝났다고 리허설 해도 된다고 하는데 바로 하시죠.”

“네.”

내 대답과 함께 리허설을 시작하기 위해 모델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리허설이니까. 편하게 합시다.”

“네.”

“사장님도 준비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내가 힘이 다 빠진 목소리로 헤드폰에 내 의사를 전달하자 신지혜가 큰 목소리로 나를 응원했다.

힘!

주위에 헤드폰을 끼고 있는 스태프의 웃음소리가 퍼져 나왔다.

.

.

.

리허설이 무사히 끝이 나고 모두 대기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리허설 정말 대단하던데요.”

“신 디렉터 대단한 사람인 건 알았는데. 캬!”

류미리와 다니엘은 연신 감탄사를 연발했다.

신지혜의 무대 기획을 처음 보는 둘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시대를 앞질러가는 기획연출이 그녀의 특별한 능력이었다.

틀에 박힌 뻔한 패션쇼가 아닌 의상과 하나 된 특별한 컬렉션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신지혜였다.

“대표님 모델들 헤어랑 메이크업 끝났는데.”

“네, 바로 갈게요.”

‘내가 이 짓을 또 하다니 미치겠네.’

미루고 미루다 마지막으로 헤어와 메이크업에 들어갔다.

괜히 먼저 했다가 다니엘에게 놀림을 당하거나 이상한 야유를 들을 거 같아 최대한 미뤘다.

근데 내가 스타일을 만들고 나오자 생각지도 못한 반응들을 보인다.

비웃을 거 같던 다니엘도 류미리와 주위에 함께 있던 한하율과 장하나의 시선도 일순간에 나에게 집중되었다.

“그렇게 이상해?”

“아니…. 너 오늘 보니까 잘생겼다.”

“왜 이래. 차라리 비난해.”

“아니야 진짜 잘생겨 보이는데. 아씨 기분이 안 좋아.”

다니엘은 이 미묘한 짜증 나는 감정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눈치인데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놀려주려고 했던 놈이 잘생기게 나타나니까 기분이 이상했던 것이다.

“잘생긴 놈한테 못생겼다 할 수도 없고 나는 안윤호 선생님께 갈래.”

다니엘이 사라지고 류미리와 장하나, 한하율까지 나에게 다가왔다.

“사장님….”

“대박이네요. 저보다 더 모델 같으신데.”

“역시 내가 보는 눈이 있다니까. 저랑 계약하실래요?”

셋 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사장님 그렇게 웃음 팔고 다니면 큰일 나요. 뭐 저한테는 괜찮은데. 이 두 여자는 어찌할 거예요.”

“네?! 무슨.”

“이 두 여자 눈빛이 딱 사랑에 빠진 눈빛들인데.”

한하율의 묵직한 한마디에 장하나와 류미리 모두 얼굴이 붉어지며 큰소리로 부정했다.

“아니거든요. 대표님.”

“저도…. 아니에요.”

한하율은 크게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좋을 때다. 좋을 때야. 이 아름다운 청춘들 승자가 누가 될지 궁금하다 궁금해.”

그 말을 남기고 한하율이 돌아가자.

장하나와 류미리 둘 사이에서 이상한 기류가 포착되었다.

마치 말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서로서로 경계하는 듯한 엄청난 어둠의 기운이 주위를 맴돌았다.

그 순간 구원의 목소리가 헤드폰을 타고 날아들었다.

“방송시간 5분 전 모델들 대기해주세요. 곧 컬렉션 시작합니다.”

* * *

한국의 베니스라 불리는 김포에 있는 인조 호수공원에서 제너락의 컬렉션이 한창 진행 중이다.

제임스 딘이 무대 연출을 맡게 되었다는 소문이 퍼져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레디! 고!”

웅장한 버전으로 편곡된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가 흘러나오며 드레스를 입은 모델들이 물 위를 걷기 시작했다.

그때 구경 중인 시민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 와 대박!

― 미친 물밑에 무대 설치한 거 가봐.

― 와….

뒤를 이어 프리랜서와 패션 잡지에서 나온 카메라 작가들의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누가 보아도 엄청난 연출력이었고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올 수 없는 무대다.

그런데 그때 험악한 얼굴로 제너락의 총괄디자이너가 총연출자가 앉아있던 통제실로 쳐들어왔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뭐가? 왜 이러는 거야. 아무 사고 없이 컬렉션이 진행 중인데.”

총괄디자이너는 머리를 감싸고 무대를 비추고 있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거 안 보여. 드레스에 물이 올라타잖아. 이제 중간지점 돌아가는데 이딴 식으로 얼룩이 지면 메인 스트레이트에서 어떻게 될 거 같아!?”

“어이 디자이너. 그건 당신들 문제지. 나는 무대 디자이너지 패션디자이너가 아니잖아. 그건 사전에 말했어야지 왜 인제 와서 그러는 거야!”

“이런 미친놈이!”

제너락의 총괄디자이너는 제임스 딘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 순간 기분이 나빠진 제임스 딘이 헤드셋을 바닥에 내팽개쳐버리고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그 순간 또 다른 사고가 일어났다.

“으악!”

미끄러운 무대를 걷고 있던 모델 한 명이 발을 헛디뎌 호수 아래로 떨어진 거다.

주위에 있던 구조대가 물로 뛰어들어 완전 아비규환의 상황이 연출되었다.

런웨이를 진행 중인 모델들의 시선도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메인 스트레이트에 도착한 모델이 멋진 자세를 잡는 순간.

카메라 셔터가 터져 나왔지만, 작가들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

“뭐야…. 옷이 다 얼룩져서 사진 쓰지도 못하겠는데.”

“그러게 포토샵으로 만질 수도 없겠어. 아씨 아리raM 쪽으로 갔어야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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