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200)

* * *

나와 할아버지 아리raM의 식구들 모두 아침 일찍부터 출근해 제보 박스를 시청 중이다.

“아깝네요. 이틀만 더 빨리 방영하지.”

신지혜는 경연대회의 아쉬움이 남았는지 작은 미련을 아직 품은 듯했다.

방송의 효과로 오프라인 투표를 더 끌어올렸다면 결과가 바뀔지도 몰랐을 거라는 미련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대로 방송 날짜까지 바꿀 능력이 있는 게 아니니 3등으로 만족해야 했다.

“드디어 제가 DDP에 아리raM의 디스플레이 관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저 말고 또 한 분을 모셨는데요. 나오시죠. 선생님.”

환호하는 효과음이 들리며 개량한복을 입은 할아버지 한 분이 나타났다.

커다란 안경과 중절모를 쓰고 계셨는데 손수레 할아버지는 그 모습이 멋있어 보였나 보다.

“개량한복에 중절모라 멋쟁이고만.”

그런데 옆에서 듣고 있던 다니엘이 놀라며 말을 이었다.

“저게요….”

“네가 멋을 알아?”

“할아버지……. 아닙니다. 제가 또 제 자랑하면 프로그램 끝날 거 같아서 안 하렵니다.”

“이놈이.”

“할아버지는 꼭 사장 놈만 이뻐하시더라.”

“잘생겼잖아.”

나는 다니엘의 이 미친 친화력에 감탄했다.

할아버지와 오늘 처음 대화하는데 마치 오래된 손자 같았다.

“오 가구 나와요.”

신지혜의 말에 모두 텔레비전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대단합니다. 이 가구는 한국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고가구예요. 보존이 이렇게 잘되어 있다니.”

“근데 이 가구에 경첩들이나 모양들이 너무 특이한데요. 무슨 의미가 있나요?”

“여기 보시면 중간에 연꽃무늬를 오상화라 합니다.”

“오상화요? 처음 듣는 꽃 이름이네요.”

“상상의 꽃입니다. 좋은 일을 일어나게 하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실패 모양은 장수를 뜻합니다.”

“좋은 의미가 담겨있는 가구네요.”

“그렇죠. 조상들의 바람이 담겨있는 거죠. 그리고 이 조각된 무늬는 여의도문이라 해서 모든 일을 뜻대로 이루라는 의미입니다.”

“이야. 이 가구를 가진 분이라면 엄청난 행운이 따르겠습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이 가구의 감정가는 얼마 정도 될까요?”

“감정가라.”

감정사는 한참 동안 생각을 하다가 말을 내뱉었다.

“어렵네요. 그래도 금액을 측정한다면 10억의 가치가 있습니다.”

“10억이요! 대단하네요.”

그리고 뒤를 이어 주위에 있는 소품들도 하나하나 감정이 이루어졌다.

그중에서도 금액은 많지 않지만, 진품으로 판명된 소품이 2개나 발견되었다.

개화기에 만들어진 거울과 탁자였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감정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훔치고 계셨다.

“아이고 주책은. 아버지가 잘 지키라고 하셨던 게 기억이 나서 주책을 부렸네. 나는 저런 줄도 모르고 창고에나 가져다 놨으니 이게 무슨 불효야.”

할아버지의 이층장은 1800년 중기에 만들어진 문화재로 보존의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엄청난 여파가 우리를 엄습했다.

“사장님 인터넷 난리 났어요.”

“갑자기 무슨 난리?”

“한번 보세요.”

신지혜는 모니터를 돌려 실시간 검색어와 인터넷 뉴스를 확인시켜 주었다.

― 명품 속에 명품 아리raM.

― 진품을 알아보지 못한 짝퉁 심사위원들.

― 독립 운동가 후손의 이층장에 얽힌 사연.

― 아리raM은 어떠한 브랜드인가.

― 한국의 오트 쿠튀르 경연대회 아리raM

└ 박무식 ― 심사위원들 수준하고는 진품도 못 알아보냐!

└ 김짱 ― 문화재 전문가도 아닌데 어떻게 아냐. 적당히들 하지.

└ 귀여니 ― 오프라인 투표했던 사람인데 아리raM 3등 실화냐 심사위원들 눈알 썩음?

└ angel12 ― 어제 점수 좀 이상하지 않았음?

└ 염띠 ―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 jre12 ― 패알못 새끼들 아는 체 그만해

└ ㅇㅇ ― 이 새끼 심사위원인 듯

└ 태연 ― 심사위원들 다시 뽑아라!

└ emrghk ― 뜬금없이 디스플레이까지 추가시키니까 욕먹지 병신들….

댓글 창에서는 진실 공방이 이어졌고 심사위원들에 대한 비난 여론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하나의 기사에 집중했다.

독립 운동가의 후손 김태우.

손수레 할아버지의 인터뷰 영상이 담겨있는 기사였다.

KTB PD 안혜진이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동료 기자를 통해 할아버지의 단독 인터뷰를 기사로 올려달라는 부탁이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10살도 되기 전에 집을 떠나셔서 돌아오시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해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정미년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할아버지의 할아버님도 독립 운동가셨던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독립운동을 하셨지요. 그런데 저는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매번 원망만 했었거든요. 정말 원망스러웠습니다. 왜 이렇게 자랑스러운 일을 하고도 우리는 가난하고 손가락질받으면서 살아야 하는지 이 나라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죄송합니다. 언론인의 한 명으로서, 그리고 대한민국 시민의 한 명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할아버지는 얼굴을 붉히시며 고개를 저으셨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세월이 흘러보니 저도 참 어리석었습니다. 그 큰 뜻을 나이 80에 알아버렸으니……. 두 분 다 무엇을 얻으려 했던 게 아니었을 겁니다. 그저 내 자식이 누군가의 아이가 누군가의 가족이 모두 내 나라에서 행복하길 바라셨을 겁니다.”

“존경스럽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한가지 질문을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끝내겠습니다. 고가구는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죠?”

“나라에 기증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만약 보상금이 주어진다면 어려운 독립 후손 자녀들의 장학금으로 쓰고 싶습니다.”

인터뷰하고 있던 기자가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목멘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말 대단한 가족입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합니다.”

나도 영상을 바라보면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가 집중하는 틈에 신지혜와 류미리도 뒤에서 영상을 지켜보았는지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저희도 동참하는 건 어때요?”

내 질문에 신지혜와 류미리가 엄지손가락을 높게 올려 보였다.

경연대회 [컬렉션] 1.

* * *

컬렉션 준비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와 류미리는 의상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소매 벨 부분은 바느질할 때 특히 신경 써주세요. 기존보다 훨씬 넓혀야 하니까.”

“네.”

벨은 매끄럽게 내려오는 소맷단 끝을 나팔꽃처럼 활짝 펼친 디자인이다.

우리는 밝은 느낌을 강하게 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중이다.

그런 이유에 기존의 넓힘보다 서너 배는 크게 디자인을 변경했다.

“그리고 하의 원단을 비단도 좋은데 아라베스크나 셰브런도 한번 적용해 보죠.”

“네, 가봉처리까지 해서 보여드릴게요.”

“이 정도면 되겠죠?”

“네 충분해요.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내일까지 마무리하죠.”

“네.”

아라베스크와 셰브런 둘 다 원단 패턴의 일종이다.

아라베스크는 서로를 엮은듯한 꽃이나 기하학적으로 만든 무늬를 말하며 셰브런은 줄무늬를 서로 교차하여 지그재그로 만든 무늬다.

나는 두세 개의 의상에 포인트를 주어 다른 느낌을 선보이고 싶었다.

“아. 사장님 이거 모델들 메이크업이랑 헤어 리스트예요. 전날에만 결정해주시면 제가 전달할게요.”

“네, 확인해볼게요. 미리 씨는 이제 제작에만 신경 써주시고요.”

“네, 사장님.”

그녀에게 의상제작에 대한 권한은 모두 넘겼다.

얼마 전 류미리가 데리고 온 바느질 장인들 덕분에 의상제작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미리 씨 바느질 장인 세 분 잘 챙겨 주세요. 부족한 거 있으면 저나 신 디렉터한테 바로 말해주시고요. 저는 바빠서 신경 못 쓸지도 몰라요.”

“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어릴 적부터 같이 살다시피 한 분들이니까.”

얼마 전 바느질 장인 3명이 류미리의 추천으로 고용되었다.

“사장님 의상 쪽 인력 더 안 구하세요?”

“장인들이 필요하긴 하죠. 기성복으로 가더라도 어느 정도는 손바느질 장인들이 필요하니까요.”

“그럼 혹시 제가 추천해도 될까요?”

“추천이요?”

“네, 할머니 밑에서 배우신 분들인데 소일거리로 해보고 싶다고 하셔서 실력은 제가 보장할게요.”

침선장의 제자들이라.

“영광이죠. 모두 오시라고 해주세요.”

나는 기술적인 부분을 제외한 그들의 인성을 알아보고 싶었다.

괜히 마찰이 생겨 불편해지는 걸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

하지만 3명 모두 좋은 성격을 가진 분들이었다.

그들 모두 침선장의 제자로 결혼과 동시에 한복과 멀어졌고 다시 일을 하고 싶지만, 여건이 마련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들은 고용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문제점을 발견했다.

‘공방이 조용할 날이 없네….’

세분 모두 일을 할 때도 입이 쉬지 않고 움직였고 미친 친화력의 다니엘이 거기에 포함되어버렸다는 거다.

“다니엘. 어제 내가 보라는 드라마 봤어?”

“봤죠. 열 받던데 막장 남편 윽!”

다니엘이 고개를 저으며 화를 냈다.

그 순간 반응을 보던 바느질 장인들이 배를 잡고 웃고 난리가 났다.

“그 썩을 놈을 진짜.”

“그래 아내 고생시키는 놈들은 아주 그냥 허리 몽둥이를 꽉 분질러야 한다니까.”

나는 슬쩍 끼어들고 싶어 농담으로 말을 건넸다.

“여러분 정숙 합시다.”

“사장 놈 너나 조용히 해라!”

“다니엘 너! 이리 와.”

또 이렇게 활기찬 하루가 시작되었다.

.

.

.

나는 다니엘과 한참을 티격태격하다 사무실로 들어왔다.

“밖에서 뭐 하셨어요. 엄청 시끄럽던데.”

“다니엘이랑 대화 좀.”

“어휴.”

신지혜는 혀를 차며 잔소리를 하려다 꾹 눌러 담는 듯했다.

“기획서예요. 결재 좀 해주세요.”

나는 신지혜가 정리한 컬렉션 기획서를 받아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어때요?”

“좋은데요. 한국 민속촌이라……. 근데 이 장소 섭외 가능해요?”

“그럼요. 일단 문의는 넣어뒀는데 긍정적이에요. 그리고 모델에이전시는 HH에서 맡아주기로 했어요. 필요한 모델 리스트도 받았고요.”

“리스트 좀 볼 수 있을까요?”

“네. 여기요.”

나는 모델 리스트를 확인하며 의상에 부합하는 인력을 살펴보았다.

“메인 모델 장하나를 핵심으로 세우고 이 사람도 괜찮은 거 같네요.”

“요즘 떠오르는 모델이에요. 일단은 요청할게요. 급한 건 아니니까. 천천히 알려주세요. 그리고 VOKE에서 제안이 들어왔는데 사장님이 컬렉션에 올라갔으면 한답니다.”

“싫습니다.”

“왜요. 저번에 보니까 괜찮던데 한 번 더 올라가세요. 조건이 조금 바뀌어서 욕심도 나고요.”

“제가 모델도 아니고 디자이너인데. 무대는 좀…. 근데 조건이 바뀌었다니요?”

“VOKE에서 온리 원 백이랑 다른 브랜드 의상을 주제로 봄호 준비 중이었는데. 사장님이 컬렉션 올라가시면 아리raM 의상을 메인으로 바꿔주겠다고 하더라고요.”

“…하.”

“VOKE만이 아니라 제 생각도 같아요. 컬렉션을 한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닌 거 아시죠. 셀럽들 초청도 해야 하지만 우리에게 오느냐도 관건이에요.”

“그렇긴 하죠.”

“그리고 잡지사 디렉터들이나 바이어가 어디에 몰리냐에 따라서 업계에 영향력이 달라져요. 사장님 등장한다는 걸 언론에 퍼트리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거 같은데.”

“……생각은 해볼게요.”

“네 그럼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참가하는 쪽으로”

“……생각 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리스트를 내려두고 다시 기획서를 살폈다.

신지혜의 컬렉션 기획능력이야 볼 필요도 없겠지만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네요. 그럼 이렇게 진행하죠.”

“네.”

이번 컬렉션은 콘셉트는 뮤지컬이다.

그녀가 기획한 아이디어는 늘 새로웠다.

민속촌이라는 공간을 그대로 살려 음악과 퍼포먼스 위주의 무대를 기획 중이다.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 컬렉션이었다.

* * *

“왜 관심이 아리raM에 쏠리냐고 그리고 내가 그 새끼 브랜드 그만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하……. 죄송합니다.”

“내가 들인 돈이 얼만데! 당신들 한 자리씩 만들어 주려고 나는 노력을 하는데 왜 당신들은 노력을 안 해?”

송원일의 일방적인 협박에 살짝 열이 받은 박 이사가 말을 이었다.

“사장님 저희는 할 만큼 했습니다. 투표율 감소시키려고 오프라인으로 변경까지 했고 얼토당토않은 디스플레이 점수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욕먹어 가면서 제너락과 이안섭 하우스에 점수 몰아 줬지 않습니까.”

“그래서?”

“네?!”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 이 새끼야. 네가 잘했다고 나한테 하는 소리야.”

“사장님!”

“당신들이 무얼 하든 나한테 크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나는 결과가 중요해 결과가! 너희가 사람을 죽여버리건 회사를 무너트리건 제재를 가하든 간에 아무 상관이 없다고 결과가 중요한 거야 알아들어!”

“……하”

“너희들이 그러니까 그따위로 사는 거야. 돈벌레 새끼들아 기라면 기는 거지 뭔 말이 많아.”

박 이사 옆에 앉아있던 안철호 협회장이 박 이사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약간의 힘을 주어 제발 그만하라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야지 죄송!”

“사장님 오늘은 술이 과하신 거 같습니다. 이만하시죠.”

“안철호 씨 당신이 제일 문제야 처음부터 고문인가 뭔가 그 할망구한테 우겨서라도 아리raM 출전 안 시켰으면 이런 일 일어나기라도 했어.”

“죄송합니다.”

송원일은 분노에 차 위스키를 연거푸 마셔댔다.

이번 2차 경연대회 1등과 2등 모두 자신이 지원한 브랜드가 선택되었다.

그런데 관심은 온통 3등인 아리raM에 쏠려있어 분통이 터질 지경이다.

“박 이사님.”

“네, 사장님.”

“잘합시다.”

“네….”

박 이사는 순간 송원일의 눈빛을 읽었다.

‘무슨 짓을 하려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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